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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건축, 균형과 성장의 갈림길

등록 2009-11-08 14:50

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
[난이도 수준-고2~고3]

8. 학교, 군대, 교도소는 왜 닮은꼴일까? - 근대가 현대가 되려면
9. 도시에는 표정이 있다 - 거리에서 시대를 읽는 법
10. 어떤 차이가 차별을 낳을까?-왕따의 사회학

“어떤 의자가 가장 마음에 드십니까?” 근대 건축의 대가인 르코르뷔지에에게 기자가 물었다. 그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비행기 조종석 의자입니다.”

비행기 조종석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다. 비행기 자체도 그렇다. 중량과 씨름하는 가운데 비행기는 가장 꾸밈 없고 효율적인 장비로 거듭났다.

르코르뷔지에는 건축도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건물이란 ‘생활하기 위한 기계’라고 잘라 말한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유럽의 거리는 장식이 화려한 석조 건물로 가득했다. 하지만 뭐 하러 그래야 한단 말인가? 집은 추위와 더위를 막고 사람들을 지켜주기만 하면 된다.

따라서 르코르뷔지에는 엄청난 제안을 내놓는다. 이제 건물은 높이 200미터, 폭 150~200미터로 거대하게 지어야 한다. 왜 이렇게 해야 할까? 효율을 위해서다. 실제로 르코르뷔지에는 프랑스 파리의 절반 정도를 고층건물로 뒤덮는 안을 내놓기도 했다.

“경제는 아주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손안에 있습니다. 수도(首都)를 잘 갖춘 나라가 성공할 것입니다.”


르코르뷔지에의 주장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우리나라에도 서울 중심부 빌딩 높이를 더 올리고 여러 기관을 한곳에 모아놓아야 경제가 더 효율적으로 움직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작가 알랭 드 보통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르코르뷔지에가 만들 빌딩 한 동에는 2699명의 사람들이 살 테다. 그런데 누군가 한 층에서 떠들썩한 파티를 벌였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정신 이상한 사람이 총을 손에 넣게 된다면? 엘리베이터에 불이 났을 때 44층에 사는 이들에게는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위대한 건축가들은 일상의 소소한 문제를 놓치기 쉽다.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한 도시에서는 누구나 원하는 곳에 쉽게 다다를 수 있다. 그러나 효율적인 생활이 꼭 좋은 삶은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도서관에 책 한 권을 빌리러 갈 때도 르코르뷔지에의 도시에서는 낭비가 없다. 원하는 곳에 가장 빨리 다다르도록 도로가 놓일 테니까. 그러나 전통적인 도시에서는 다르다. 무엇을 하러 나가건, 사람들은 거리에서 여러 가지를 겪고 경험한다. 생선가게에서 물고기를 늘어놓는 모습을 보기도 하고, 소녀가 버스정류장에서 책을 읽는 광경에 왠지 모를 감동을 느끼기도 한다.

나아가 알랭 드 보통에 따르면, 건축은 한 시대의 소망을 담기 마련이다. 어지럽고 불안한 사회에서는 질서 있고 안정된 기하학적인 건물을 좋아한다. 반면, 행정이 자리 잡히고 경제가 궤도에 오른 시대에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건축물이 대접받는다. 우리네 건물들을 떠올리면 알랭 드 보통의 말이 금방 이해될 듯싶다. 붕어빵 같았던 70~80년대 건축과 독창성을 강조하는 지금의 건물들은 시대 차이만큼이나 모양새가 다르다.

그렇다면 지금 논란이 되는 행정중심도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르코르뷔지에라면 신도시 계획에 펄쩍 뛸지 모르겠다. 차라리 서울 한복판 건물들을 더 높게 짓는 편이 낫다고 말이다. 경쟁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기능을 여러 곳으로 나누면 안 된다. 오히려 이미 있는 도시의 효율성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편이 낫다. 그동안 대한민국의 경쟁력은 모든 기능이 한곳에 집중된 서울의 힘이지 않았는가. 사람과 차가 다니는 동선을 효율적으로 꾸린다면, 이런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하기는 어려울 듯싶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판단은 또 달라진다. 방 한가운데 푹신한 의자가 놓여 있다. 벽을 따라서는 딱딱한 나무벤치가 자리 잡았다. 사람들은 어디에 앉으려 할까? 대부분은 불편한 벽면의 의자를 택한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에는 효율성만으로 따지기 힘든 섬세한 면들이 많다.

건축은 시대의 소망을 닮는다. 1968년에 세워진 서울의 세운상가는 르코르뷔지에의 정신을 오롯이 새긴 건물이다. 인구를 가득 담은 주상복합에 건물 1층으로 도로까지 흡수한 구조였다. 그러나 세운상가가 과연 좋은 건물이었는지에 대한 논란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결론은 삶의 질을 위해 이곳을 공원으로 꾸미는 쪽으로 흘렀다. 세운상가가 했던 전자상가의 역할은 서울 바깥으로 옮기고 말이다.

행정복합도시를 둘러싼 고민은 세운상가와 닮은꼴이다. 모든 기능이 집중된 서울은 ‘성장’의 상징이다. 반면, 지방에 건설되는 행정복합도시는 ‘균형’이 핵심이다. 행정복합도시의 앞날은 21세기 대한민국의 중심이 성장에 있는지, 균형에 있는지를 나타내는 잣대가 될 테다. 후손들은 우리 시대 건축에서 둘 가운데 무엇을 읽어낼까?

<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이레  /
<프레시지옹> 르코르뷔지에 지음, 정진국, 이관석 옮김. 동녘
<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이레 / <프레시지옹> 르코르뷔지에 지음, 정진국, 이관석 옮김. 동녘

중동고 철학교사, 철학박사_timas@joong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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