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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나도 그림책 작가, 상처 어루만지고 꿈도 키워요”

등록 2012-07-30 10:22

불곡중학교 진로탐색과정반(그림책 만들기) 학생들이 지난 20일 자신이 직접 만든 그림책과 책에 나오는 캐릭터 봉제 인형을 나란히 들고 있다. 왼쪽부터 함서연, 추연서, 강지현, 정유진 학생.
불곡중학교 진로탐색과정반(그림책 만들기) 학생들이 지난 20일 자신이 직접 만든 그림책과 책에 나오는 캐릭터 봉제 인형을 나란히 들고 있다. 왼쪽부터 함서연, 추연서, 강지현, 정유진 학생.
경험과 상상을 통통 튀는 감성으로 표현해
말로 하기 어려운 이야기 그림으로 그려봐
두세 명씩 짝을 지어 교문으로 들어서는 아이들. 교문 밖에서 그 모습을 쓸쓸히 바라보는 종현은 말수가 적고 소심해 남들 앞에 잘 나서지 못한다. 그래서 친구도 많지 않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한 여학생이 남들 앞에서 기타를 연주해보라고 종현에게 권한다. 종현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자신의 특기인 기타 실력을 뽐낼 기회를 갖게 되고, 그 뒤 자신감을 찾아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고 유지한다.

강지현(경기도 성남 불곡중학교1)양이 실제 자신의 경험과 느낌, 생각을 토대로 20여쪽 분량으로 만든 그림책 <걱정스럽고도 행복한 날>에 담긴 내용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남학생 종현은 강양이 자신의 마음을 형상화해 만들었고, 종현을 좋아하는 여학생은 현실에서 자신을 도와줬던 친구를 염두에 두고 만든 인물이다.

불곡중학교는 지난해부터 미술 교육과정 특성화교로 선정돼 특별한 미술 수업(진로탐색과정)을 진행하고 있다. 외부에서 전문 일러스트레이터가 강사로 와 5주(1회 90분) 동안 학생들이 자신의 경험과 상상 등을 통통 튀는 감성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다. 학생들은 이 과정에서 부모형제에게 쉽게 말로 꺼내기 어려웠던 이야기나 자신들의 눈으로 바라본 다양한 주제를 그림으로 옮겼다. 지난해에 55명, 올해 1학기에 32명이 이 과정을 들었고, 그 결과를 모아 지난 6월 서울 코엑스(COEX)에서 열린 ‘2012 서울국제도서전’에 전시해 눈길을 끌었다.

그림책을 제작하기 시작한 올해 3월 강양은 친구 문제로 많이 힘들었다. 책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어두웠는데, 힘들었던 학년 초의 상황에서 그 까닭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리던 때의 우울했던 기분이 책에 많이 반영된 것 같다고 밝힌 그는 “중학생이 된 뒤 낯익은 친구는 별로 없고 새 친구도 사귀기 어려워 많이 외로웠다”며 “그때 경험과 생각, 그리고 나를 도와주던 한 친구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어봐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털어놨다. 물론 처음에는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어 다른 사람에게 보여준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힘은 살아가면서 반드시 필요하다”며 용기를 북돋워주던 아빠와 “이런 계기에 너의 생각(마음)을 드러낼 기회를 가져봐라”며 격려해준 엄마 덕분에 자신감이 생겼다.

시작은 힘들었지만 그림책 만드는 과정은 강양이 성격을 바꾸고 친구 관계를 풀어가는 데 결정적으로 도움이 됐다. 그는 “그림책을 만들면서 내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다른 친구들과 나눌 수 있게 됐다”며 “다른 친구들이 이해해주는 모습을 보여줘서 어느 순간 내 속 얘기를 후련하게 털어놓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수업 외 시간에도 친해질 기회는 많았다. 실제 수업 시간은 1회에 90분이지만 손이 느리거나 좀더 욕심을 내 잘 만들고 싶은 친구들은 늦게까지 남아서 작업을 하며 친목을 다졌다. 정유진(불곡중2)양은 “자발적으로 친구들과 9시까지 남아서 그림을 그리며 장난도 치며 친해졌다”고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올해 이 수업을 들은 ㄱ군은 반 친구들에게 항상 공격을 당하고 인정도 받지 못했다. 변명도 많이 하고 자기방어도 강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 당했던 학교폭력이 원인이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더 큰 상처는 그때 자신을 지켜주지 않았던 엄마의 태도였다. 또 그림책 수업을 들을 무렵까지도 필요 이상으로 혼내는 엄마의 모습에 강한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ㄱ군은 뜻밖에 매우 인자하고 관대한 엄마의 모습을 그림책에 담았다. 자신의 경험 대신 바람을 그린 것이다. ㄱ군에게 그림을 그린 과정을 듣던 도중 이런 사정을 알게 돼 ㄱ군과 ㄱ군의 부모는 함께 가족 상담을 받았다. 정오미 불곡중학교 미술교사는 “ㄱ군의 엄마는 아이의 아픔과 고민에 대해 알게 됐고 앞으로 (아들과 관계를 잘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정 교사는 “ㄱ군의 문제가 완전히 해소되진 않았으나 그림책을 만들면서 많이 완화된 모습을 보인다”며 미술교육의 심리치료효과를 확신했다.

특별한 상처나 경험이 없어도 그림책의 소재는 다양했다. 태권도의 품새를 펭귄을 통해 표현한 <펭귄태극1장>(김소현), 환경문제를 다룬 <바닷가의 하루>(강은영)를 비롯해 <김치가 될거야>(길인아), <그림자를 사랑한 쥐>(남수연) 등 제목만 봐도 흥미로운 책이 많았다. 특히 가족, 친지 이야기가 많았다. 추연서(불곡중1)양은 그림책 <엄마 사랑해요>에 초등학교 5학년 때 엄마가 필통을 손수 만들어 주신 이야기를 엄마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을 담아 그렸다. 추양은 필통을 들어 보이며 “이 필통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물건이라 소중하다”며 “엄마가 이 책을 보시면 많이 좋아하시고 뿌듯해할 거란 생각이 들어 소재로 선택했다”고 말했다. 정양도 오빠 이야기를 그림책에 담았는데, 성인이 돼서도 오빠와 잘 지내고 싶다는 바람을 자신을 ‘너구리’로, 오빠는 ‘아기’로 설정해 그림책 <내 친구>에 표현했다. 함서연(불곡중2)양은 사촌동생이 떡볶이를 먹고 매워하던 장면을 그림책 <다섯 가지 맛>에 재미있게 담았다. 사촌동생이 매운 떡볶이를 먹고 입에서 불을 뿜는 모습이 독특하게 표현돼 있었다. 함양은 “외동딸이라 사촌 동생한테 애틋함이 있다”며 “또 가까이 살아 관찰할 기회가 많기 때문에 소재로 선택했다”고 말했다.

중학교 시기는 진로 고민이 많을 때다. 이 수업을 듣고 학생들은 꿈을 찾거나 기존의 장래 희망에 미술을 연결하기도 했다. 강지현양은 친구 관계에서 겪었던 어려움과 치유 과정을 좀더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미술심리치료사의 꿈을 키우고 있었고, 함서연양은 “국어교사가 꿈인데 시화집을 만들어 대학 갈 때 포트폴리오에 포함시키면 좋을 거 같고, 나중에 교사가 돼서도 국어 수업에 미술을 접목하고 싶다”고 말해 대학입시까지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 미술과 전혀 연결되지 않을 것 같은 직업인 수의사를 꿈이라 밝힌 정유진양은 “자주 가던 동물병원 수의사가 유기견을 키우며 그림을 그려놨던 걸 봤다”며 “수의사가 돼서 손님들한테 동물 그림을 그려주면 좋을 거 같다”고 말했다.

이어 정양은 다른 학교에도 그림책을 만드는 수업이 개설돼서 많은 학생들이 혜택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다른 학교 다니는 친구에게 이 수업 과정을 들려줬더니 굉장히 부러워해요. 그 친구는 그림 실력도 뛰어나고, 꿈도 일러스트레이터예요. 그 친구가 우리 학교에 다녔으면 더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다른 학교에서도 이런 과정을 많이 개설하면 좋겠어요.” 글·사진 정종법 기자 mizzle@hanedu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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