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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달고 살던 장염·두통이 멎더라, 나이 마흔에 ‘굿바이 회사’

등록 2021-06-26 14:28수정 2021-06-26 20:21

[토요판] 마흔에 은퇴
⑥ 퇴사를 했다

은퇴 계획 뒤 5년 만에 목표 달성
불안증세 식은땀…숨쉬기도 어려워
은퇴 고민하다 6개월 휴직 권유받고
결국 퇴사하여 ‘무소속’ 신분으로
이제 더 이상 퇴근길 씁쓸한 기분으로 집을 향하지 않아도 된다.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이제 더 이상 퇴근길 씁쓸한 기분으로 집을 향하지 않아도 된다.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은퇴를 계획하고 5년째 되던 해, 우리는 은퇴 목표 자산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그때의 난 불안증세 때문에 힘들었다. 조금만 긴장해도 식은땀이 흘렀고, 숨을 쉬지 않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고민 끝에 회사에 퇴사를 하겠다고 말했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힘들다. 조금 이르지만 은퇴를 하려 한다.’ 상사는 나에게 우선 휴직을 권했다. 지금 많이 지쳐 있으니 좀 쉬면서 다시 생각해보라 했다. 쉬다 보면 내 불안증세도 좋아질 것이고, 다시 일하고 싶어질 거라 했다.

코로나 상황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다. 휴직이라는 얘기를 들으니 쉬면서 내가 은퇴에 적응할 수 있을지 지켜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고민 끝에 우선 휴직을 하기로 했다. 휴직을 하면 내가 회사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지만, 더 이상 일은 하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월급도 없다. 이제 모은 돈을 까먹으며 계획된 은퇴자의 삶을 살아나가야 한다.

마지막 근무일이 정해졌다. 돌아가면서 재택근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인사를 전할 기회가 없었다. 메일로나마 휴직 인사를 전했다. 그렇게 기다려왔던 순간이지만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마지막 인사를 하던 날 참아왔던 눈물이 쏟아졌다. 아쉬움, 고마움, 미안함의 눈물이었다. “꼭 돌아오세요”라는 인사를 뒤로하고 양손 가득 짐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고생했어. 이제 백수 부부네.”

등을 토닥이며 남편이 전한 한마디에 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16년의 직장생활을 마무리하며 지나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내 나이 마흔, 마침내 나는 회사에서 은퇴했다.

이제는 집밥을 먹는다. 한식은 남편이, 양식은 내가 담당이다. 사진 김다현 제공
이제는 집밥을 먹는다. 한식은 남편이, 양식은 내가 담당이다. 사진 김다현 제공

더 이상 직업이 없다는 것

내가 기억하는 한 난 항상 어떤 곳에 소속되어 있었다. 학생 때는 학교의 구성원이었고, 졸업 후에는 회사의 구성원이었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지나 대학 졸업 후 바로 회사에 들어갔으니, 32년 동안 나에게 소속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소속이 필요한 순간은 다양하다. 어떤 서비스의 회원가입을 할 때나 은행 계좌를 만들 때, 해외여행 시 출입국신고서를 작성할 때도 적어야 할 소속란이 있다. 난 그동안 소속란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라디오를 즐겨 듣는다. 라디오 진행자는 청취자와 전화 인터뷰를 할 때면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하면서 “실례지만 무슨 일을 하세요?”라고 물어본다. 생각해보면 살면서 “무슨 일을 하세요?”, “무슨 학교 다녀?”, “회사가 어디야?”라는 질문을 정말 자주 받아본다. ‘소속’이라는 것은 나에 대해 이래저래 설명하지 않아도 나를 대표하는 어떤 이미지와 같은 것이다. 고등학교는 내가 사는 동네를, 대학교는 나의 학업 수준을, 회사는 나의 소득 수준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나를 설명해줄 ‘소속’이 없다.

입출금 통장을 만들거나 대출을 받으려면 내 소속과 소득을 증명해야만 한다. 소속이 없어진다는 것은 더 이상 금융거래가 쉽지 않음을 의미한다. 은행은 내 소속과 소득에 따라 대출한도와 이율을 결정한다. 그래서 은퇴하기 전 금융거래가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마무리하는 것이 좋다. 집을 사고 대출을 빨리 갚으려 노력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른 은퇴를 하겠다 말씀드렸을 때, 양가 부모님의 걱정이 많았다. 부모님의 걱정도 더 이상 ‘소속’이 없음에 기반할 것이다. 그동안 자식들이 어떤 회사를 다니는지, 연봉은 얼마나 받는지를 주변에 자랑하셨을 거다. 그 자랑의 핵심은 ‘소속’에 있었고, 사람들은 알만한 회사에 다닐수록 더 부러움을 보였다. 좋은 회사는 부모님에게 드리는 혜택도 많았다. 자식들이 회사를 다니는 한 부모님은 병원비 걱정이 없었고, 건강검진도 좋은 곳에서 받을 수 있었다. 인센티브를 받았다는 핑계로 선물을 사드리고, 유명한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은퇴 후 부모님에게 선물을 사드리면 좋아하시기보다 걱정부터 하신다. 더 이상 금전적으로 효도할 수 없음은 아쉽다.

내가 아닌 회사의 이름값에 괜히 당당해지던 때도 있었을 텐데, 이제 “무슨 일 하세요?”라는 물음에, 웃으며 당당하게 “전 백수예요”라고 말하는 여유를 보여야 한다.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기에 당당하다. 나의 대답에 달라지는 상대의 표정을 관찰하는 것도 흥미롭다.

소속은 내 자유를 담보로 안정감을 제공했다. 우린 그 소속 안에서 금전적으로 많은 혜택을 누렸다. 소속이 없는 지금, 코로나로 인해 그 자유를 충분히 누리지는 못하고 있다. 32년 동안 써보지 못한 것이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도 헤맨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익숙해져도 아무 문제 없는 것. 이것 또한 자유가 주는 것이니 괜찮다.

6개월의 휴직기간이 끝났다. 일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난 노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건강도 좋아졌고, 긴 시간은 지루하지 않았다. 자유의 시간을 보낸 이후 은퇴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회사에 복귀하지 않겠다는 최종 의사를 전달했다. 회사의 퇴사처리가 진행되었다. 고용보험 자격 상실 문자와 국민연금 납부예외 처리 알림 문자를 받았다. 지역의료보험료 고지서도 나왔다. ‘자격상실’이라는 문자를 받았을 때 잠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더 이상 국가에 보탬이 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일까. 하지만 묘한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만큼 하면 됐다 싶었다.

이제 인생 2부의 시작이다.

처음으로 만들어 먹은 식빵. 이걸로 빵값을 아낄 수 있을까. 사진 김다현 제공
처음으로 만들어 먹은 식빵. 이걸로 빵값을 아낄 수 있을까. 사진 김다현 제공

부모님께 금전으로 효도할 수 없고
금융거래의 어려움은 아쉬움 있어
각종 질병 벗어나 건강과 행복 찾아
엄마도 “지금의 네가 더 좋아 보여”

우리는 계획대로 살고 있을까

매달 1일이 되면 저축 계좌에서 생활비 계좌로 250만원을 보낸다. 그 돈으로 우리는 한달을 지내고 있다. 25일이 되면 남편과 나의 개인 계좌로 용돈이 입금된다. 은퇴 전 우리의 월급날이 25일이었다. 난 은퇴 후에도 매달 같은 날 월급을 받도록 했다. 받는 통장 이름도 ‘월급여’로 해서 자동이체를 등록했다.

“남편, 오늘 월급날이야.”

“쳇, 10만원밖에 안 되는 거.”

남편은 여전히 용돈에 불만이 많다.

은퇴 후 우리는 계획대로 살고 있을까. 세부적인 비용은 예상과 다르지만 생활비에 어긋남은 없다. 마트에서 장을 보는 데 쓰는 비용은 은퇴 전과 비슷하다. 다만 이전에는 맥주와 안주를 사는 데 쓰는 비용이 대부분이었다면, 요즘에는 돼지고기와 파, 간장과 들기름 같은 음식 재료를 사는 데 쓴다. 먹는 건 잘 먹어야 한다며, 질 좋은 재료를 사다 보니 생각보다 많은 돈이 들었다. 밥을 만들어 먹으면 외식하는 것보다는 돈을 아낄 줄 알았는데 비슷했다. 비싼 재료로 만든 음식은 두 끼면 끝났다. 그래도 국내산 돼지고기로 만든 제육볶음이나 향이 좋은 들기름으로 만들어 먹는 막국수를 식당에서 사 먹는다고 생각하면 이보다 훨씬 비싼 돈을 내야 할 것이다. 아무튼 정해둔 생활비를 넘기지 않으니 만족스럽다. 그리고 남편의 요리 실력도 점점 늘고 있었다.

“남편, 이 정도면 식당 해도 되겠어.”

“손님이 기다리다 나갈걸.”

남편의 음식은 맛있기는 하지만, 손이 느려서 완성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앞으로도 식당을 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렇게 집밥을 먹다가 가끔 집에서 만들어 먹기 어려운 음식이 먹고 싶어질 때만 외식을 한다. 그럴 때는 서로에게 신호를 보낸다.

“오늘은 감자탕에 소주나 한잔 할까?”

“11월11일이니까 양꼬치 먹으러 가자. 양꼬치 데이!”

주로 고기를 구워 먹고 싶거나, 밖에서 술 한잔이 하고 싶을 때면 외식을 한다. 이렇게 사 먹는 돈은 한달에 20만원 정도면 충분했다.

회사에 다닐 때 내가 경기도에서 서울로 출퇴근을 하던 엠(M)버스는 왕복 5000원을 넘었고, 집 앞을 지나는 지하철 노선도 편도 2500원이 들었다. 그렇게 사용한 남편과 나의 교통비는 한달에 30만원을 넘었다. 요즘은 주유비 5만원이면 충분해서 교통비를 많이 아끼고 있다.

나를 꾸미는 데 필요한 물건을 사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필요한 옷과 신발은 이미 다 가지고 있었다. 회사에 다닐 때는 갖고 싶다는 생각 하나만으로도 불필요한 지출을 했는데, 지금은 그런 생각에서 벗어났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입에 달고 사는 ‘스트레스’라는 것, 내 몸의 일부처럼 붙어 있던 그것이 주는 영향은 컸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니 물욕이 줄어든 것 같다.

이렇게 소비가 줄었는데도 특별히 아끼고 산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우리는 은퇴 후에도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사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을 고민하지 않는다. 필요하면 사고, 먹고 싶은 걸 먹으며 살아도 월 250만원이면 충분했다.

코로나 시대에 살고 있어, 여가와 여행에 드는 비용을 아끼고 있다. 대신 집에서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이것저것 배워보고 있는 중이다. 얼마 전부터 남편과 같이 펜 드로잉 수업을 시작했다. 남편은 무엇을 배우든지 평균 이상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 배우며 깨달았다. 그가 평균 이상을 하는 것은, 무엇을 하든지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하고 싶은 것에 늘 진심이었다. 난 조금 하다가 귀찮아서 대충 선을 쓱쓱 긋는데, 남편은 고개 숙여 집중한다. 같이 시작했지만, 지금 그와 나의 그림은 많이 다르다. 그림도 은퇴 후 잘하고 싶은 것 중 하나였는데, 내 그림 실력은 영 늘지를 않는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을 거다. 세밀한 부분에서는 남편보다 못하지만 내 그림에 감성은 더 있는 것 같다.

은퇴 후 가장 긍정적인 변화는 건강을 찾은 것이다. 더 이상 정기적으로 찾아오던 장염에 걸리지 않는다. 매일 달고 살던 두통에서도 해방되었다. 아직 긴장하면 숨을 참는 버릇은 남아 있지만 이제 긴장할 일이 많지 않으니 그리 힘들지는 않다. 여유로운 시간 속에서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살고 있으니 표정도 밝아졌나 보다.

얼마 전 엄마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네가 큰 걸 버린 거라 생각했지만, 더 큰 행복과 건강을 얻었구나. 지금의 네가 더 좋아 보인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셨지만, 엄마는 나의 은퇴를 늘 아쉬워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경제적 여유를 포기한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의 밝아진 표정을 보며, 이제야 더 행복해지기 위해 한다던 나의 은퇴를 인정하신 것 같다. 부작용은 나를 지켜보던 언니마저도 은퇴를 꿈꾸기 시작했다는 거다. 엄마의 걱정이 새로 시작될 듯싶다.

김다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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