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이 1일 오전 서울 성북구 석관동 총장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그 사람을 만나기 전 사람들은 그를 ‘젠틀한, 단정한 외골수’라는 말로 묘사했다. 가장 많은 수식은 ‘엄격하다’는 형용사였다. 인터뷰 내내 그가 엄격하다는 세간의 말은 앞뒤가 같고, 꾸준하며, 정직하다는 말을 오해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양보하지 않는’이라는 의미로 보인 막간이 있었다. 작곡가의 ‘지시’와 연주자의 ‘해석’을 이야기하던 도중, 베토벤이 악보의 어느 부분에 크레셴도라는 기호를 주었는데, 연주자가 자기 기분 따라 데크레셴도로 바꿔도 될까, 하고 물었는데 그의 얼굴이 학생들을 얼어붙게 만들던 얼굴로 쓱 바뀌었다.
“그건 위험한 생각인데요. 베토벤만큼 기호가 많고 자세한 사람도 없어요. 그런 얘기가 있죠. 베토벤의 기호는 무조건 따라야 한다. 우리한테는 주어진 자유가 있고 주어지지 않은 자유가 있어요. 여기서 커지라고 하는데 난 작아지고 싶어, 이건 절대로 안 돼요.”
피아니스트가 작곡가의 메신저가 되는 건 악보에 적힌 지시어를 통해서만 가능할까? 작곡가의 공식 규칙을 철저히 따르는 건 악기 소리를 흉내 낸다는 얘기 아닐까? 그 직전, 그는 어떤 자유를 이야기했다.
“연주자한테 이 곡은 이런 감정이니까 이렇게만 연주해야 돼,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여기서 포르테, 크게 해라? 근데 얼마나 크게? 조금? 많이? 극도로? 아니면 살며시? 그거야말로 연주자의 자유죠. 그 시대의 전체적인 흐름과 작곡 스타일을 이해해야 하겠지만, 실질적으로는 연주자한테 주어진 자유가 엄청 많아요.”
악보 빈 공간 같은 여백의 시간
그 두 단락이 이율배반으로 들리진 않았다. 그를 만난다는 것은 이분법의 즐거운 이중창이었으니까. 분석할 자유와 절대적 철칙, 공적인 책무와 사적인 수줍음, 외향성과 배타성, 그리고 그 사이사이 손가락의 안무.
얼마 전 그가 9대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총장으로 취임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뭔가 약간 염려가 되었다. 예술가는 좌뇌 우뇌가 어긋나 있을 텐데, 그러니까 셈이 빠른 소프라노란 도무지 억지 같은데, 당대의 음악 교수가 행정가 역할을 잘해낼 수 있을까? 요구가 다른 직책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찾을까?
그는 음악적으로 넥타이를 매만졌다.
“사람이 채워나갈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겠죠. 이 일에는 소위 말하는 행정력이 있겠지만, 경험을 통해 일정 부분 채워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학교에서 느꼈던 27년 세월은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거잖아요.”
축하객 없는 온라인 취임식에서 그는 바흐의 ‘예수, 인류 소망의 기쁨’을 연주했다. 그때 오므린 손에 쥔 트럼펫이 입가에서 진동하듯 무엇인가 몸속에서 공명했다.
“그 곡을 치면 꼭 나의 내면을 살피는 느낌이 들어요. 종교의식을 행하거나 자신을 성찰하는 느낌. 개교한 지 29년, 앞만 보고 달려왔으니까 자신도 한번 살피고 겸손한 마음으로 30주년을 준비하자, 그런 메시지를 전해주고 싶었어요.”
한예종은 우리나라 예술의 근원이자 총칭. 예술학교 중의 예술학교. 누구는 제 자녀가 한예종 영상원에 입학했다는 걸 가문 최고의 기쁨이라고 여기는 학교. 그는 한예종의 경쟁자ㄹㅇ는 미국 줄리아드도 영국 왕립음악학교도 이탈리아 파도바도 아닌 한예종이라고 못박았다.
배색이 까다로운 중간톤 슈트에 블루 스트라이프 셔츠와 남색 넥타이의 삼위일체, 명도와 채도의 그윽함은 총장의 것일까, 그의 말대로 센스 없는 이의 것일까?
“저는 이제 더 이상 예술인이 아니고 흔히 말하는 고위 행정직이잖아요. 그런데 아이덴티티가 자꾸 예술인을 고집하면 그 습성이 모든 일에 배어나지 않을까, 머릿속의 모드를 바꾸려다 보니 이렇게 입은 걸까요?”
그는 웃었다. 상냥하지만 유머가 덜한 목소리로.
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이 1일 오전 서울 성북구 석관동 총장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마흔 넘어서 하얘지기 시작했다던 은발이 룩의 방점을 찍었다. 총장실은 검박하기 짝이 없었다. 나무색 벽과 회색 러그, 순박한 직물 소파, 그리고 까만 광택이 나는 피아노. 오직 창턱에 놓인 난 화분 몇개만이 세속적으론 문화부 장관에 맞먹는다는 한예종 총장의 영광을 보태고 있었다. 역시 그는 웃었다. “제가 그런 것을 느낀다 해도 거부하지 않을까요?”
그의 목소리가 문득 움츠리듯 낮아졌다.
“저, 워낙에 되게 소심한 사람이었어요.”
이·었·다고? 과거에?
“기본적으로 사람들 만나서 어울리는 거 그렇게 즐기지 않는데 이제 사람들 많이 만나서 얘기하고 설득하는 게, 속으론 굉장히 힘들더라고요. 그렇다 보니 너무 혼자 산다, 별나라 사람이다, 그런 소리가 나오죠. 그래도 조금 외향적으로 바뀐 건 오케스트라 지휘를 맡으면서 후천적 노력이 있었어요. (그는 수원 시향과 창원 시향의 상임 지휘자였다.) 요즘 만나는 분들은 제가 소심하다 그러면 안 믿을 것도 같은데, 워낙 피아노 치는 사람들의 특징이기도 해요. 지금도 혼자 있는 걸 되게 즐기는 편이에요. 악보를 보면 위아래, 옆에 여백이 있잖아요. 전 그런 여백이 항상 필요해요.”
예측치 넘던 음악적 선동들
훌륭한 음악은 체계를 갖추고 있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그는 다만 자기만의 우주로 가득할 뿐.
한국의 모든 클래식은 그에게로 통한다던 사람, 늘 최전선에 섰는데도 막후에 있는 듯한 뉘앙스, 예술에 대한 헌신이 타인에게 영향을 미칠 거라고 믿는 음악 스승, 그리고 소중한 지휘자이자 중요한 연주자.
모든 음악 주변에는 하나의 문화가 있고, 그 문화를 이해하는 방식은 음악을 대하는 태도에 귀띔할 것이다. 그는 번번이 예측치를 넘는 음악적 선동을 벌였다. 하루에 베토벤 협주곡이며 모차르트 전곡 연주, 전국 투어 리사이틀, 해설이 있는 음악회, 장애인 음악 교육, 한예종 음악원 25주년 무대를 위한 25대의 피아노.
“우리는 여러 방법으로 식사를 하죠. 컵라면 끓여 종이에 받쳐 먹기도 하고, 잘 차려입고 정찬을 하기도 하고. 고전 예술은 정찬에서 시작해요. 그렇죠? 왜 굳이 턱시도 복장으로 연주하겠어요? 그렇죠? 경계할 것은 짜장면 먹으러 가면서 양복 입고 가는 거. 정찬이 있는 자리에 가면서 반바지 입고 가는 거. ‘클래식의 대중화’라는 말은 어폐가 있어요. 잘못 이해하면 클래식이 대중음악이 되는 거야? 저는 대중이 클래식 음악의 속성과 매너를 이해하면 다가가기 쉬울 거라고 생각했어요. 피아노 25대는 단순히 25라는 숫자로 뭘 할 수 있을까, 음악원에 피아노 전공 쪽 활약이 많아서 생각한 거죠.”
“그럼 50주년 때는 뭘 할 건데요?” 은발의 소년이 다시 웃었다. 하나의 형용모순처럼.
“그때까지는 일단 살아 있는 게 목표죠.”
콩쿠르는 그에게 친척과 같다. 그 자신, 클리블랜드 국제 콩쿠르를 포함해 다수의 콩쿠르를 석권했으니. 김선욱, 손열음처럼 예외적인 재능을 가진 피아니스트 제자들을 거쳐 9월3일, 박재홍은 63회 부소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1위를 했다. 6년 전엔 문지영이 같은 대회에서 우승했고. 절대 스승으로서 면모가 연이어 객관적 인정을 얻는 순간이었다.
“공연 예술은 스포츠랑 굉장히 비슷해요. 정해진 날, 정해진 순간에 준비한 것을 최대치 기량으로 발휘하는 것. 저도 국제 콩쿠르 심사를 많이 해봐서 아는데 어떤 심사위원들이 왔냐, 내 앞 순서에 누가 치냐, 그런 건 사람 힘으로 할 수 없단 말이죠. 할 수 있는 건 계획한 대로 연주를 잘하는 거죠. 그 학생은 1차, 2차, 쭉 하면서 우리 표현대로 ‘그분이 온 날’인가, 할 정도로 자기 기량을 120퍼센트 나타냈어요. 본인도 그렇게 연주를 잘할 수 있을지, 몰랐겠다, 싶을 정도로.”
그렇지만 콩쿠르가 연주자의 기준이 되었다면 너무 쓸쓸할 것 같다.
“중요한 게 아닌데 중요한 게 돼버렸어요. 그렇죠?”
그럼 콩쿠르에서 입상한 적도 없고 재능도 부족한 연주자는 어떻게 하나.
“베토벤 시대에 훌륭한 작곡가가 베토벤밖에 없었을까요? 스포츠는 금메달 따면 목표를 이루지만 콩쿠르는 아니잖아요. 내 상품이 인정받았구나라는 확인 정도? 그런데 백화점에 내 상품이 들어가는 과정은 예술적인 면하고는 상관이 없어요. 방탄소년단(BTS), 제가 봐도 특별해요. 그렇지만 그걸 엮어주는 과정이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클래식엔 매니저 역할이 아주 빈약해요. 학생들이 항상 게릴라전을 하는 건 직접 매니지먼트사를 두드릴 수밖에 없어서인데, 근데 안 되죠. 그러니까 예술 쪽에 국가 경쟁력을 키워서 해외 굴지 매니지먼트사와 협업할 정도가 돼야죠. 그래도 예술적 존재감을 나타낼 수 있는 매체는 옛날보다 훨씬 많아졌어요.”
2018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개원 25주년 기념 피아노 오케스트라 콘서트 당시 피아니스트 김대진 등 연주가 50여명이 피아노 25대를 활용해 화려한 연주를 선보였다. 한국종합예술학교 제공
가르친다는 영광, 엄격함의 이유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은 연주하고, 연주할 수 없는 사람은 가르친다’는 서양 속담은 김대진 앞에서만은 예외인데, 그는 완전히 가르친다는 영광에 사로잡혀 있었다.
“영재의 가능성을 찾을 순 있지만 영재를 만들 순 없어요. 베토벤의 마지막 소나타는 모든 걸 초월해서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곡인데 초등학생이 인생을 다 겪은 사람처럼 친단 말이에요. 어떻게 이런 느낌을 냈어? 돌아오는 답은 “저 그냥 쳤는데요”. 그게 영재예요. 곡의 의미를 들을 필요도 없이 곡을 연마하는 과정에서 이미 느끼는 것. 문지영 같은 경우는 실질적으로 피아노를 찾는 과정까지가 되게 힘들었단 말이에요. 드디어 피아노를 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피아노 앞에 앉으면 자기 음악에 이미 다 배어 있어요. 그렇지 않은 경우는, 어떡해요? 경험을 통해 얻을 수밖에 없죠. 제일 좋은 경험은 사실 콩쿠르 나가서 떨어지는 거예요.”
음악의 리듬이 시간의 리듬과 화음을 이루더니 위트가 부족해 보였던 사람의 이야기가 점입가경이 되었다.
“한 남학생이 같은 콩쿠르에 세번 떨어졌어요. 한달만 시간을 달라 그러더니 그 뒤로 하는 연주가 걔 소리가 아닌 거예요. 깜짝 놀랐어요. 그건 실패를 통해 얻어진 거잖아요.”
자꾸만 ‘건반 위의 진화론자’라거나 ‘악마쌤’이라는 그의 별칭이 생각났다.
“제가 1982년에 줄리아드 유학 갔다가 1994년, 이 학교 왔을 때 국내 연주자들 인지도는 되게 얕았어요. 저는 국내 연주자의 연주도 표 사서 볼만하다는 얘기를 듣고 싶었어요. 그래서 프로젝트를 많이 하다 보니까 뭔가 개척하는 사람 같았겠죠. 제가 신경 쓰는 것 중 첫번째는 자기 절제, 자기 훈련이에요. 테크닉은 딱 두가지예요. 연습해서 되는 사람, 안 되는 사람. 무조건 연습한다고 얻지 못해요. 팔목을 높게 들까, 팔을 붙여볼까…. 자기한테 맞는 방법을 찾는 건 자기잖아요. 재주 있는 학생들의 공통점이 좀 게을러요. 빨리 습득하기 때문에 당연히 연습량은 부족해요. 그럼 어떻게 해요? 무섭게 할 수밖에 없죠.”
그 엄격함은 자기에게도 통용될까? 그는 덮어쓰듯 당장 말했다.
“그럼요! 그렇게 자신 있게 얘기했던 것은 내가 그랬기 때문에!”
그러나 듣는 사람은 두가지 중 하나를 택할 것이다. 감탄 혹은 감동.
“열변을 토한다든지 사랑 고백을 한다든지 하는 순간은 의식의 세계에 속한 감정이지만 그것이 발현될 때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나와요. 속일 수 없어요. 그 소리는 나만의 감정이거든요. 소리가 다가오느냐 아니냐는 진심이 담겨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인 거죠.”
연습실에서 살았던 외톨이 시절
사람들은 생긴 대로 피아노를 친다던 말은 그래서 한 걸까.
“학생들의 무의식의 세계를 수정하기 위해 한 말이에요. 피아노 치다가 빨라지는 아이들은 밥 먹는 것도 걷는 것도 말하는 것도 다 빨라요. 다 연결돼 있어서 같이 고치지 않는 이상 무대라는 무의식의 세계로 가면 못 고쳐요. 악보에 온갖 색깔 동그라미 쳐서 고쳐도 다음주에 또 빨라져요. 그럴 땐 주입식 교육만큼 확실한 게 없어요.”
꼭 학생과 스승이 서로 체스를 두는 것 같다. 그는 어떻게 그렇게 제자의 육신과 마음, 보이지 않는 단면 깊숙이 파고들 수 있을까.
“제 접근 방법이 맞다고는 절대 생각 안 해요. 그 방법 때문에 나를 힘들어했던 학생도 많으니까. 그 길은 자기가 찾는 거예요. 1800년대 후반, 19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연주자들의 특징은 정말 개성이 강해요. 현실적인 요인도 있었겠죠. 다른 사람이 어떻게 치는지 서로 몰라요. 그렇죠? 연주회장에 가지 않는 이상 음반이 있었겠어요, 뭐가 있었겠어요? 요즘 유튜브에서 곡을 한번 찍으면 클립이 셀 수 없이 나와요. 정보를 선택한다? 이건 혁명에 가까운 변화지만, 예술적 개성을 좀먹을 수 있어요. 지금 전세계적으로 학생 연주자들이 다 비슷한 스타일로 쳐요. 그러나 내가 내는 소리는 나밖에 못 내죠. 개성은 소리에 있기 때문에.”
줄리아드 음대 시절을 이야기할 때 그는 조금 포즈를 두었다. 클래식이 마음에 공간을 많이 남긴 것처럼.
“그때 저는 연습만 하는 외톨이…. 아예 연습실에서 살았어요. 졸업하고 우연히 잘 기억도 안 나는 외국 친구하고 얘기하는데, 연습실에서 연습만 하던 삐쩍 마른 동양 아이, 그게 나였어요.”
작곡가의 메시지를 엿듣는 일에는 대부분 이름이 없다. 표현할 단어가 적기 때문에. 그러나 무엇일까? 다른 시대를 산 슈베르트가 어째서 시간을 건너 우리 마음을 밀어붙이는 걸까? 우리는 어떤 필터를 통해 들어야 할까? 음악의 입자도 질량을 가질까?
“소리를 느끼니까, 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듣는다는 말은, 진짜 ‘귀 기울여 듣는다’는 거예요. 백화점에서 안내 방송이 내 이름 부를 때 주변이 시끄러워도 굉장히 자세히 듣지 않겠어요?”
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이 1일 오전 서울 성북구 석관동 총장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음악보다 더 깊이 전달된 감정
정거장에서 환승을 하듯 그를 촬영하는 동안, 총장실 밖을 내다보았다. 격자형 창문이 달린 건물이 세 방위를 에워싼 풍경 어디서도 학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침묵과 오랜 기다림과 더 긴 불협화음이라는 폐쇄적 시스템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게 될까.
“학생들이 그리워요. 학생이 많으면 창 너머로 보겠는데 학생들이 연주하는 일도 없이 이렇게 지내는 게 굉장히 공허해요.”
음악은 형태를 바꿀 수 있고, 악기에 새로운 의미를 주기도 하지만, 그는 학생 없이는 어떤 퍼즐도 맞추지 않을 사람. 마지막으로 물었다. 어떤 사람은 음악을 위해서라면 전쟁터에도 나갈 수 있다고 합니다. 당신은 어디까지 할 수 있나요? 그는 다시 공적 인물로 돌아갔다.
“나는 학교를 위해서라면 전쟁터에 남을 수 있어요. 그게 꼭 예술이라고 말할 필요 없이, 그러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다고.”
봉쇄된 교정에 봄의 교향악은 아직 울려 퍼지지 않았다. 그러나 귓속을 채우는 건 학생이 그립다고 섭섭해하던 목소리, 이야기의 끄트머리마다 “그렇죠?” 하고 되묻던 선생님의 그 목소리. 어떤 사람은 그를 두고 바렌보임이며 아시케나지가 떠오른다지만, 그는 호로비츠에 훨씬 가까웠다. 그가 전해주는 건 음악보다 깊은 감정이기 때문에.
__________이충걸 작가 _ 전 <지큐 코리아> 편집장. 소설집 <완전히 불완전한>, 인터뷰집 <해를 등지고 놀다>와 18년 동안 써온 ‘에디터스 레터’를 모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우리의 특별함>, 엄마의 이야기를 다룬 에세이 <엄마는 어쩌면 그렇게>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