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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이름 안바꿔요, 시스템을 고쳐야죠”…‘설믜’씨들의 10년 기록 [뉴스AS]

등록 2022-10-23 14:26수정 2022-10-23 15:06

한글 입력 문제로 고충 겪는 ‘설믜’씨들
신한은행 모바일 앱에선 ‘믜’를 적으면 입력이 불가한 한글이라는 메시지가 뜬다(왼쪽). 박설믜씨와 서설믜씨가 기자의 신한은행 계좌로 금액을 이체했을 때 모습(오른쪽).
신한은행 모바일 앱에선 ‘믜’를 적으면 입력이 불가한 한글이라는 메시지가 뜬다(왼쪽). 박설믜씨와 서설믜씨가 기자의 신한은행 계좌로 금액을 이체했을 때 모습(오른쪽).

‘서설□’

지난 16일 디자이너 서설믜(39)씨는 “이름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거예요”라며 자신의 기업은행 계좌에서 기자의 신한은행 계좌로 100원을 보냈다. 서씨 이름 끝 글자에 사각형 특수문자가 떴다. 이름 표기가 달라 서씨는 “환불받을 때도 애를 먹었다”고 했다.

박설믜(32)씨도 같은 계좌로 10원을 보냈다. 농협은행은 ‘믜’가 입력 가능한 몇 안 되는 은행 중 하나다. 정작 수신 계좌에선 ‘박설’로 나온다. 매번 현금을 송금할 때마다 서씨는 ‘서설□’가, 박씨는 ‘박설’이 본인이라는 점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한겨레>가 지난 9일 한글날 배우 김설믜(현재 김설미로 개명)씨의 사연을 보도한 이후, 김씨처럼 금융 및 본인인증 업무 등 생활에서 비슷한 고충을 겪은 서씨와 박씨는 그들의 이름 세 번째 글자가 특수문자나 공백이 아니라 정확하게 ‘믜’가 새겨질 때까지 “이름을 바꾸지 않겠다”며 각자의 사연을 보내왔다.

서씨는 2012년부터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름 때문에 겪은 사연을 기록해왔다. “민원24에서 전입 신고 신청했는데, 불광동 동사무소에서 이름 때문에 안 된다고 했다.(2012년 9월13일)” “이름 때문에 병원 가기가 싫다. 병원 시스템에 ‘서설’로만 올라가 있어서 담당 간호사한테 몇 번이나 사연을 설명하느라 진이 빠진다.(2013년 2월12일)”

순우리말 ‘눈썰미’의 뜻이 담긴 서씨 이름 ‘설믜’에서 ‘믜’는 1986년부터 사용하던 완성형(EUC-KR) 한글 입력 시스템에서 입력되지 않는다. 행정안전부가 2010년 입력 방식을 유니코드(UTF-8)로 바꾸면서 정부 기관은 대부분 문제를 해소했지만, 서씨의 삶은 10년 전과 비교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특히 본인인증과 금융거래에 필수적인 이동통신사와 은행의 문턱을 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계좌이체를 할 때 은행 창구에서 직접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서 직불카드를 넣어 송금하고 있다. 비대면·디지털 전환은 그에게 아직 먼 이야기다.

통장에서 ‘믜’가 표기 안 되는 문제는 금융결제원이 전문 시스템에서 완성형 입력 방식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이란 금융결제원이 은행 사이에서 주고받는 일종의 메시지다. 한 은행에서 다른 은행으로 송금할 때 두 은행 사이에 금융결제원의 전문이 중간다리 역할을 한다. 이름이 전문을 거치는 과정에서 글자 오류가 발생한다. 개별 은행이 ‘믜’를 쓸 수 있어도 금융결제원의 전문이 바뀌지 않으면 이 문제는 지속될 수밖에 없다.

이들은 금융결제원이 제공하는 금융인증서와 공동인증서(옛 공인인증서)도 쓸 수 없다. 인증서 역시 전문 기반으로 설계됐기 때문이다. 이런 탓에 서씨는 금융결제원이 아닌 다른 기관에서 2020년 유료로 발급하는 범용 공동인증서를 어렵게 구해 사용해왔다. 하지만 보이스피싱 우려로 최근에는 은행의 실명인증이 까다로워지면서, 범용인증서도 사용할 수 없게 됐다고 했다. 현재 차세대 금융인증서 시스템을 개발 중이라는 금융결제원은 2023~2024년께 시스템 개발이 완료될 것으로 보고 있다. 금융결제원 관계자는 “(믜 입력을) 해결할 방법은 안타깝게도 현재는 없다”고 말했다.

박씨는 백신 접종을 입증할 때 쓰는 앱 ‘쿠브’(COOV)도 쓰지 못한다고 전했다. 쿠브는 이통사나 금융인증서를 통해 본인인증을 한다. 질병관리청에서 발급받은 백신 접종 서류에는 ‘박설믜’지만, 이통사 이름은 ‘박설미’라 인증에 오류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박씨는 완성형 입력 방식을 쓰는 엘지유플러스(LGU+) 고객이다. 박씨는 “해외 출국할 때 백신접종을 인증해야 하는 경우가 있을 때 불이익을 받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엘지유플러스는 내년 상반기 해당 시스템을 고칠 예정이다.

이통사에서 ‘설믜’로 가입할 수 있어도 문제된 경우도 있었다. 서씨는 유니코드를 지원하는 케이티(KT)에 본명대로 가입했지만, 정작 통신사 앱에서는 이름이 제대로 표기되지 않았다. 같은 회사더라도 채널별로 입력 시스템을 제각각 쓰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정부 시스템도 아직 완전하진 않다. 서씨는 임대차 계약을 마치고 전산에 이름이 등록되지 않아 전입 신고와 확정 일자를 받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주민센터와 달리 등기소는 여전히 완성형 입력 방식을 고수하면서다.

설믜씨들은 평생에 걸쳐 ‘이름 투쟁’ 중이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기관에서 “그게 큰 문제인가요?”라고 묻거나, “일부 때문에 시스템을 수정하는 비용이 더 들지 않나요”라고 반응했다. 이들은 “개명하는 게 좋지 않나요”라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들었다고 했다. 서씨는 이름을 바꾸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처음에는 고집 때문에 이름을 바꾸지 않았는데 지금은 좀 달라요. 한글은 무한한 확장성을 지닌 언어라 하잖아요. 제 이름이 우리 사회 시스템에 고스란히 존재해야 그걸 입증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곽진산 기자 kj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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