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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새날의 제일 귀한 뜻을 가장 먼저 담아 말하면

등록 2023-02-25 14:13수정 2023-02-25 15:08

[한겨레S] 양다솔의 저도 말해도 될까요
하루의 첫마디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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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오늘 했던 유일한 말이 “아니요”였다. 누군가 ‘영수증 드릴까요?’ 하고 묻기에 “아니요”라고 답한 것이다. 식재료로 가득한 장바구니를 들고나오며 기분이 조금 찜찜해지는 것을 느꼈다. 온종일 딱 한번 입을 열었는데 그게 “아니요”라니. 오늘 내 몸의 소리통을 울린 유일한 것이 하필이면 부정적인 소리라니. 마치 ‘아니요’가 내 몸을 떠나지 않고 구석구석 회오리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혼자 살게 되고부터 말하는 일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혼자 일하는 프리랜서가 되고부터는 더 심해졌다. 며칠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거나 아예 집 밖을 나서지 않는 날도 많았다. 생각해보니 어제도 하루 종일 딱 한마디만 했다. “5천원 자동이요.” 복권의 낙첨을 확인했을 때 자신도 눈치챌 수 없을 만큼 작은 소리로 “아” 하고 신음했을 뿐이다. 주변은 곧 다시 고요해졌다.

묵언 뒤 “지심귀명례”

하루의 첫마디를 그릇에 담듯이 하던 시절이 있다. 행자로 살던 시절이다. 행자들은 가장 어두울 때 눈을 뜬다. 해와 새와 동물들도 아직 잠든 새벽 네시다. 기상 목탁에 맞춰 재바르게 잠자리를 정리하고 법복을 갖춰 입고 향하는 곳은 부처님이 모셔진 대웅전이다. 그리고 온몸을 바닥에 납작 엎드린다. 몸이 할 수 있는 가장 낮은 자세를 취한다. 손바닥을 곧게 펴서 모으고 정성스럽게 위로 올린다. 그리고 입을 뗀다.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

온몸이 지잉 징 울린다. 여러 목소리가 모여 대웅전이 울린다. 세상이 깨어나기 전에, 세상의 만물을 섬기는 마음을 올리는 예불의 시간이다. 새벽 예불을 마치고 나면 약속처럼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부처님과 선지식에게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한다는, 이 말을 하루의 첫마디로 삼는 것이 행자의 법이었다. 그 전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묵언의 시간이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말이란 뱉어지고 휘발되는 것이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면 그만이었다. 내가 오늘 처음으로 했던 말 따위를 누가 기억하며, 그게 다른 말이 되었든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할까 싶었다. 그때 스님이 말씀하셨다. 말은 마음을 담는 그릇이며, 가장 중요한 뜻을 가장 먼저 담는 것이라고. 그때 말에도 처음과 끝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루가 작은 인생이라면 그것에도 처음과 끝이 있는 것이었다. 매일 새벽 예불을 올리기 전까지 묵언하는 시간을 좋아하게 되었다. 귀한 것을 담은 그릇처럼 걸음마저 조심조심 걸었다.

그렇게 만물을 지극히 섬기는 말로 매일을 열었다. 누군가는 고등학교에 다닐 시기 내내 산속 깊은 절에서 보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을 그토록 선명하게 확인했던 나날이 없다. 매일 새로운 해가 떠올랐고, 같은 말로 하루를 시작했다. 새하얗게 덮인 눈밭에 첫발을 디디는 마음으로 그 말을 발음했다.

무의미한 말, 무의미한 날

그곳을 벗어나 대학교에 입학하고 직장에 취업했다. 하루의 첫마디가 정해져 있지 않은 세상으로 왔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제대로 목격하는 일은 1년에 한두번 정도였다. 어제 뭘 했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여느 때처럼 회사에 출근했고 상사는 말했다. “다솔씨, 이번 보고서 언제까지지?” 나는 말했다. “어제까지요.” 그렇게 하루가 시작되었다.

매일의 첫마디는 조용히 흩어졌다. 어떤 날은 “2주 뒤까지 완성하겠습니다”였고, 대부분은 “알겠습니다”였으며 “죄송합니다”이거나 “오늘 점심 뭐 먹을까요?”였다. 어느새 나의 매일은 별로 함께 있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의 의미 없는 대화들로 시작되고 있었다. 아무도 그걸 기억하지 않았고, 누구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단지 그것만으로 내가 불행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흩어져버린 첫마디 앞에서 자꾸 멈춰 섰다. 가장 중요한 뜻을 담기 위해 말을 아끼기도 했던 시절이 있었음을 떠올렸다. 말은 보이지 않는 것이고, 더는 중요하지 않다고 애써 되뇌었다.

마트나 편의점에서 생각 없이 했던 말이 며칠 동안 했던 유일한 대화였다는 걸 깨닫곤 했다. 카톡으로는 수십마디가 오갔지만 정작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며칠이 지나기도 했다. 하루가 시작되고 끝난다는 사실도 희미해졌다. 어떤 소리라도 내야 할 것 같아 절박한 심정으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어떤 말도 담을 일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적막한 일인가 생각했다.

먼 곳으로 떠나가는 친구가 나에게 책을 건넸다. 홍자성이 짓고 박영률이 옮긴 <채근담 하룻말>이었다. 채근담은 나물의 뿌리라는 뜻이 담긴 홍자성의 고전 어록이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묵직한 선물을 받아 들고 되는대로 펼쳐 읽다가 마구 웃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귀한 인격을 얻으려면 불꽃으로 단련하고, 세상을 뒤집으려면 살얼음 위를 걸어야 한다.

나는 말했다. 그러니까 불꽃으로 단련하지 않고서야 귀한 인격을 얻을 수 없고, 살얼음 위를 걷지 않고서야 세상을 뒤집을 수 없다는 거잖아. 엄두도 못 내겠다. 무섭다, 무서워. 우리는 한바탕 채근담을 거꾸로 읽으며 세상살이가 얼마나 쉽지 않은지 웃어버린다. 친구는 막막하고 아득할 때마다 이 책을 펼쳐 들었다고 했다. 별다른 위로나 사탕발림도 없이, 그저 크고 어렵고 원대한 뜻을 담은 이 책을. 먼 곳에 가서도 매일 이 글귀를 함께 읽는다고 생각하면 우리가 연결되어 있음을 잊지 않을 거라고 했다. 친구를 떠나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책을 펼쳤다. 책의 첫 장에는 쓰여 있었다.

마음 바탕이 밝게 빛나면 깜깜한 방에서도 맑은 하늘이 보인다.

물끄러미 그 문장에 멈춰 섰다. 조용히 그 문장을 발음해본다. 회오리치듯, 방을 돌아 사라지는 소리. 연필을 들어 그 아래에 여러번을 따라 쓴다. 이제 눈을 뜨면 가장 먼저 그 책을 펼친다. 찻상에 앉아 물을 올리고, 어제 읽었던 페이지에서 한장을 넘긴다. 그렇게 어제에서 오늘이 되었음을 확인한다. 오늘의 문장 역시 고되다. ‘100번 때린 쇠처럼 단단하라.’ 아니 어떻게 쇠처럼 단단해. 이게 가능해? 나는 웃으며 그 문장을 낭독한다. 먼 곳에서 같은 것을 보고 있을 친구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것을 하루의 첫마디로 삼는다. 말이야 무슨 말을 못 하겠냐며, 말 한번이라도 귀한 것을 담으며. 아무것도 담지 않은 깨끗한 몸으로, 방금 시작한 마음으로, 새로운 하루를 발음한다.

글 쓰고 말하는 사람이다. 에세이집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 유료 뉴스레터 ‘격일간 다솔’을 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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