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고 18시간만에 ‘사법살해’ 당한 8명
집주변 낯선 남자 감시…아이들은 ‘빨갱이 자식’ 놀림
행상·재봉일 하며 생계 유지 “쌀을 모래 씹듯 살았다”
행상·재봉일 하며 생계 유지 “쌀을 모래 씹듯 살았다”
1975년 4월9일. 5남매를 둔 주부였던 이영교씨는 남편 하재완(당시 42살)씨를 면회하고자 서대문 형무소로 갔다. 남편은 전날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돼 대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남편의 죽음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남편은 1년 전 목욕탕에 간다며 나간 뒤 소식이 끊겼다가도 석 달 만에 비상보통군법회의에 수의를 입은 채 나타났다.
기적처럼 살아 있었던 남편은 그날 새벽 이씨가 서대문 형무소에 도착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사형이 선고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사형집행 소식에 이씨는 실신했고, 명동성당으로 옮겨졌다. 남편의 마지막 모습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그때로부터 32년 만인 23일 오전 9시50분. 백발을 염색으로 감춘 이씨는 재심 선고가 예정된 서울중앙지법 311호 법정에 들어섰다. 남편이 떠날 때 불혹을 갓 넘겼던 이씨는 이제 고희를 훌쩍 넘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 문용선 재판장이 하씨 등 8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32년 동안 감춰졌던 진실이 드디어 햇빛을 보게 된 순간이었다. 무죄를 예상한 듯 내내 담담한 표정이었던 이씨는, 끝내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이씨는 선고 뒤 “쌀 씹는 것을 모레알 씹듯하며 살아왔다”고 지난 세월을 돌이켰다. 이씨는 남편과 함께 사형된 여정남씨를 아이들의 가정교사로 둘 정도로 부유하게 살던 ‘사모님’이었다. 하지만 남편이 숨진 뒤 집을 팔아야 할 정도로 가난에 시달렸다. 난생 처음 행상과 외판원을 전전했고, 밤새 옷을 만들어 내다 팔기도 했다. 하지만 “아침에 눈 뜨는 것이 두려울 만큼의 가난”보다 고통스러운 건 주변의 냉대와 핍박이었다.
갑자기 친척 친지의 왕래가 뚝 끊겼다. 마치 이씨 가족만 무인도에 내버려진 듯했다. 동네 아이들마저 일곱살짜리 아들의 목에 새끼줄을 묶고 “빨갱이 자식”이라며 총살 놀이를 할 정도로, 이웃들의 반응은 무서웠다. 공안기관의 감시도 삼엄했다. 이씨 집 주변에는 늘 낯선 사내들이 서성거렸다. 미국 대통령의 방한 등 국가적 행사가 있을 땐 아예 집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이씨는 “말로 다 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던” 세월을 견뎌내고, 남편 누명을 벗기는 일을 시작했다. 이씨는 송상진씨의 아내 김진생씨, 도예종씨의 아내 신동숙씨 등과 함께 문정현 신부를 찾아가 김형태 변호사를 소개받았다. 이씨는 결국 2005년 12월27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재심 결정을 받아냈고, 32년 만인 이날 남편의 무죄를 세상에 증명해 보였다.
이씨 외에 신동숙, 김진생, 이정숙(이수병씨 유족), 강순희(우홍선씨 〃), 유승옥(김용원씨 〃)씨도 이날 노구를 추슬러 법정에 나왔다. 남편이 죽기 전 초등학교 교사였던 신동숙씨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 뒤 해직됐다. 그는 “남편이 죽은 뒤 빨갱이라는 오해를 살까봐 아무도 나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말을 많이 못해 봐서 지금은 말조차 똑부러지게 못하게 됐다”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신씨는 “이번 판결을 계기로, 다른 고문조작 사건들도 진실이 밝혀졌으면 좋겠고, 무엇보다 남편이 원했던 통일도 앞당겨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 유가족과 진상 규명에 참여했던 시노트 신부(앞줄 왼쪽에서 다섯째)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23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무죄 판결을 환영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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