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블라스 거리 옆 한 골목의 모습. 앞 건물의 벽과 발코니가 손에 닿을 것 같다.
바르셀로나의 옛 도심에서 눈에 띄는 것 가운데 하나는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거의 닿을 듯 가까이 붙어있는 건물들의 모습이었다. 내가 묵었던 호텔도 그런 골목에 있었는데, 발코니로 나서면 바로 앞 건물과 옆 방의 발코니들이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각 집들이 창문을 열어둔다면 그 안이 속속들이 보이고, 발코니로 나서서 앞 집 옆 집 이웃들과 그냥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였다. 남유럽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주민들이 서로의 창문을 통해 함께 이야기하고 다투는 모습이 매우 현실적인 상황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영화에서처럼 뛰어서 옮겨갈 수 있을 것 같은 옆 방의 발코니.
우리 아파트의 베란다와 달리, 바르셀로나 골목 건물의 발코니는 정말 바닥이 좁고, 난간이 아름답지만 약해보이며, 옆이나 위 쪽으로 막힌 벽이 없다. 건물에서 살짝 내민 작은 바닥에 쇠살 난간이 쳐져 있을 뿐이다. 이 곳에 나서서 밖을 구경하거나 담배를 피울 때면 정말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아, 이게 진짜 발코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골목에서 바라본 건물과 건물 사이의 모습. 한낮이지만, 저녁 같이 어둡다. 그러나 사람이 많아 음침하지는 않다.
이런 좁은 골목의 장점은 이웃들과 쉽게 접촉할 수 있어서 이웃과의 관계가 긴밀해지고 잦아질 것 같다는 점이다. 또 가까운 건물들로 둘러싸여 아늑함(위요감)이 든다. 이것은 건물간 거리를 최대한 띄워서 긴 시야를 확보하려는 한국의 아파트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이런 도시 구조에서는 사생활이 노출되기 쉬워 한국 아파트들이 추구하는 익명성 보장이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단점은 이렇게 건물 사이가 좁으면 햇볕이 잘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의 아파트가 건물간 거리를 최대한 띄워서 충분한 빛과 볕을 받으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도와 결과를 가진 것이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건물로 연결한 건물. 회랑인 경우도 있지만, 이 건물의 경우는 주거 공간으로 보인다.
골목 입구를 아치(활 모양)로 장식하거나 건물 사이를 복도로 연결한 풍경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골목 입구를 아치로 장식한 것은 그 골목에 일종의 건축성을 부여한 듯한 느낌을 준다. 건물 사이의 비어 있는 공간인 골목에 작은 건축적 요소를 넣음으로써 그 골목을 새로운 공간으로 다시 만들어내는 듯하다. 또한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공중 회랑도 꽤 많았는데, 이 역시 골목이라는 빈 공간에 건축물의 이미지를 부여하는 듯했다. 시각적으로도 매우 아름다워 어쩌다 한국 건물에서 만나는 무성의한 공중 회랑과는 사뭇 다른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현대 건축의 거장 미스 반 데어 로에의 기념비적 현대 건축물인 파빌리온(가건물). 헐렸다가 부활했다.
바르셀로나에는 현대 건축의 기념비적 건축물도 하나 있는데, 바로 바르셀로나 몬주이크 올림픽 공원으로 가는 길에 있는 ‘파빌리온’(가건물, 가설 건축물)이다. 알려진 것처럼 이 건물은 20세기의 유명 건축가인 마리아 루트비히 미하엘 미스 반 데어 로에(‘반 데어 로에’는 그가 건축가로 활동하면서 덧붙인 이름이다)가 1929년 바르셀로나 박람회 때 독일관으로 설계, 건축한 것이다. 말 그대로 가건물이어서 박람회가 끝난 뒤 철거됐는데, 그 기념비적 성격 덕인지 1988년 같은 자리에 같은 모양으로 다시 지어졌다.
이 건물의 특징은 1차원의 선과 2차원의 면으로 3차원의 공간을 어떻게 구성하는지를 아주 단순, 명쾌하게 보여준다는 데 있다. 따라서 이 건물은 돌과 유리로 된 사각의 판형 구조물과 강철로 된 선형 구조물로만 이뤄져 있다. 20세기 이전의 건축이 안정성이나 건물의 아름다움을 높이기 위해 온갖 구조와 장식을 사용한 데 비해 이 건물은 그런 군더더기가 전혀 없다. 오직 선과 면과 공간이 있을 뿐이다. 미스는 자신이 추구하는 건축의 본질을, 또는 현대 건축물이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지를 이 건물을 통해 남김없이 보여줬다. 미스가 1937년 이후에 미국에서 지은 강철과 유리로 된 현대적인 건물들의 원형이 이 파빌리온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스의 ‘현대 건축 선언’과도 같은 건물인 셈이다.
파빌리온의 마당과 못 등 외부 공간. 이 곳에서도 극도의 미니멀리즘을 볼 수 있다.
미스는 “덜한 것이 더한 것(Less is More)”, “신은 디테일에 있다”는 등의 명언으로도 유명하다. 독일의 아헨에서 태어나 발터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 운동에도 참여했으며, 바우하우스의 마지막 교장을 지내기도 했다. 나치의 폭압을 피해 1930년대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일리노이 공과대학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쳐 르 코르뷔지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등과 함께 현대 건축의 아버지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바르셀로나 옛 도심의 람블라스 거리에는 도서관이나 서점으로 보이는 건물이 있었다. 대표적인 역사, 관광 거리 한복판에 도서관이나 서점이 있다는 것은 시민들에게 편리하고, 보기에도 좋고, 이 사회의 문화 수준을 가늠할 수 있게 만든다. 특히 이 현대적 건물은 건물 가운데 일부가 비워져 있는데, 아마도 이 빈 공간을 통해 고딕 지구의 한 건물을 볼 수 있게 만든 것 같았다. 아름다운 도시들엔 늘 이런 아름다운 ‘틈새 풍경’이 있는데, 바르셀로나도 마찬가지였다.
람블라스 거리 남동쪽에 있는 레이알 광장은 전형적인 사각형의 안마당 형식이다.
에스파냐(스페인)의 특징적인 풍경 가운데 하나는 건물로 둘러싸인 커다란 안마당(중정)이다. 람블라스 거리를 따라 바다 쪽으로 걷다보면 왼쪽으로 ‘레이알 광장’이 나타난다. 네모 모양의 커다란 건물이 둘러싼 역시 네모난 광장이 눈길을 끌었는데, 이 건물의 안쪽으로는 건물을 따라 식당과 카페가 있고, 한가운데엔 분수가 있다. 야자수와 어울린 건물과 안마당이 참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거리 연주자들의 공연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 곳 카탈루냐의 바르셀로나뿐만 아니라, 카스티야의 마드리드, 바스크의 빌바오 등 스페인의 주요 도시에는 모두 이런 사각형의 멋진 광장이 있다.
바르셀로나 보퀘리아 시장의 과일과 음료수 가게. 전통 시장이 관광객을 위한 먹거리 시장으로 탈바꿨다.
전통시장은 먹을 것으로 승부해야 한다. 보퀘리아 시장의 대부분은 먹는 것이다. 특히 과일 종류가 많았고, 나도 이 곳에서 주스를 몇 번 사서 마신 것 같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한 먹거리 가게에 대한 방송 인터뷰가 벌어지고 있기도 했다. 이것은 관광 지역인 꽃의 거리에 위치한 이 시장의 입지와 잘 맞는 것이다. 최근 서울 서촌의 통인시장과 같은 전통시장에서도 주로 먹거리로 승부를 보려고 하는데,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공장 생산품은 대형마트를 당해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글·사진 김규원 기자 ch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