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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롯데의, 김영삼의 그 염치가 그립습니다

등록 2014-12-19 20:48수정 2014-12-20 11:03

1997년에 공개된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둘째 아들 김현철씨의 국정개입 증거 영상. 현철씨가 박경식 비뇨기과 원장 방에서 연합텔레비전뉴스 인사와 관련해 전화를 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 비디오가 공개되자 아무런 변명 없이 사과했고, 현철씨는 구속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7년에 공개된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둘째 아들 김현철씨의 국정개입 증거 영상. 현철씨가 박경식 비뇨기과 원장 방에서 연합텔레비전뉴스 인사와 관련해 전화를 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 비디오가 공개되자 아무런 변명 없이 사과했고, 현철씨는 구속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35) 연재를 마치며
▶ 김형민 방송 피디. 에스비에스(SBS) <리얼코리아> <긴급출동 SOS 24> 등을 연출했고, 현재는 에스비에스 시엔비시(SBS CNBC) 소속으로 를 제작하고 있다. 교양 피디로서 사람들의 일상과 삶의 총합이라 할 역사에 관심을 기울여왔으며, 오늘의 역사를 연재한 글들을 모아 <그들이 살았던 오늘>(2012년)을 내기도 했다. 한겨레 토요판에서 20세기 마지막 격변기였던 1990년대를 탐험했다.

세밑이다. 이번주는 좀 한가하지만 지난주와 그 앞주는 그야말로 술자리 전투의 연속이었다. 폭탄이 난무하고 전사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내상을 입은 이들은 컨디션이나 ‘여○808’이라는 이름의 모르핀을 맞고 내일의 전투를 준비했다. 한 해가 가기 전에 만나 봐야 할 사람은 왜 그리 많고 또 그 자리가 없으면 왜 서운해지는지 모를 일이다. 삼백예순다섯 번 해가 뜨고 지는 일이 새삼스러울 것이야 있겠냐마는 그래도 세밑의 서녘 하늘에 짧게 걸린 해는 여느 해와 다르다. 저 해가 몇 번 더 떨어지면 한 해가 간다는 생각에 마음은 스산해지고 그 마음을 달래기 위해 생각도 많아지고 사람도 그리워지는 것이렷다.

지난주에는 대학 동아리 동기들의 송년회가 있었다. 80년대 말에 20대가 되어 남들 하는 만큼 연애도 하고 데모도 하고 공부도 하고, 90년대 중반 사회에 나와 아이엠에프(IMF)를 겪고 이제는 한 회사의 부장으로, 교사로, 증권맨으로, 방송 피디(PD)로 각자의 삶을 살아온 다섯명은 누가 엿듣기라도 하면 이 사람들 왜 이렇게 나잇값을 못하나 혀를 찰 수준으로 유치한 대화를 하며 깔깔거린다. 그리고 그 화제의 중심은 옛 친구들이 만나는 자리가 으레 그렇듯이 과거지사가 된다.

1993년 각 대학가에는 다단계 판매(피라미드 판매) 조직이 침투해 비상이 걸렸다. 한양대엔 이를 비판하는 대자보가 나붙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3년 각 대학가에는 다단계 판매(피라미드 판매) 조직이 침투해 비상이 걸렸다. 한양대엔 이를 비판하는 대자보가 나붙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학생운동권을 강타했던 ‘피라미드 사건’

항상 기분 좋은 화제만 등장하는 건 아니다. 어두운 수면 아래를 잠행하다가 불쑥 잠망경을 들어 올리는 잠수함처럼 우리들의 ‘흑역사’도 종종 드러난다. 누가 누구를 좋아했고 어떻게 차였으며 그 꼴이 얼마나 우스웠나 같은 유의 이야기부터 조금 심각하고 진지한 사회적 기억들이 얽히고설킨다. 이를테면 90년대 중반 학생운동권을 강타했던 ‘피라미드 사건’ 같은 경우가 되겠다.

당시 동구권의 몰락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이었다. 그래도 “방황하는 배는 닻을 내려라”라고 호령하며 “노래 부르며 서로를 일으키면서 애국의 한길을 간다”는 이들도 있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관이 무너지는 쇼크에 허덕였고 그때껏 지향해 왔던 인생 항로를 수정했다. ‘현장’으로 뛰어들었던 수많은 청춘들이 도서관으로 되돌아왔고 고시 열풍은 A급 태풍으로 격상됐다.

그 와중에 대학가를 휘청이게 만든 또 하나의 바람이 ‘피라미드 열풍’이었다. 자석요 같은 고가의 상품을 피라미드 방식으로 판매하고 “유통과정 없고 자본이 필요 없는 사업”은 수많은 사람들을 유혹했는데, 그중에는 “비밀을 쉽게 누설하지 않고 하부 판매원(?) 관리에 뛰어난”(<한겨레> 1993년 2월21일치) 운동권 학생들도 그야말로 입에 맞는 떡이었다. 유감스럽게도 내 직속 선배도 그 그룹에 끼었고 이래저래 아픈 상처들을 주고받게 된다.

“그때 그 형한테 전화가 와서는 자기는 무슨 욕을 먹어도 좋지만 후배 아무개만은 여기 있는 걸 말하지 말라고. 그러는 거야. 그래서 그렇게 생각하면 애 내보내라고, 안 내보내면 걔를 위해서라도 공개를 해야겠다고 했더니 음산한 목소리로 ‘너 죽을래?’ 그러더군. 나도 냅다 욕설을 퍼부어 버렸지.”

언젠가 똑같은 얘기가 다른 모임에서 나온 적이 있었다. 그때 앞자리에 있던 동기 하나가 뜨악하게 이런 말을 꺼내는 게 아닌가. “야. 나도 피라미드였잖아.” 앞의 기사에 보면 무려 5만명의 대학 졸업생, 휴학생이 피라미드 조직에 가담하고 있었으니 내 주변에도 피라미드 경험자가 종종 출현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들은 돈에 눈이 벌건 사람들도 아니었고 일확천금을 꿈꿀 만큼 허황한 이들이 아니었기에 더 안타까웠다. 지금도 나는 그 머리 좋고 논리정연했던 이른바 ‘운동권’들이 어떻게 그리도 쉽게 피라미드의 열혈 조직원으로 전락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리 ‘어느 선배를 만나느냐에 따라 정파가 결정됐던’ 운동권의 수직 구조를 인정한다 해도, 영향력이 있는 선배 하나가 거기에 빠지면 흡사 ‘줄줄이 비엔나소시지’처럼 후배들이 엮여 들어가는 모습은 가히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며칠 전 있었던 다른 송년회 자리에서 이 의문을 던졌더니 한 피라미드 경험자 친구가 이렇게 답했다.

“그게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멍청할 만큼 순진했지만 그게 옳다고 생각했다고. 적어도 그 (운동권) 중에 자기 배 부르자고 한 사람은 없었을 거야. 내가 알기로 실제 배부른 놈도 없어. 다 쫄딱 망하고 나왔지.”

물론 그의 주관적 경험일 수도 있다. 아무렴 그 안에서 셈속 빠른 놈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친구의 말에서 나는 그 시대의 조각 하나를 줍는다. 돈을 벌겠다는 일에서도, 무엇이 나에게 이로우냐 해로우냐는 질문만큼이나 이것이 옳으냐 그르냐의 기준이 무겁게 적용되던 시절이었다는 것이다. 이걸 하면 돈 벌 수 있다는 유혹만큼이나 “이것은 혁명적인 유통 방식이며 기존 자본주의에 대한 반란”(어느 피라미드 조직원이 내게 했던 말)이라는 비장한 선언에 혹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멍청할 만큼 순진했다 하더라도.”

‘땅콩 회항’ 재벌 3세가 화제이나
20년 전 롯데가 2세 폭행 비판한
동아일보만큼 센 제목 아직 못 봐
당시 롯데그룹 부회장의 사과도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이 수위 높아

90년대 많은 이들이 변했다
잃어버린 벗, 멀리 떠나버린 벗
몸 팔아버린 벗, 맘 팔아버린 벗
그러나 뭘 팔았든, 남았든, 떠났든
부끄러운 마음들은 남아있었다

“그때 김영삼이 뭐라고 했는 줄 알아?”

술자리는 이어졌다. 옛날 얘기도 하다 보면 싫증나는 법, 요즘 한창 장안의 화제인 땅콩 회항 얘기도 나왔다. 대한항공에 있다는 친구의 귀띔, 찌라시라는 정통한(?) 소식통까지 다 망라된 다음 한 친구가 그런 얘기를 꺼낸다. “염치가 없어진 것 같아. 부끄러움을 모르고 거리끼는 게 없어. 이렇게 해도 될까 하는 경계심조차 사라졌어. 그 사람(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이 몇 시간 동안 울었다는 얘기도 있더라. 아마 울었을 거야. 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내 마음에 안 드는 서비스를 한 직원을 나무라고 내 비행기에서 내리라고 한 게 뭐가 잘못됐다고 이 난리냐며 억울해하면서 울었을 거야. 그게 지금은 당연하니까.”

요즘은 그리 즐겨 사용하지 않는 말이지만 80년대 말부터 90년대 내내 사용된 단어가 있었다. ‘위화감’. 그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조화되지 아니하는 어설픈 느낌”. 이 단어의 대상은 주로 상류층과 특권층이었다. 1994년 <동아일보> 기사에 나타난 ‘위화감’의 용례를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농촌에 러브호텔이 들어서도 위화감 걱정이었고 초등학교의 우수학생 월반 제도에도 위화감 근심을 하고 있으며 억대 모델료도 위화감 조성의 대상이라고 개탄하고 있고 하다못해 대학 관련 보도의 명문 편향도 위화감을 조성한다고 우려하고 있다. “단 하루라도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어 룸살롱 문을 두드렸다. 돈 있는 집 자식들이 하룻밤에 뿌리는 돈으로 우리 가족들은 6개월도 살 수 있다”며 어금니를 깨물었다는 김아무개양의 절규를 소개하는 기사(<동아일보> 1994년 9월30일치)에 이르면 요즘으로 치면 ‘정당한 부를 증오하는 반기업정서’의 향기마저 풍긴다. 이렇게 언론이 앞장서서 상류층의 일탈을 규탄하고 대중과 ‘조화되지 아니하는 어설픈 느낌’을 개탄해 마지않던 때가 있었던 것이다.

1994년 “감히 프라이드가 그랜저를 추월한다”는 이유로 시비를 걸어 재벌 2세를 포함한 부유층 자제들이 프라이드 운전자를 두들겨 팬 사건이 일어났을 때 오늘날의 극보수신문 <동아일보>의 기사 제목은 매우 상징적이다. “있는 집 아이들의 망나니짓 재벌 2세 등 5명 폭행극”(동아일보 1994년 1월22일치)

2014년 땅콩을 자기 마음에 들지 않게 서비스한다며 객실승무원(스튜어디스)과 사무장에게 폭언을 퍼붓고 한국과 미국의 항공법을 동시에 무시하며 비행기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사무장을 강제로 하기(비행기에서 내림)시켰던 재벌 3세가 장안의 화제는 되고 있으나 20년 전의 동아일보만큼의 센 제목을 붙인 기사를 본 적이 없는 듯싶다. 20년 전 롯데그룹 부회장님의 사과도 무척 수위가 높다. “이 기회에 자식이 법에 따라 엄한 처벌을 받고 거듭 태어나기를 간절히 바란다”였으니까.

이들의 신분을 알아본 경찰이 사건을 축소보고하는 못난 짓을 벌인 것까지도 폭로되는 판이었으니 재벌 2세가 아니라 재벌 1세라 해도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고 그 일행은 모두 구속됐다. 2014년의 대한항공 직원들이 행여 부사장님이 조사 중 사용하실지 모를 국토교통부 화장실 청소를 요구한 것처럼, “우리 도련님이 쓰실 화장실”을 청소하는 롯데 그룹 직원들이 있었을까. 직원들이 영하 10도의 추위에 밖에서 발발 떨면서 대기하는 가운데 언제 나오실지 모를 부회장님의 온기를 지키기 위해 4시간 동안 공회전을 하는 상황이 과연 1990년대에는 가능했을까.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시대에도 목구멍은 포도청이고 밥줄 쥔 사람은 하늘이었으니까. 하지만 질문은 남는다. 그런 일들이 요즘처럼 기탄없이, 노골적으로, 대놓고 행해졌을까.

“글쎄. 염치가 없어졌다니까. 부끄러운 걸 몰라. 젠장 나부터 그렇고.” 술잔을 홀짝 넘기면서 한 친구가 내뱉은 소리다. 90년대 23.5도의 지구 자전축이 뒤바뀌는 듯한 변화 속에서 많은 이들이 변했다. 신석정의 시구절을 빌리면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멀리 떠나 버린 벗도, 몸을 팔아 버린 벗도, 맘을 팔아 버린 벗도” 다 있었다. 하지만 90년대의 대한민국에는 뭘 팔았든 남아 있든 떠났든 부끄러운 마음들이 남아 있었다. 최소한 눈치를 보는 배려만큼은 남아 있었다. 이미 자신의 과거 정체성을 버렸을지언정 여당의 날치기 통과에 가담한 뒤 참담함을 토로하며 국민에게 사과했던 정치인도 있었다. 안타까움이 뚝뚝 떨어지는 명문으로 “그대 아직도 혁명을 꿈꾸는가”라고 호소하던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나는 그들에게 더 이상의 염치와 배려를 기대하지 못한다. 친구는 말을 이었다.

“김영삼도 김대중도 아들들이 헛짓하면 다 구속시켰잖아. 변명 안 했잖아. 그래 김현철 때 기억나냐? 김현철을 몰래 찍은 시시티브이(CCTV)가 문제였잖아. 그때 김영삼 뭐 사생활 침해니 뭐니 그런 얘기 안 했어. 어느 신문에 났더라. 비서관이 목숨 걸고 김영삼한테 보고하니 그렇게 심하나? 물었다고. 그렇다고 하니까 구속시키라고 했다고. 김현철이 전화 오고 난리났는데 김영삼 대통령 다시 전화 와서 ‘전화 온 거 아는데 개의치 마라’고 했다고. 그런데 요즘은 청와대 비서관이 작성한 문건이 공개돼도 그 내용은 문제가 아니고 유출된 게 문제라는 식이니 보는 사람들을 장님 취급하고 듣는 사람들을 청맹과니로 보는 게 아니고 뭐냐는 말이지. 도대체 부끄러운 걸 몰라.”

‘제보자’ PD를 스케이트장으로 보내려는 ‘용기’

부끄러움을 의식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눈을 두려워한다는 뜻이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이브가 눈이 밝아진 뒤 처음으로 한 일이 서로의 치부를 가린 것이지 않은가.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고 자신의 이로움만큼이나 남의 이로움도 배려하는 것, 아니 최소한 그러려고 노력하거나 그런 체라도 하며 내 속의 ‘날것’을 드러내지 않는 마음, 그리고 남이 이해 못하는 일을 나 혼자 고집하여 뻗대지 못하는 마음이 바로 부끄러움이다. 대통령인들 자기 자식이 귀엽지 않았을 것이며 아들을 감옥에 보내고 싶었겠는가. 그 아내는 가만히 있었겠는가. 하지만 90년대의 대통령은 그래야 했다. 부끄러울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일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친구의 한탄을 듣다가 문득 숨이 막혀 왔다. 회사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모 방송사의 스케이트장이 떠오른 탓이다. 한때 그 방송사는 영화 <제보자>의 주인공이자 대한민국을 뒤흔든 사기극을 생명의 위협을 걸고 파헤친 피디의 “능력을 인정하여” 스케이트장 관리를 맡기려 한다고 했다. 해당 피디의 전언에 따르면 ‘면담 끝에’ 그런 참사에 이르지는 않게 됐다지만 그 다행스런 소식을 들으면서도 나는 의아했다. 정말 그렇게 하고도 부끄러움이 없을까. 두렵지 않을까. 어떻게 그런 발상이 나올 수 있을까. 도대체 그 용기(?)의 원천은 무엇일까.

김형민 방송 피디
김형민 방송 피디
이런 개탄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송년회는 즐거웠다. 추억을 나누는 사람들이란 언제 만나도 흥겨운 법이다. “옳다고 생각했기에” 피라미드에 뛰어들 수도 있었고 “혁명의 투혼으로 세계를 변혁하라”고 노래한 직후에 “토플의 투혼으로 세계를 번역하라”고 영어책을 독파해야 했으며 한때의 지향이 눈 녹듯 사라졌지만, 그래도 우리 살아온 인생이 적어도 가슴을 펴고 최소한 부끄럽지는 말자고, 서로 어깨를 두드려 주는 친구들인데 그 감회가 오죽하랴. 우리들이 청춘이었던 90년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겠지만 그 시절은 이제 어설프면서도 어엿한 역사가 되어 우리 모두의 뒤켠에 언덕으로 솟아 있다. 술에 취해 키들거리는 가운데 어떤 화제의 말미에 한때 많이 써먹었던 한 격언이 등장했다. “마르크스가 그랬나. 역사상 중요한 일은 두 번 반복되는데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끝난다고.”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들의 90년대는 결코 해피엔드가 아니었지만 또 한 번 90년대가 반복된다면 해피엔드였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그 탐험의 끝자락에 나처럼 씁쓸해지는 것이 아니라 신이 나고 흥겨워서 친구들 불러 모아 “우리 오늘 한잔!” 하며 부르짖을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고.

※이번 회를 마지막으로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칼럼을 마칩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김형민 방송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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