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죄는 재난처럼 닥친다. 범죄 피해자가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과정은 길고 고되다. 1994년 9월8일 경기도 양평 양수리 국도변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되었으나 죽음의 문턱에서 탈출하여 ‘지존파’의 존재를 세상에 알려준 생존자 이정수(가명·48)씨가 1995년 재판 이후 최초로 언론에 당시 상황을 증언한다. 공동체가 범죄 피해자에게 좀 더 관심을 가질 것을 환기함이 첫째 목적이다. 트라우마 극복 과정을 나눔으로써 다른 범죄 피해자와 가족들이 힘을 얻길 바람이 두번째 목적이다.
(지난주 내용 요약: 정수(가명)씨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2남3녀의 막내였다. 음식점을 겸한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1994년 9월8일 새벽 경기도 팔당댐 근처에서 지존파 다섯 명에게 납치됐다. 함께 일하던 동료와 드라이브를 하던 중이었다. 트럭에 실려 전남 영광에 있는 그들의 아지트로 납치됐다.)
제가 눈을 가만히 내리깔고 앉아 있었어요. 그들이 노트와 볼펜을 주며 자필로 신상에 대해 적으라더군요. 직업 등에 대해 솔직하게 다 적었습니다. 하는 일도요. 그다음에 그 밴드마스터에 대해서 아는 걸 적으라더군요. 아는 대로 적었습니다. 그들(지존파)은 반대로 밴드마스터에게도 본인과 저에 대해 진술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두 명의 진술을 자기들끼리 맞춰봤습니다. 거의 90% 일치했지요. 저와 밴드마스터에게서 돈을 뺏을 수 없다는 걸 안 거죠. 아차 싶었나봐요. 돈 많은 사람이 아니란 걸 안 거죠. 자기들끼리 웅성거리더군요. “재수없네”라는 말이 들렸습니다. “저것들을 어떻게 처리해? 여기까지 데려왔는데”라는 말도 들렸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가자고 했잖아”라는 불만 섞인 말도 들었습니다. 저는 그냥 앉아 있었습니다. 시멘트 바닥에 앉아 있는데 김현양과 문상록이 들어왔습니다. 김현양이 전라도 말투로 “더럽게 재수없네요”라고 말했는데 귓전에서 맴돌았습니다. 그 말이 제 귀에 딱지처럼 둘러붙더군요. 아무튼 가만히 있었어요.
그때 가족들이 떠올랐습니다. 이제 살 수는 없고 마지막인데 엄마도 못 보고 아버지도 못 보고 형제들도 못 보고 친구들도 못 보고 가는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가족, 친구들한테) 잘해줄걸. 그러나 ‘살려달라고 하면 살려줄 것 같다’는 생각은 0%도 안 들었어요. 이상하게 ‘이제 모든 게 마지막이구나’라고 기대를 접으니 마음이 차라리, 그때까지만 해도 막 떨었는데, 근데 마음이 차라리 편안해지더군요. 9월에 지하실에서 반팔, 반바지 차림이라 몹시 추웠거든요.
라면 안으로 하염없이 떨어진 눈물
우려했던 일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어느 정도 예상을 했어요. 성폭행이나 죽음까지도요. 성폭행이 있었습니다. 제 몸이, 내 육체가 그렇게 초라하고 보잘것없고 누추해 보이기까지 했어요. 내 입술을 스스로 깨물어서 나중에 입술이 피가 날 정도로 퉁퉁 부어올랐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김현양이 자꾸만 “살려주겠다, 살려줄 것이다”라는 말을 혼자서 계속 하는 거예요. 제가 “안 믿어요”라고 답했더니 김현양이 “다른 여자들은 잡히면, 잡아 오면 ‘살려달라’고 하던데”라고 말하더군요. 제 이름 뒤에 ‘씨’를 붙이더라고요. “왜 정수씨(가명)는 살려달라고 안 하냐”고. 그래서 제가 “살려달라고 해도 살려줄 거 아니잖아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김현양이 “그렇죠”라더군요. 저는 다시 “그런데 뭐하러 살려달라고 해요?”라고 말하고 담담하게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김현양이 한참을 저를 쳐다보더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앞으로, 아마 예상은 했겠지만, 이런저런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각오하셔야 될 것입니다. 강해져야 합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존댓말로 말했어요. 그들(지존파)은 나한테 처음에는 반말을 하고 막 욕을 했지만 나중에는 다 존댓말을 썼고 이름 뒤에 ‘씨’를 붙였어요. 물론 그러다 수틀리면 다시 “야!”라고 반말을 했지만요.
쇠창살 달린 지하 감옥에 갇혀
날짜 알 수 없는 날들이 흘러
처음에 반말하더니 존댓말 쓴
김현양이 그동안의 범죄 털어놔
경찰서 점령 등의 계획도 알려줘 검은 비닐봉지로 밴드마스터를
질식사시키는 데 나를 가담시켜
사고사로 위장하기 위해 나가면서
“우리가 못 돌아오면 실패한 거고
그럼 너 감옥문 열어줄 사람 없다” 김현양이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모릅니다. 그 사람이 뭔가, 그 상황(납치·살인 등 범행)에 염증이 났던 것 같기도 해요. 나중에 되돌아보니 다른 애들은 별생각 없이 하는데 그 사람은 갈등을 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자기 자리를 조직에서 더 굳히려고 했거나 둘 중 하나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지 아무튼 계속 제게 말을 거는 거예요. 정보도 주고요. 자기가 그전에 어떤 범죄를 했었는지를 다 말했죠. 그 사람(김현양)한테 다 들었어요. 여공 납치 살해 사건, 같은 조직원을 다 같이 살해한 사건 등. 언론에서 알려지기 전에 저는 먼저 안 거죠. 이 얘기를 다른 조직원은 아무도 안 했어요. 그 사람이 다 얘기를 해줬어요. 어떻게 죽였고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그다음에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앞으로의 범죄는 뭔가에 대해서도. “앞으로 양수리에 있는 고급 별장에 쳐들어가 돈을 뺏고 경찰서를 점령해서 무기를 준비한 뒤 광주 엠비시(문화방송)에 쳐들어가 언론에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방송하게 할 것”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그런 얘기들을 주욱 하길래 그때 저는 ‘아, 이 사람들 보통사람들이 아니구나. 완전히 철두철미한 사람들이구나’라는 판단이 들었고 그러자 다 포기하게 되었죠. 어떻게 죽게 될지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보고 싶은 사람이 떠올랐죠. ‘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전에 ○○한테 좀더 잘해줄걸.’ 이런저런 후회들이 밀려오더라고요. 근데 그 순간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내가 단 한 시간만이라도 밖에 나가서 살 수 있으면, 나는 거지로 살아도 좋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살아도 좋으니까, 하루만이라도 밖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라는 거였어요. 그냥, 밖을 한번 봤으면 좋겠다, 제가 갇힌 곳이 지하였으니까요. 아지트는 지상 건물과 지하 감옥으로 돼 있었어요. 감옥방은 세 개였습니다. 지상에서 지하실로 계단을 내려와 철문을 열면 가운데 복도가 있었고, 복도 양쪽으로 쇠창살이 달린 감옥이 두 개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감옥은 바닥에서 벽면과 천장까지 온통 시멘트 회색빛이었어요. 그냥 사각 상자처럼. 날짜는 전혀 알 수 없었어요. 날이 새고 밝는 걸로 ‘잡혀 온 지 며칠째’라는 정도 감각만 있었습니다. 이틀째 되는 날 저를 올라오게 하더군요. 제게 안대를 하고 업어서요. 거실로 보이는 실내공간이었죠. 그날이 같이 잡혀 온 밴드마스터가 죽는 날이었습니다. 김현양이 제게 “음주 교통사고로 위장할 건데 살고 싶으면 협조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된다, 살고 싶으면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다가 “그게 뭔데요?”라고 물었더니 “가담을 해야 된다”더군요. “동료들한테 믿음을 줘야 된다, 그러면 살 수 있는 확률이 있다”더군요. 둘 다는 못 살려준다고 했어요. 그때 처음으로 살아 나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동시에 머릿속이 어질어질, 잡념과 망각으로 가득 차서 머리가 터져버릴 듯이 아팠어요. 김현양이 “위로 올라갈 거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더군요. 마지막으로 밴드마스터의 얼굴을 제게 보여줬습니다. 제 얼굴의 상처를 보고 “왜 이래?”라고 말한 게 마지막이었습니다. 다시 위 아지트로 옮겨졌어요. 그들은 라면을 먹고 있었죠. 김현양이가 제게 상 앞으로 앉으라더군요. 그들은 그때까지 제게 음식을 주지 않았어요. 사실 배고픔도 잊었죠. 자기들끼리 “지금 6시 반이니까 7시부터 시작하자”라더군요. 그 말을 듣고 시간을 대충 짐작했지요. 고개를 못 들고 앉아서 라면을 떠 넣는데 먹는 건지 뭔지 느낌이 없었습니다. 눈물이 그렇게, 음식 안으로 하염없이 눈물이 떨어지는 건 처음 경험했어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눈물이 계속 떨어지는데 라면을 들어올렸죠. 그 뒤로는 울지 않았어요. 내 눈앞을 스쳐간 ‘하얀 나비’ 밴드마스터는 이미 술에 취해서 뻗어 누워 있었습니다. 자기가 입고 온 옷 그대로요. 신발까지요. 그래서 내가 그 방에 들어가다가 움칫했더니 김현양이가 나를 탁 밀었습니다. “정수씨”라고 저를 불렀습니다. 검은 비닐봉지가 있었어요. 검은 비닐봉지를 그 사람 얼굴에 씌웠어요. 남자는 질식사했습니다. 그들이 범행을 하며 제 손을 억지로 갖다대게 했습니다. 저는 군용 침낭같이 지퍼가 달린 포대에 밴드마스터의 시신을 넣고 지퍼를 잠그는 모습까지 봤습니다. 그때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냥 담담하다고 해야 할까요? 그냥 무덤덤했고 감정을 뭐라 표현할 수가 없었어요. ‘넋이 나갔다’고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나 자신이 유체이탈되어 가지고 다른 사람으로 되어서 상관없이 보고 있는 사람이 된 듯한? 그들은 제게 다시 지하 감옥으로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감옥에 밀어넣어지는데 이상하게 하얀 나비 같은 게 제 눈앞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어요. 지하 감옥에는 생물이라고는 그 전까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어요. 하다못해 벌레 한 마리도 없었어요, 거기에. 근데 하얀 나비 같은 게 보이는 거예요. 문을 열어놓아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사람이 죽으면 혼이 나와서 나비가 된다’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정말 신기하다고 생각하는데 다시 방문이 닫혔어요. 밖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그들이 외출하기 전 김현양이 제게 마지막으로 말했어요. “우리가 못 돌아오면 실패한 거고, 우리가 실패하면 아무도 (감옥문을) 열어주는 사람이 없으니 정수씨도 여기서 죽을 겁니다.” 밴드마스터의 시신을 교통사고로 위장하는 작업을 하러 나가는 길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시신 처리 과정에서 누군가에게 잡히거나 실패하면 아무도 갇힌 사실을 모르는 저는 지하에서 죽게 된다는 뜻이었죠. 성공하기를 바라라는 그런 말이더군요. 그들은 한 명을 남겨두었어요. 얼굴에 흉터가 있는 강문섭(당시 20살)이었습니다. 얼굴에 흉터가 있어 혹여 검문 등을 당할 때 쉽게 기억될 우려가 있어서였죠. 작업이 실패하거나 경찰이 들이닥치면 강문섭은 1층에서 자결하도록 예정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갇힌 감옥문을 열어줄 사람이 없다는 의미였습니다. 어쩌면 저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성공을 간사하게 원했죠. 그들이 문을 닫고 나간 뒤 울었어요. 눈물이 나오더군요. 문에서 등을 돌리고 침낭 위에 앉아 있었어요. 무릎을 세우고 앉은 상태에서 울었습니다. 울면서도 속으로 또 모순되게 ‘아, 저 사람(밴드마스터)이 제발 지금은 기절한 상태면 좋겠다, 제발 살아 있었으면’ 하는 모순된 생각도 했습니다. 네 명이 나가자 남은 한 명이 철문을 열고 제가 있던 감옥으로 들어왔습니다. 자기는 “이러고 싶지 않은데 형들이 시켰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며 저를 성폭행했습니다. 네 명이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어요. 문을 닫고 올라가는 소리가. 저는 감옥에 있는 창문 밖을 까치발을 하고 바라봤어요. 감옥에 외부가 아주 조금 엿보이는 유리창이 있었어요. 까치발을 들고 보면 바깥이 살짝 보였죠. 내가 이 유리창을 깨면 어쩌면 나갈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했어요. 그러나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유리를 깰 수 있는 게 없었어요. “아저씨가 살아 있습디다” 앉았다가 밖을 쳐다보기를 몇번 반복하니 그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제가 있던 감옥 안에까지 그들의 격앙되고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제일 먼저 문을 연 사람은 김현양이었습니다. “아저씨가 살아 있습디다”라고 피식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랜저 운전석에 앉히기 전에 다시 조치를 하고 앉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일단 사고사로 위장했다”고 얘기했습니다. 주저리주저리 이런저런 얘기를 제게 했는데 저는 그때 ‘대체 얘는 왜 이렇게 내 옆에 와서 떠들까?’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앤가?’라는 의심마저 들었죠. 김현양이 누구를 죽였는지 얘기했죠. ‘우리 말고도 수많은 사람을 죽여봤구나’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면서 ‘이 사람들이 절대 넘지 못할 철벽이겠구나’라고 체념했어요. 그러니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고개를 땅바닥을 향해 떨구게 되더군요. 한참 혼자 앉아 있었는데 김현양이 내려왔어요. 저보고 “위로 올라가자”고 그랬습니다. 마루에서 그들은 모종의 계획을 짜고 있었어요. 그곳을 떠나 다른 제2의 범행을 할 장소를 찾는 것 같았어요. “일단 성남으로 가자”거나 “광주로 가야 한다”거나 “거기 가면 뭐가 있냐”라고도 했습니다. 저는 벽에 기대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이들이 옮겨가는데 나를 동참시킬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김현양이 다른 조직원들하고 합의를 안 하고 저더러 올라오라고 한 것 같았어요. 제가 마루로 올라오니까 조직원 중 한 명이 “야! 쟤는 왜 데리고 올라와?”라고 말했어요. <다음주에 계속> 정리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 세부 주제와 연재 횟수는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 이 기사는 다음 뉴스펀딩(m.newsfund.media.daum.net/project/299)에도 연재합니다. 뉴스펀딩을 통해서는 지존파 납치 생존자 이씨에게 후원금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날짜 알 수 없는 날들이 흘러
처음에 반말하더니 존댓말 쓴
김현양이 그동안의 범죄 털어놔
경찰서 점령 등의 계획도 알려줘 검은 비닐봉지로 밴드마스터를
질식사시키는 데 나를 가담시켜
사고사로 위장하기 위해 나가면서
“우리가 못 돌아오면 실패한 거고
그럼 너 감옥문 열어줄 사람 없다” 김현양이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모릅니다. 그 사람이 뭔가, 그 상황(납치·살인 등 범행)에 염증이 났던 것 같기도 해요. 나중에 되돌아보니 다른 애들은 별생각 없이 하는데 그 사람은 갈등을 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자기 자리를 조직에서 더 굳히려고 했거나 둘 중 하나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지 아무튼 계속 제게 말을 거는 거예요. 정보도 주고요. 자기가 그전에 어떤 범죄를 했었는지를 다 말했죠. 그 사람(김현양)한테 다 들었어요. 여공 납치 살해 사건, 같은 조직원을 다 같이 살해한 사건 등. 언론에서 알려지기 전에 저는 먼저 안 거죠. 이 얘기를 다른 조직원은 아무도 안 했어요. 그 사람이 다 얘기를 해줬어요. 어떻게 죽였고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그다음에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앞으로의 범죄는 뭔가에 대해서도. “앞으로 양수리에 있는 고급 별장에 쳐들어가 돈을 뺏고 경찰서를 점령해서 무기를 준비한 뒤 광주 엠비시(문화방송)에 쳐들어가 언론에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방송하게 할 것”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그런 얘기들을 주욱 하길래 그때 저는 ‘아, 이 사람들 보통사람들이 아니구나. 완전히 철두철미한 사람들이구나’라는 판단이 들었고 그러자 다 포기하게 되었죠. 어떻게 죽게 될지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보고 싶은 사람이 떠올랐죠. ‘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전에 ○○한테 좀더 잘해줄걸.’ 이런저런 후회들이 밀려오더라고요. 근데 그 순간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내가 단 한 시간만이라도 밖에 나가서 살 수 있으면, 나는 거지로 살아도 좋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살아도 좋으니까, 하루만이라도 밖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라는 거였어요. 그냥, 밖을 한번 봤으면 좋겠다, 제가 갇힌 곳이 지하였으니까요. 아지트는 지상 건물과 지하 감옥으로 돼 있었어요. 감옥방은 세 개였습니다. 지상에서 지하실로 계단을 내려와 철문을 열면 가운데 복도가 있었고, 복도 양쪽으로 쇠창살이 달린 감옥이 두 개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감옥은 바닥에서 벽면과 천장까지 온통 시멘트 회색빛이었어요. 그냥 사각 상자처럼. 날짜는 전혀 알 수 없었어요. 날이 새고 밝는 걸로 ‘잡혀 온 지 며칠째’라는 정도 감각만 있었습니다. 이틀째 되는 날 저를 올라오게 하더군요. 제게 안대를 하고 업어서요. 거실로 보이는 실내공간이었죠. 그날이 같이 잡혀 온 밴드마스터가 죽는 날이었습니다. 김현양이 제게 “음주 교통사고로 위장할 건데 살고 싶으면 협조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된다, 살고 싶으면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다가 “그게 뭔데요?”라고 물었더니 “가담을 해야 된다”더군요. “동료들한테 믿음을 줘야 된다, 그러면 살 수 있는 확률이 있다”더군요. 둘 다는 못 살려준다고 했어요. 그때 처음으로 살아 나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동시에 머릿속이 어질어질, 잡념과 망각으로 가득 차서 머리가 터져버릴 듯이 아팠어요. 김현양이 “위로 올라갈 거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더군요. 마지막으로 밴드마스터의 얼굴을 제게 보여줬습니다. 제 얼굴의 상처를 보고 “왜 이래?”라고 말한 게 마지막이었습니다. 다시 위 아지트로 옮겨졌어요. 그들은 라면을 먹고 있었죠. 김현양이가 제게 상 앞으로 앉으라더군요. 그들은 그때까지 제게 음식을 주지 않았어요. 사실 배고픔도 잊었죠. 자기들끼리 “지금 6시 반이니까 7시부터 시작하자”라더군요. 그 말을 듣고 시간을 대충 짐작했지요. 고개를 못 들고 앉아서 라면을 떠 넣는데 먹는 건지 뭔지 느낌이 없었습니다. 눈물이 그렇게, 음식 안으로 하염없이 눈물이 떨어지는 건 처음 경험했어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눈물이 계속 떨어지는데 라면을 들어올렸죠. 그 뒤로는 울지 않았어요. 내 눈앞을 스쳐간 ‘하얀 나비’ 밴드마스터는 이미 술에 취해서 뻗어 누워 있었습니다. 자기가 입고 온 옷 그대로요. 신발까지요. 그래서 내가 그 방에 들어가다가 움칫했더니 김현양이가 나를 탁 밀었습니다. “정수씨”라고 저를 불렀습니다. 검은 비닐봉지가 있었어요. 검은 비닐봉지를 그 사람 얼굴에 씌웠어요. 남자는 질식사했습니다. 그들이 범행을 하며 제 손을 억지로 갖다대게 했습니다. 저는 군용 침낭같이 지퍼가 달린 포대에 밴드마스터의 시신을 넣고 지퍼를 잠그는 모습까지 봤습니다. 그때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냥 담담하다고 해야 할까요? 그냥 무덤덤했고 감정을 뭐라 표현할 수가 없었어요. ‘넋이 나갔다’고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나 자신이 유체이탈되어 가지고 다른 사람으로 되어서 상관없이 보고 있는 사람이 된 듯한? 그들은 제게 다시 지하 감옥으로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감옥에 밀어넣어지는데 이상하게 하얀 나비 같은 게 제 눈앞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어요. 지하 감옥에는 생물이라고는 그 전까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어요. 하다못해 벌레 한 마리도 없었어요, 거기에. 근데 하얀 나비 같은 게 보이는 거예요. 문을 열어놓아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사람이 죽으면 혼이 나와서 나비가 된다’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정말 신기하다고 생각하는데 다시 방문이 닫혔어요. 밖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그들이 외출하기 전 김현양이 제게 마지막으로 말했어요. “우리가 못 돌아오면 실패한 거고, 우리가 실패하면 아무도 (감옥문을) 열어주는 사람이 없으니 정수씨도 여기서 죽을 겁니다.” 밴드마스터의 시신을 교통사고로 위장하는 작업을 하러 나가는 길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시신 처리 과정에서 누군가에게 잡히거나 실패하면 아무도 갇힌 사실을 모르는 저는 지하에서 죽게 된다는 뜻이었죠. 성공하기를 바라라는 그런 말이더군요. 그들은 한 명을 남겨두었어요. 얼굴에 흉터가 있는 강문섭(당시 20살)이었습니다. 얼굴에 흉터가 있어 혹여 검문 등을 당할 때 쉽게 기억될 우려가 있어서였죠. 작업이 실패하거나 경찰이 들이닥치면 강문섭은 1층에서 자결하도록 예정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갇힌 감옥문을 열어줄 사람이 없다는 의미였습니다. 어쩌면 저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성공을 간사하게 원했죠. 그들이 문을 닫고 나간 뒤 울었어요. 눈물이 나오더군요. 문에서 등을 돌리고 침낭 위에 앉아 있었어요. 무릎을 세우고 앉은 상태에서 울었습니다. 울면서도 속으로 또 모순되게 ‘아, 저 사람(밴드마스터)이 제발 지금은 기절한 상태면 좋겠다, 제발 살아 있었으면’ 하는 모순된 생각도 했습니다. 네 명이 나가자 남은 한 명이 철문을 열고 제가 있던 감옥으로 들어왔습니다. 자기는 “이러고 싶지 않은데 형들이 시켰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며 저를 성폭행했습니다. 네 명이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어요. 문을 닫고 올라가는 소리가. 저는 감옥에 있는 창문 밖을 까치발을 하고 바라봤어요. 감옥에 외부가 아주 조금 엿보이는 유리창이 있었어요. 까치발을 들고 보면 바깥이 살짝 보였죠. 내가 이 유리창을 깨면 어쩌면 나갈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했어요. 그러나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유리를 깰 수 있는 게 없었어요. “아저씨가 살아 있습디다” 앉았다가 밖을 쳐다보기를 몇번 반복하니 그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제가 있던 감옥 안에까지 그들의 격앙되고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제일 먼저 문을 연 사람은 김현양이었습니다. “아저씨가 살아 있습디다”라고 피식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랜저 운전석에 앉히기 전에 다시 조치를 하고 앉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일단 사고사로 위장했다”고 얘기했습니다. 주저리주저리 이런저런 얘기를 제게 했는데 저는 그때 ‘대체 얘는 왜 이렇게 내 옆에 와서 떠들까?’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앤가?’라는 의심마저 들었죠. 김현양이 누구를 죽였는지 얘기했죠. ‘우리 말고도 수많은 사람을 죽여봤구나’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면서 ‘이 사람들이 절대 넘지 못할 철벽이겠구나’라고 체념했어요. 그러니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고개를 땅바닥을 향해 떨구게 되더군요. 한참 혼자 앉아 있었는데 김현양이 내려왔어요. 저보고 “위로 올라가자”고 그랬습니다. 마루에서 그들은 모종의 계획을 짜고 있었어요. 그곳을 떠나 다른 제2의 범행을 할 장소를 찾는 것 같았어요. “일단 성남으로 가자”거나 “광주로 가야 한다”거나 “거기 가면 뭐가 있냐”라고도 했습니다. 저는 벽에 기대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이들이 옮겨가는데 나를 동참시킬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김현양이 다른 조직원들하고 합의를 안 하고 저더러 올라오라고 한 것 같았어요. 제가 마루로 올라오니까 조직원 중 한 명이 “야! 쟤는 왜 데리고 올라와?”라고 말했어요. <다음주에 계속> 정리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 세부 주제와 연재 횟수는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 이 기사는 다음 뉴스펀딩(m.newsfund.media.daum.net/project/299)에도 연재합니다. 뉴스펀딩을 통해서는 지존파 납치 생존자 이씨에게 후원금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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