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평화기행의 첫발을 내딛던 6월23일 국내에선 또 한 분의 ‘위안부’ 할머니가 별세했다. 그리고 마지막인 제네바 캠페인 사흘 전, 스트라스부르 캠페인 이틀 전 다시 한 분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유희남, 향년 87살. 충남 아산에서 14살 때 일제 경찰에 끌려가 일본군에게 천하에 몹쓸짓을 당하다가 전선에 버려졌던 할머니.
죽음보다 더 치욕스런 자신의 일본군 성노예 사실을 증언했던 할머니 238명 가운데 이제 남은 이는 40명뿐. 지난해에 아홉 분이 돌아가셨는데 올해엔 벌써 여섯 분이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들의 별세 소식이 숨 가쁠 정도로 잦다.
1239차 수요집회 세계연대 시위로 진행된 13일 스위스 제네바 유엔 사무국 앞 캠페인의 출발이 특별히 차분하고 무거웠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유럽 대장정을 마감하는 행사였음에도 이전의 전복적인 발랄함 대신 깊은 애도 속에서 진행됐다. 가요 <가시리>의 낮고 깊은 선율이 광장을 적시면서 일행은 아주 긴 묵념을 했다. 피지배가 아니라 경험이 많았던 그곳 사람들에게는 그 의미가 쉽게 다가오기 힘들겠지만, 일행의 숙연한 분위기는 분수대의 물보라처럼 가벼웠던 광장을 엄숙하게 만들었다.
광장의 상징인 조형물 ‘부서진 의자’는 권력자의 탐욕에 의해 몸이 부서지고 영혼이 짓밟힌 이들의 평화와도 같은 것이었다. 네 개의 다리 가운데 하나만 부러져도 넘어질 수밖에 없는 의자. 그것은 지뢰에 발목이 잘려나간 이들의 부러진 삶이었고 전쟁 속에서 부모 자식 형제를 잃어버린 이들의 찢겨진 영혼이었으며, 일제가 강제고 끌고가 일본군의 성노예 노릇을 해야했던 식민지 소녀의 꿈이었다. 평생 자학과 수치와 모욕 속에서 버텨온 삶이었다. 평화는 그렇게 권력과 무력 앞에서 쉽사리 부러지고 무너지는 것이었다.
그런 할머니들의 꿈은 그런 지배와 억압, 전쟁범죄와 인권유린이 없는 세상이었다. 그 때문에 죽음보다 더 견디기 힘든 수치를 감수하고 자신의 몸과 영혼을 역사의 법정에 전쟁범죄와 인권유린의 증거로 내어놓았다. 그러나 권력은 지금도 그들의 비원을 외면하고 묵살하고 멋대로 재단한다. 박근혜 정부와 아베 정권이 맺은 12·28 ‘일본군 위안부’ 합의는 그 상징이었다. 희망나비의 제네바 수요시위는 그런 현실을 상기시키고, 다시 한 번 일본 정부의 공식사과와 법적 책임 인정, 그리고 12·28 합의의 철회와 세계인의 관심과 지지를 호소했다. 공식적인 세계연대 수요집회가 끝나고 캠페인이 시작되면서 ‘나비의꿈’의 쾌활과 발랄은 돌아왔고, 광장은 나비의 날개짓과도 같은 노래와 율동으로 채워졌다.
이날 제네바 캠페인으로 두 차례의 해외 수요집회, 여섯 차례의 캠페인, 16개 도시에서 진행된 1인 시위로 이루어진 2016년 유럽평화기행의 여정은 끝났다. 유엔 인권이사회가 있는 유엔 제네바 사무소의 상징성 때문에 ‘나비의꿈’은 새벽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인근의 궤뷜레 캠프를 출발해 5시간에 걸쳐 제네바로 왔으며, 행사가 끝나자마자 다시 궤벨레 캠프로 돌아갔다. 여정을 합치면 출발지 파리에서 지금까지 5500㎞ 대장정이었다.
전날 12일엔 ‘나비의꿈’ 5번째 캠페인이 스트라스부르의 노트르담 대성당 앞 광장에서 있었다. 체코 프라하에서 독일 프라이부르크를 거쳐 일행이 도착한 알자스의 주도 스트라스부르는 프랑스와 독일의 패권전쟁 속에서 지배자가 5번이나 바뀐 곳이었다. 알자스인들은 두 나라 어디에도 속하기를 원치 않았고 오로지 ‘알자스’이기를 바랬다. 하지만 두 패권국가 사이에 끼여 있었던 탓에 신성로마제국(독일)에 합병됐다가 프랑스 루이14세 때 프랑스로 귀속되고, 19세기 프랑스-독일 전쟁 때 독일 영토가 되었고, 1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령으로 되었다가, 2차 세계대전 때 다시 독일 나치의 지배를 받았고 종전과 함께 프랑스로 넘어온, 알자스인들에겐 아주 슬픈 땅이었다. 알자스인들은 자신만의 언어가 있고, 온전히 이 말과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런 이들에게 알퐁소 도데의 소설 ‘마지막 수업’은 한 단면, 한쪽의 슬픔만을 그린 것에 불과했다.
유럽인들이 스트라스부르에 유럽연합의 최고 결정기구인 유럽의회를 둔 까닭은 거기에 있었다. 애매한 국경과 권력자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전쟁의 참화를 겪어온 유럽 민중들에게 가장 큰 꿈은 평화였고, 그 꿈이 가장 상징적으로 유린당했으며 그 꿈이 가장 절실한 곳이 바로 스트라스부르였다.
그런 스트라스부르의 역사 때문인지 그곳의 교민은 100여 명에 불과했지만, 나비의꿈 캠페인에 열렬한 지지와 연대를 보내왔다. 이오은 아르데코 교수는 광장에서 캠페인이 열릴 수 있도록 행정적 조처를 사전에 취해줬고, 유학생 김대일씨는 일행의 가이드 역할을 했으며, 멀리 독일 뮌헨에서 찾아온 클레어 함은 연대 발언을 통해 ‘위안부 할머니들의 정의와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지구 반대편 멀리서 온 희망나비’들을 따듯하게 격려했다.
그는 “이런 행사할 때마다 할머니들이 한분씩 줄어드는 게 가슴 아프다”면서 “어떻게 830만 달러로 할머니들의 저 처참하게 짓밟힌 삶을 보상할 수 있고, 반인류 전쟁 범죄를 탕감할 수 있겠는가”고 분개했다. 그는 또 “할머니들의 정의는 단순하다.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 법적 배상, 역사 교과서 수록 및 학교 교육이 그것이다”라면서 “단 한 분이라도 할머니가 생존해 계시는 동안 할머니들의 정의가 이뤄지도록 유럽에서도 연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교민들에게 할머니들은 ‘터지고 깨지고 찢어진 몸으로 우리를 돌보는’ 우리들의 어머니(노트르 담)였다.
제네바·스트라스부르/ 글 곽병찬 기자
chankb@hani.co.kr, 사진 나비의꿈 미디어지원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