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만 고교 현장실습생 “나는 또다른 이군입니다” “매일 11시간 이상 작업…민호 죽음, 나의 일이 될수도” 전문가 “실효성 있는 조사 위해 노조·시민단체 동참해야”
제주에서 현장실습에 나간 특성화고 학생 이민호군이 숨진 다음날인 지난 20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특성화고 재학생과 졸업생을 비롯한 특성화고등학생권리연합회 회원들이 추모 촛불집회를 열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경기도의 한 물류업체에서 현장실습 중인 특성화고 3학년생 홍아무개(17)군은 컨베이어레일 옆에서 일한다. 물건을 상자에 담고 바코드를 찍은 뒤 적재하는 ‘피킹’(picking) 업무다. 상자를 잡을 때 종종 레일에 손이 끼이는 위험한 순간이 적지 않다. 홍군은 “단순 반복 업무에 시달려 집중력이 떨어질 때면 멍하니 아득한 기분이 든다. 그러다 기계에 잘못 빨려들어가면 아예 손이 나갈 수도 있어서 항상 두렵다”고 말했다.
홍군은 출근 첫날 14시간 근무한 뒤 매일 11시간 이상 단순작업을 반복하고 있다. 가끔은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고 실습생만 남아 잔업을 하는 날도 있다. 회사와 학교에 “연장근무는 안 하겠다”고 했지만 “인력재배치가 어려워 어쩔 수 없다”는 답만 돌아왔다.
홍군은 같은 학년 이민호(18)군이 숨진 소식을 듣고 “언제건 내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민호군은 제주도 서귀포시에서 현장실습을 하다가 제품 적재기 프레스에 눌려 숨졌다. 홍군은 “나와 비슷한 환경에서 일한 것 같다. 생각해보면 언제 다쳐도 이상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교육보다 노동이 앞서는 현장실습은 비단 민호군만의 문제는 아니다. 2016년 기준으로 산업체 파견형 현장실습에 참여하는 학생은 약 6만명에 이른다. 전문가들은 현장실습이 학생의 학습 기회가 아니라 산업체의 노동력 확보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성화고 2학년생 이아무개(17)군은 올해 여름 경기도의 한 공구 제조업체로 현장실습을 나갔다. 학교에선 장갑이 기계로 말려들어가 손을 다칠 수 있으니, 드릴로 구멍 뚫을 때는 맨손으로 공구를 잡으라고 배웠다. 하지만 현장 사정은 달랐다. 맨손으로 드릴을 잡으면 자재에서 튀어나온 파편에 손을 베기 일쑤였다. 장갑을 끼지도 벗지도 못하는 상황에 대해, 회사 쪽은 “알아서 하라. 그거 다 지키면 언제 일을 하냐”고 답했다.
서울 한 특성화고에서 회계를 전공하는 이아무개(18)양은 한 판촉업체에 경리 업무를 맡기로 하고 현장실습을 나갔다. 하지만 처음 3일 동안 업무 관련 교육을 받은 뒤 두달째 매일 10~11시간 외부저장장치(USB)를 400~500개씩 포장하는 작업만 반복하고 있다. 이양은 연장근로수당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있다.
학교는 학생들의 노동 조건에 뒷짐을 진 모양새다. 시민단체 청소년유니온이 특성화고 재학생·졸업생 202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현장실습 중 부당대우를 받았을 때 해결을 포기한 이유’(복수응답)로 91명이 ‘학교에서 받을 불이익이 두려워서’를 꼽았다.
충북의 한 골프장 레스토랑으로 서비스직 현장실습을 나갔던 이아무개(18)양은 고객들의 갑질에 석달 만에 실습을 그만두고 학교로 돌아왔다. 이양은 실습중단신청서를 들고 취업 담당 교사, 담임교사, 교감, 교장을 직접 찾아다니며 결재를 받아야 했다. 도장을 하나씩 받을 때마다 “‘사회생활’은 원래 그런 건데 네가 못 버틴 거다”라는 꾸중을 들었다. ‘사회부적응자 복교 프로그램’이라 이름 붙인 프로그램에도 참여해야 했다.
정부는 이달 말부터 12월까지 전국 현장실습 참여 기업 3만여곳에 대한 실태점검을 하겠다고 밝혔다. 이상현 특성화고등학생권리연합회 추진위원장은 “피해 호소는 계속 나오는데 정확히 피해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실효성 있는 실태조사를 위해서는 정부뿐 아니라 시민단체, 노조, 산업계까지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지혜 고한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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