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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4·3 고문으로 굽은 손… 죽은 내 아이를 그 경찰에 넘겼소

등록 2018-05-12 10:05수정 2018-05-13 14:15

[토요판] 4·3 수형인들의 마지막 재판
③ 아이 잃은 엄마 수형인들의 통곡
지난 4월30일 제주지법 앞에서 만난 오계춘(왼쪽)씨가 고문받아 다친 한신화씨의 손을 어루만지고 있다. 김민경 기자
지난 4월30일 제주지법 앞에서 만난 오계춘(왼쪽)씨가 고문받아 다친 한신화씨의 손을 어루만지고 있다. 김민경 기자
재심청구 재판 출석 96살 한신화씨
48년 경찰서로 끌려가 고문받아
천장에 매달려 몽둥이로 매타작
법정 증언하며 서럽게 통곡

같이 잡혀 고아원 보내진 4살 아들
형기 마치고 찾아가니 사망 소식만
오계춘도 이송중 배에서 아이 사망
처음 확인된 군집행지휘서도 주목

“아이고….”

제주도 사투리가 섞인 할머니의 말을 육지 사람들은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한마디 한마디가 표준어 통역을 거쳐야 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통곡과 눈물은 통역 없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70년이 지났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은 나이 들지 않았다.

_________
“몽둥이에 맞아 손가락 부러지고”

한신화(96)씨는 지난 4월30일 휠체어를 타고 제주지법 202호에 도착했다. 제주지법 형사2부(재판장 제갈창)가 이날 오후 2시부터 여는 제주 4·3 군사재판(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형을 선고받고 형무소에 수감된 수형인 18명의 재심 청구에 대한 세번째 심문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아이 엄마였던 한씨는 1948년 10월 경찰서로 갑자기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 두달 뒤 법적 절차도 제대로 밟지 않은 허술한 군사재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전주형무소에 수감됐다. 한씨는 재판 시작 전 만난 오계춘(93)씨의 손을 잡으며 “새색시 같다”고 웃거나, 법원에 온 기분이 어떤지 묻자 “춤추고 싶다”며 어깨춤을 들썩였다. “하나도 긴장 안 한다”던 한씨는 당사자 심문을 받다 고문과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가 나오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1948년 10월 보름쯤에 사시던 가시리 마을에서 불이 나서 아들을 업고 도망갔죠?”(김세은 변호사)

“네살 난 둘째 아들을 업고 도망가서 숨어 있었는데 경찰한테 발각돼서 잡혀갔습니다.”(한신화씨)

“그때 경찰들이 산사람(무장 유격대)들한테 뭘 줬냐고 물었죠?”

“남자들이 찾아와서 고아원에서 아이들이 굶어 죽고 있으니 도와 달라 해서 쌀 한 되를 줬는데, (그것을 유격대에게) 쌀 두 됫박 줬다고 적었습니다.”

1999년 공개된 제주 4·3 수형인 명부 표지. 가운데 큰 글자인 ‘수형인 명부’ 오른쪽에 ‘단기 4281년 12월, 단기 4282년 7월 군법회의분’, 왼쪽에 ‘제주지방검찰청’이라고 적혀 있다. 제주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 제공
1999년 공개된 제주 4·3 수형인 명부 표지. 가운데 큰 글자인 ‘수형인 명부’ 오른쪽에 ‘단기 4281년 12월, 단기 4282년 7월 군법회의분’, 왼쪽에 ‘제주지방검찰청’이라고 적혀 있다. 제주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 제공

“고문받을 때 경찰이 어떻게 했어요?”

한씨는 손가락이 다 구부러진 왼손을 들어 올렸다. “포승줄을 허리 뒤로 묶어서 쌀 두 되 반을 줬다고 말할 때까지 천장에 매달아 놓고 매타작을 했습니다. 정신을 못 차리니까 꾀부린다고 몽둥이로 양손을 내리쳐서 손가락이 부러지고 빠졌습니다. 일어서지 못해 기어 나왔더니 어떤 사람이 헌 수건으로 상처를 감아줘서….”

고문의 기억을 자세히 말하던 96살 할머니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 울었다. “할머니, 대답하실 수 있으세요?” 김 변호사의 말에도 “아이고…” 신음이 나왔다. “매일 취조를 받는데 아이가 굶주려서 다 죽어갔어요. 아예 우리를 죽여 달라고 애원했더니, 어떤 순경이 식당에서 우동 한 그릇을 가져다줬습니다. ‘며칠 굶은 아이에게 갑자기 먹이면 위험하니까 조금씩만 먹이라’고 했어요. 약방에 데려가 약을 사주면서 이걸 바르면 상처가 낫는다고 했는데 너무 고마운 나머지 ‘앞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잘되길 바란다’고 인사했어요.” 울먹거리면서도 한씨는 증언을 이어갔다.

“(법정을 가리키며) 이런 곳에서 재판받으셨어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습니다. 재판 당시 이름은 불렀지만, 저한테 뭘 묻는 사람은 없었어요.”

“재판에서 징역 몇 년이라고 얘기해줬나요?”

“전주형무소에 도착한 다음 옷을 다 갈아입고 난 다음에 간수가 얘기했어요.”

“전주형무소에 둘째 아들하고 같이 갔죠?”

“어멈은 죄가 있어도 아들은 죄가 없으니 아들은 고아원에 맡기라고 했어요. 형기 마치고 아이를 찾으러 갔더니 죽었다고 해서 돌려받지 못하고 제주로 왔습니다.”

“아들을 잃어서 마음이 아프시죠?”

또다시 터진 눈물을 한씨는 고문으로 굽은 손가락으로 연신 훔쳤다. “할머니,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시원하게 하세요.” 재판부가 나섰다. “무슨 말을 이제 와서 하겠습니까.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바람에 (남은) 아이들도 제대로 키우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제 서러움을 알아주세요.”

“스물여섯에 등에 업고 다니던 멀쩡한 애가 죽고 이제 구십여섯살이 됐는데도 그때 죽은 애기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게 아픕니다. 나는 애기 죽은 것만 억울합니다. 재판을 통해서 억울함을 풀어주세요.”

_________
“제 서러움을 알아주세요”

또 다른 ‘엄마 수형인’ 오계춘(호적상 나이는 93살이고 실제 나이는 96살)씨도 1948년 12월 10개월 된 아들을 잃었다. 남편과 아들이 있던 단란한 가정은 1948년 4·3으로 풍비박산이 났고, 학살을 피해 도망갔지만 경찰에 잡혔다.

“매는 맞지 않았다”던 오씨도 한씨와 마찬가지로 법정처럼 생긴 곳으로 끌려갔다. 재판이 끝난 뒤엔 잡혀온 사람들과 한꺼번에 배에 태워졌다. “떠날 때는 내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 전혀 몰랐는데 전주(형무소)에 갔더니 누구는 10년, 누구는 5년, 나머지는 다 1년이라고 했습니다.”

“경찰서 있을 때 아들은 같이 있었습니까?” 박금빛 검사의 질문에 오씨는 “잡혀가서 배 안에서 죽을 때까지 계속 품 안에 안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도망갈 때도, 경찰 조사를 받을 때도, 재판 같지 않은 재판을 받을 때도 오씨가 안고 다녔던 아이는 목포로 가는 배에서 세상을 떠났다. 경찰이 묻어준다는 말만 믿고 죽은 아이를 넘긴 게 영원한 이별이 됐다. 그 뒤로 아이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재심을 청구한 제주 4·3 수형인들의 변호인이 국가기록원에서 제출받은 오영종씨의 ‘군집행지휘서’.
재심을 청구한 제주 4·3 수형인들의 변호인이 국가기록원에서 제출받은 오영종씨의 ‘군집행지휘서’.
“목포로 가는 배에서 아이 엄마가 우는 거 봤어요?”(임재성 변호사)

“네. 죽어서 울었어요.”(박내은씨)

“그분이 오계춘 할머니인가요?”

“네. 방금 진술했던 그 할머니입니다.”

1948년 12월 오씨가 탔던 배에 박내은(87)씨도 한살 난 아들을 데리고 몸을 실었다. “제주항에서 목포항으로 가서 전주형무소에 도착했을 때 애가 까무룩 하게 기절해 있었는데 죽을 세번 떠넣었더니 깨어났습니다.”

지금은 유채꽃 축제로 유명한 제주도 가시리도 군경의 4·3 강경 진압을 피하지 못했다. 가시리에 살던 박씨는 1948년 10월 마을이 전부 불타는 와중에 남편은 잃어버리고 아이만 데리고 산으로 도망쳤다. 사람은 보이는 대로 다 쏘아 죽여버리니까 정신없이 도망가다 보니 산이었습니다”라고 박씨는 말했다.

박씨가 숨어 있던 사이 제주도 경비사령부는 1948년 10월17일 “한라산 일대에 잠복한 매국 극렬분자를 소탕하기 위해 해안선 5㎞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 금지를 포고함.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 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이라는 포고문을 발표한다. 그러나 이 중산간마을 소개령을 듣지 못한 박씨는 계속 숨어 있다 다음달 군인에게 잡혀 경찰서에 갇혔다.

박씨도 불법감금과 고문을 피하지 못했다. “경찰서로 잡혀갔더니 산사람들한테 신발을 몇 켤레 올렸냐, 팬티를 몇 개 올렸냐고 물었는데 내가 쌀 한 되, 돈 5원, 장 한 종지만 줬지 그런 적 없다고 버티니까 바른대로 이야기하라면서 전깃줄을 온몸에 감아 전기고문을 했습니다. 거의 죽을 지경이 돼 기절하니까 눈 오는 추운 겨울에 물을 끼얹어서 깨웠습니다. 살아나니까 천장에 매달아 놓고 방망이로 온몸을 때렸어요.”

그렇게 한달을 경찰서 유치장에 지내다가 1948년 12월 박씨는 높은 법대에 앉은 재판부를 가리키며 “저렇게 앉은 사람들이 있었던 곳”으로 가 재판을 받았다. 그리고 배를 타고 전주형무소에 수감됐다. 징역 1년형이었다.

“전주형무소에서는 무슨 일 했어요?”

“바느질, 재봉틀, 뜨개질도 하고….”

“그때 아들하고 같이 있었죠?”

“같이 있었죠.”

“아들이 오늘 같이 왔나요?”

“네. 살아서 아들이랑 같이 살아요.”

“접니다.”

방청석에 앉아 있던 70대 아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죄가 없이 그런 고문을 받았던 게 억울하고 억울하니 이 원을 풀어주세요. 이게 억울해서 내가 죽어도 눈을 감을 생각이 없습니다.”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 끝나자 재판부가 “아들이 왔다고 해서 깜짝 놀랐는데, 법원에 하고 싶은 말이 있으세요?”라고 물었다. 아들은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재판부 가까이 걸어왔다. “나중에 자식들도 (연좌제로) 피해를 많이 봤습니다. 그런 것들이 마음이 아프죠. 명예회복을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자리로 돌아온 아들은 가만히 눈물을 닦았다.

_________
군사재판 증거 추가 공개

‘엄마 수형인들’의 진술이 쏟아졌던 이날 군사재판의 존재를 입증할 또 다른 증거가 법원에 제출됐다. 당시 군사재판의 판결문이나 재판기록은 분명한 이유도 없이 어느 국가기관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비정상적인 재판이라 판결문도 작성되지 않았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고문이나 불법감금을 당한 경우 청구할 수 있는 형사 재심은 유죄의 확정판결이 있어야 한다. 판결문과 재판기록이 없는데 군사재판의 확정판결이 있다고 할 수 있느냐가 재심 개시 여부 결정의 최대 쟁점이 된 이유다.

지금까지 유일한 기록은 ‘수형인 명부’뿐이었다. 1999년 당시 추미애 새정치국민회의 국회의원이 정부기록보존소(현 국가기록원)에서 제출받아 공개했다. 수형인 명부는 고등군법회의 명령 등 문서 20건의 별지로 첨부돼 있었다. 이 명부에는 1948년 12월 열린 군사재판에서 형법 제77조 내란죄로 처벌된 871명, 1949년 7월 열린 군사재판에서 국방경비법 제33조 간첩죄 등으로 처벌된 1659명 등 모두 2530명의 이름, 주소, 판결, 언도 일자, 형무소 등이 적혀 있었다. 재판에서 변호인은 “재심 청구인들의 이름, 판결 형량 역시 명단에 기재돼 있고 당사자의 진술과 명부 내용이 일치한다”며 수형인 명부가 군사재판을 입증할 자료라고 주장했다. 반면 재판부는 “사후에 위작됐다는 이야기도 있어 이를 바탕으로 재심을 청구하는 게 가능한지가 문제가 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재심을 청구한 수형인 2명의 군집행지휘서가 처음 공개됐다. 변호인들은 4·3 수형인 18명의 관련 자료가 있으면 제출해달라고 국가기록원에 요청했는데, 1949년 군사재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던 오영종(88)·현우룡(93)씨의 군집행지휘서가 확인된 것이다. 지휘서는 4·3 당시 제주군 책임자였던 함병선 수도경비사령부 보병 제2연대장(육군대령)이 대구형무소장에게 형 집행을 요청한 공문서다.

지휘서는 맨 오른쪽에 수형자 이름을 적고 판결언도일, 죄명, 집행명령일, 판결을 적은 뒤 ‘오른쪽 사람은 별지 군법회의와 같이 판결 확정되었사오니 즉시 집행을 요함’이라고 적혀 있다. 변호인들은 ‘별지 군법회의’, ‘판결 확정’이라는 표현과 직인에 주목했다. 수형인 명부가 군법회의 명령의 별지로 첨부돼 있고, 군법회의 명령과 지휘서 모두 함병선 제2연대장의 직인이 찍혀 있기 때문이다. 김종민 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전문위원은 “군사재판은 피해자들의 주장만 있다가 1999년 수형인 명부의 발견으로 존재가 입증됐다. 이번에 수형인 명부 외 군법회의와 관련된 추가 자료가 발굴돼 군사재판의 존재가 재차 인정되고 수형인 명부의 신뢰도도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제주/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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