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4·3 수형인들의 마지막 재판
③ 아이 잃은 엄마 수형인들의 통곡
③ 아이 잃은 엄마 수형인들의 통곡
지난 4월30일 제주지법 앞에서 만난 오계춘(왼쪽)씨가 고문받아 다친 한신화씨의 손을 어루만지고 있다. 김민경 기자
48년 경찰서로 끌려가 고문받아
천장에 매달려 몽둥이로 매타작
법정 증언하며 서럽게 통곡 같이 잡혀 고아원 보내진 4살 아들
형기 마치고 찾아가니 사망 소식만
오계춘도 이송중 배에서 아이 사망
처음 확인된 군집행지휘서도 주목 “아이고….” 제주도 사투리가 섞인 할머니의 말을 육지 사람들은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한마디 한마디가 표준어 통역을 거쳐야 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통곡과 눈물은 통역 없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70년이 지났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은 나이 들지 않았다. _________
“몽둥이에 맞아 손가락 부러지고” 한신화(96)씨는 지난 4월30일 휠체어를 타고 제주지법 202호에 도착했다. 제주지법 형사2부(재판장 제갈창)가 이날 오후 2시부터 여는 제주 4·3 군사재판(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형을 선고받고 형무소에 수감된 수형인 18명의 재심 청구에 대한 세번째 심문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아이 엄마였던 한씨는 1948년 10월 경찰서로 갑자기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 두달 뒤 법적 절차도 제대로 밟지 않은 허술한 군사재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전주형무소에 수감됐다. 한씨는 재판 시작 전 만난 오계춘(93)씨의 손을 잡으며 “새색시 같다”고 웃거나, 법원에 온 기분이 어떤지 묻자 “춤추고 싶다”며 어깨춤을 들썩였다. “하나도 긴장 안 한다”던 한씨는 당사자 심문을 받다 고문과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가 나오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1948년 10월 보름쯤에 사시던 가시리 마을에서 불이 나서 아들을 업고 도망갔죠?”(김세은 변호사) “네살 난 둘째 아들을 업고 도망가서 숨어 있었는데 경찰한테 발각돼서 잡혀갔습니다.”(한신화씨) “그때 경찰들이 산사람(무장 유격대)들한테 뭘 줬냐고 물었죠?” “남자들이 찾아와서 고아원에서 아이들이 굶어 죽고 있으니 도와 달라 해서 쌀 한 되를 줬는데, (그것을 유격대에게) 쌀 두 됫박 줬다고 적었습니다.”
1999년 공개된 제주 4·3 수형인 명부 표지. 가운데 큰 글자인 ‘수형인 명부’ 오른쪽에 ‘단기 4281년 12월, 단기 4282년 7월 군법회의분’, 왼쪽에 ‘제주지방검찰청’이라고 적혀 있다. 제주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 제공
“제 서러움을 알아주세요” 또 다른 ‘엄마 수형인’ 오계춘(호적상 나이는 93살이고 실제 나이는 96살)씨도 1948년 12월 10개월 된 아들을 잃었다. 남편과 아들이 있던 단란한 가정은 1948년 4·3으로 풍비박산이 났고, 학살을 피해 도망갔지만 경찰에 잡혔다. “매는 맞지 않았다”던 오씨도 한씨와 마찬가지로 법정처럼 생긴 곳으로 끌려갔다. 재판이 끝난 뒤엔 잡혀온 사람들과 한꺼번에 배에 태워졌다. “떠날 때는 내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 전혀 몰랐는데 전주(형무소)에 갔더니 누구는 10년, 누구는 5년, 나머지는 다 1년이라고 했습니다.” “경찰서 있을 때 아들은 같이 있었습니까?” 박금빛 검사의 질문에 오씨는 “잡혀가서 배 안에서 죽을 때까지 계속 품 안에 안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도망갈 때도, 경찰 조사를 받을 때도, 재판 같지 않은 재판을 받을 때도 오씨가 안고 다녔던 아이는 목포로 가는 배에서 세상을 떠났다. 경찰이 묻어준다는 말만 믿고 죽은 아이를 넘긴 게 영원한 이별이 됐다. 그 뒤로 아이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재심을 청구한 제주 4·3 수형인들의 변호인이 국가기록원에서 제출받은 오영종씨의 ‘군집행지휘서’.
군사재판 증거 추가 공개 ‘엄마 수형인들’의 진술이 쏟아졌던 이날 군사재판의 존재를 입증할 또 다른 증거가 법원에 제출됐다. 당시 군사재판의 판결문이나 재판기록은 분명한 이유도 없이 어느 국가기관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비정상적인 재판이라 판결문도 작성되지 않았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고문이나 불법감금을 당한 경우 청구할 수 있는 형사 재심은 유죄의 확정판결이 있어야 한다. 판결문과 재판기록이 없는데 군사재판의 확정판결이 있다고 할 수 있느냐가 재심 개시 여부 결정의 최대 쟁점이 된 이유다. 지금까지 유일한 기록은 ‘수형인 명부’뿐이었다. 1999년 당시 추미애 새정치국민회의 국회의원이 정부기록보존소(현 국가기록원)에서 제출받아 공개했다. 수형인 명부는 고등군법회의 명령 등 문서 20건의 별지로 첨부돼 있었다. 이 명부에는 1948년 12월 열린 군사재판에서 형법 제77조 내란죄로 처벌된 871명, 1949년 7월 열린 군사재판에서 국방경비법 제33조 간첩죄 등으로 처벌된 1659명 등 모두 2530명의 이름, 주소, 판결, 언도 일자, 형무소 등이 적혀 있었다. 재판에서 변호인은 “재심 청구인들의 이름, 판결 형량 역시 명단에 기재돼 있고 당사자의 진술과 명부 내용이 일치한다”며 수형인 명부가 군사재판을 입증할 자료라고 주장했다. 반면 재판부는 “사후에 위작됐다는 이야기도 있어 이를 바탕으로 재심을 청구하는 게 가능한지가 문제가 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재심을 청구한 수형인 2명의 군집행지휘서가 처음 공개됐다. 변호인들은 4·3 수형인 18명의 관련 자료가 있으면 제출해달라고 국가기록원에 요청했는데, 1949년 군사재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던 오영종(88)·현우룡(93)씨의 군집행지휘서가 확인된 것이다. 지휘서는 4·3 당시 제주군 책임자였던 함병선 수도경비사령부 보병 제2연대장(육군대령)이 대구형무소장에게 형 집행을 요청한 공문서다. 지휘서는 맨 오른쪽에 수형자 이름을 적고 판결언도일, 죄명, 집행명령일, 판결을 적은 뒤 ‘오른쪽 사람은 별지 군법회의와 같이 판결 확정되었사오니 즉시 집행을 요함’이라고 적혀 있다. 변호인들은 ‘별지 군법회의’, ‘판결 확정’이라는 표현과 직인에 주목했다. 수형인 명부가 군법회의 명령의 별지로 첨부돼 있고, 군법회의 명령과 지휘서 모두 함병선 제2연대장의 직인이 찍혀 있기 때문이다. 김종민 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전문위원은 “군사재판은 피해자들의 주장만 있다가 1999년 수형인 명부의 발견으로 존재가 입증됐다. 이번에 수형인 명부 외 군법회의와 관련된 추가 자료가 발굴돼 군사재판의 존재가 재차 인정되고 수형인 명부의 신뢰도도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제주/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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