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1만원권 120장을 한번 넣어보죠.”(판사)
은행에서 쓰이는 지폐 계수기가 지난 5월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한 법정 ‘증인석’에 등장했다. ‘차르르륵 탁’. 계수기는 지폐 100장을 세더니 6초만에 멈췄다. 나머지 20장은 세어지지 않은 채로 남았다. 반복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계수기를 가져온 은행(원고) 쪽은 안도하는 반면, 피고인 ㄱ씨 쪽은 난감한 표정이었다.
계수기에 희비가 교차한 사연은 지난해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ㄱ씨는 자동차 구매대금을 보내기 위해 서울 서초동의 한 은행 창구를 찾았다. ㄱ씨는 ‘2613만원’을 송금해 달라고 요청했고, 은행 창구직원(텔러) ㅇ씨로부터 확인증도 받았다. 하지만 몇 시간 뒤 ㄱ씨는 은행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2313만원만 냈으니 300만원을 추가로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ㄱ씨도, ㅇ씨도 2613만원이라고 확인했는데 300만원이 ‘공중 분실’된 셈이었다.
ㄱ씨가 300만원 추가송금을 거부하자 은행은 부당이득금 반환소송을 냈다. ‘진실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첫 번째 단서는 입금의뢰서에 적힌 텔러 ㅇ씨의 메모. 의뢰서에는 ‘5만원권 462장, 1만원권 2장, 5천원권 2장(총액 2313만원)’으로 메모했지만, 순간적 착오로 전산에는 총액을 잘못 입력했다는 것이다. 13년차 베테랑 텔러의 실수,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진 것이었을까.
“메모를 고쳤을 수도 있죠. 그 메모를 어떻게 믿습니까!” ㄱ씨 쪽은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사건 당일 수납창구 모습을 담은 시시티브이(CCTV) 녹화영상이 두 번째 단서가 됐다. 영상에서 ㅇ씨는 띠지로 묶인 5만원권을 각 100장씩, 모두 4묶음(400장, 2000만원)으로 만들어 서랍에 넣었다. 나머지 5만원권이 62장(310만원. 은행 주장)인지, 아니면 122장(610만원. ㄱ씨 주장)인지에 따라 승패가 갈리는 상황. 영상에서 계수기는 4.7초만에 멈췄다. 100장 묶음을 셀 때 걸린 6.8초보다 2초 이상 짧은 시간이었다. ㄱ씨 쪽 패색이 짙었다.
“계수기가 100장만 센다는 걸 어떻게 믿나요?” 김씨 쪽이 말 못하는 계수기의 ‘진정성’을 문제 삼고 나오면서, 결국 계수기는 법정 증인석에 불려 나왔다. 법정에서 계수기는 100장이 넘는 지폐를 소화해내지 못했다. ‘차르르륵 탁’, 어김없이 6초마다 멈추는 계수기가 ㄱ씨 쪽은 야속한 눈치였다.
ㄱ씨는 마지막으로 항변했다. “은행 잘못을 왜 고객한테 전가하나요? 저는 변호사 비용이 더 많이 들었어요. 제가 부당이득을 취했다면 일찌감치 돈을 반환했겠죠!”
“돈이 반환되지 않으면 규정에 따라 텔러가 300만원을 변상해야 하는데, 한 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은행 쪽)
텔러 ㅇ씨 과실은 결론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부당이득금 반환소송은 손해배상 청구소송 등과 달리 한쪽의 고의·과실 여부가 금액 산정에 고려되지 않기 때문이다.
현소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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