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파업 당시 강제진압의 기억
내전을 방불케 한 국가폭력의 현장
인도적 의료지원 막고 사쪽 보복 묵인
“수없이 버림받아온 절망에 답하길”
30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가족들이 책임자 차벌과 피해자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2009년 파업 당시 쌍용차 노동자의 아내 이정아씨의 뱃속에 있던 아이는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이 됐다. 이씨는 “시간이 많이 지났고 그때의 기억들도 아스라해졌다”고 했다. 하지만 쌍용차 파업의 아픔은 ‘시간’ 속에 묻을 수 있는 기억들이 아니었다. “제 아픈 기억들이 누구의 책임인지 묻지 않고, 그 사람들이 죗값을 받는 것을 보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이씨는 힘주어 말했다. “정의라는 말 다들 좋아시잖아요. 책임자들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책임만큼만 처벌받고 저희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 가족 7명과 쌍용차 해고자 등 30여명이 30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 모였다. 민갑룡 경찰청장을 만나 쌍용차 파업 진압작전의 책임자 처벌, 피해자의 명예회복 등을 촉구하기 위해서다. ‘경찰청 인권침해 사건 진상조사위원회’(진상조사위)는 2009년 경찰의 쌍용노동차 노조 파업 진압이 ‘이명박 청와대’의 승인 아래 이뤄졌다고 지난 28일 발표했다. 이날 가족들은 쌍용차 가족들이 만 10년이라는 ‘지옥의 시간’을 어떻게 견뎌내고 어떻게 살아냈는지 회한을 쏟아냈다.
해고노동자의 아내이기도 한 심리치유센터 ‘와락’의 권지영 대표는 청와대의 승인 아래 진압작전이 벌어졌다는 진상조사위의 발표가 “개인적으로는 충격적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국가가 앞장 서서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전쟁 때 적군 대하듯 하는 것을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권 대표는 “2009년 남편들을 대신해 원만하게 파업이 해결될 수 있도록 당시 이명박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기도 하고 삼보일배도 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노사가 알아서 할 일이지 대통령은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면서 “그렇다면 끝까지 노사가 알아서 교섭으로 마무리되도록 뒀으면 좋았을 것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권 대표는 “가장 맨 앞에서 노동자들에게 테이저건을, 최루액을, 곤봉과 방패를 쏟아 부었던 경찰의 입장을 오늘 듣고 싶다”면서 “잘못한 사람에게는 합당한 크기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30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가족들이 책임자 차벌과 피해자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2009년 진압 당시 가족대책위 대표였던 해고노동자의 아내 이정아씨는 2009년 느낀 ‘모욕감’이 “어제 일처럼 기억이 난다”고 했다. 2009년 파업 당시 하루도 빠지지 않고 평택 쌍용차 공장을 찾았던 이씨는 그해 6월께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제 아이들은 다섯 살, 일곱 살이었고 저는 임신 중이었어요. 가족대책위와 공장 앞을 지키고 있었는데 회사 쪽 관리자들이 욕설과 함께 ‘너희 때문에 회사가 망하게 생겼다’며 물병을 던졌어요.” 물병에 맞아 아이의 눈에 멍이 들었지만 경찰은 돕지 않았다. “제가 경찰을 붙잡고 지켜달라고 했지만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고 팔을 뿌리쳤습니다.” 그날 이씨는 “우리는 철저하게 국가로부터 버려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경찰 헬기의 저공비행으로 천막을 짓고 공장 앞을 지키던 자신과 아이들이 모래를 뒤집어썼던 기억, 회사쪽 관리자들이 새총으로 ‘주먹만한 볼트’를 천막을 향해 날렸지만 별다른 보호를 받지 못했던 기억들도 ‘국가로부터 버려진 사람’이라는 생각의 근거가 되었다.
파업 당시 의료지원을 했던 이상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공동대표는 당시 상황이 “내전을 방불케 했다”고 떠올렸다. 이 대표는 “우리 단체가 30년이 됐는데 군부정권 시절에도 의료진 접근을 막지 않았다”며 “그런데 정말 유일하게 당시 파업 때는 경찰이 저희의 의료지원을 막았다”고 말했다. 경찰은 의료지원단의 접근을 막았을 뿐 아니라 진입을 시도하는 의사들은 연행해 유치장에 집어넣고 벌금을 부과했다. “의료지원했다고 경찰이 잡아서 벌금까지 부과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고 그 이후에도 없었어요. 그만큼 예외적인 상황이었던 거죠.” 당시 경찰은 진압과정에서 발암물질로 드러난 최루액을 쓰기도 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의 문제제기 이후 더 이상 쓰지 않게 된 최루액이다.
기자회견 말미에는 ‘어느 쌍용자동차 노동자 아내의 편지’가 읽혔다. “수도 없이 반복적으로 버림받은 자들이 습득할 수밖에 없는 무표정한 포기. 그게 우리의 얼굴이고, 우리의 삶이었다. (중략) 우리가 보낸 9년의 세월에 대해 이제 당신들이 대답할 차례다.” 기자회견을 마친 쌍용차 가족들과 해고노동자들은 경찰청에서 민갑룡 경찰청장의 부재로 임호선 경찰청 차장을 면담한 것으로 알려졌다.
글·사진 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