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열린 ‘국가의 가정폭력 대응 강력 규탄 기자회견’ 참석자들이 가정폭력 강력 대응을 촉구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참가자들은 최근 발생한 ‘강서구 전처 살인’ 같은 사건이 가정폭력에 대한 국가의 대응 부실로 발생했다며 재발방지를 위한 강력한 대응 시스템 마련을 촉구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1.
ㄱ씨는 남편으로부터 15년 동안 폭력에 시달렸다. 남편의 폭력으로 갈비뼈 2대가 부러지고, 목이 졸려 기절했다. 도자기 파편에 긁히기도 했다. 구급차에 실려 가는 일은 다반사였다. 그러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ㄱ씨의 말을 듣지 않았다. ㄱ씨에게 묻지도 않고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결론 내리기도 했다. 이혼한 뒤에도 남편의 폭력은 계속됐다. 남편은 ㄱ씨를 “찢어 죽이겠다”며 밤늦은 시간 도어락까지 부수고 집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경찰은 남편과 오래 대화를 나눈 뒤 “아저씨가 불쌍하고 좋은 분인데 왜 이런 일로 경찰을 부르느냐”며 아무 조처 없이 돌아갔다. 경찰뿐만이 아니었다. ㄱ씨의 남편은 검찰 수사 과정에서 “(아내의) 상처는 정신이상으로 인한 자해”라고 거짓말을 했고, ㄱ씨는 “오랜 시간 동안 가정폭력을 당해 항우울증 약을 복용했을 뿐 정신이상이 아니다”라는 진단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검찰은 남편의 말을 듣고 “ㄱ씨의 자작극”이라며 남편을 불기소 처분했다. ㄱ씨의 남편은 결국 상해와 협박 등 여섯 가지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법원은 1심과 2심 모두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이라는 판결을 했다. ㄱ씨는 “가정폭력이라는 범죄 피해자에서, 피해자를 처참하게 밟아버린 경찰, 검찰, 법원으로 인해 저는 더욱 처절한 피해자가 되었다”며 “더이상 저와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ㄱ씨는 현재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치료를 받고 있다.
#2.
ㄴ씨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가정폭력을 당해왔다. 고심 끝에 “나를 지키기 위해”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은 폭력 가해자인 아버지와 ㄴ씨를 분리하지도 않고 아버지의 말을 들은 뒤 되레 ㄴ씨를 나무랐다. “그래도 아빠인데 신고를 하냐”, “아버지 소유의 집인데 같이 있기 싫다고 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ㄴ씨는 경찰에게 “오늘만이라도 아버지와 다른 장소에 있게 해주면 안 되겠냐”고 애원했지만 경찰은 늘 “그게 어떻게 되니”라는 답을 돌려줬다. 어떤 날은 아버지와 경찰이 함께 농담을 던지고 껄껄 웃기도 했다. ㄴ씨는 그 앞에서 “난 사람이 아니냐”고 울부짖었지만, 잠시 침묵이 있었을 뿐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경찰은 그저 ㄴ씨가 어느 학교에 재학하고 있는지 정도만 적고 곧 돌아갔다. 그렇게 경찰이 왔다 간 날 ㄴ씨는 문을 걸어 잠그고 방 밖에서 나는 소리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밤을 꼬박 지새워야만 했다. ㄴ씨는 “(아버지가) 칼을 들이밀고 ‘찔러 죽이겠다’거나 ‘집에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해도 아무 데도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다. 나는 그저 운이 좋아서 살아남은 것”이라고 말했다.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열린 ‘국가의 가정폭력 대응 강력 규탄 기자회견’ 참석자들이 가정폭력 강력 대응을 촉구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참가자들은 최근 발생한 ‘강서구 전처 살인’ 같은 사건이 가정폭력에 대한 국가의 대응 부실로 발생했다며 재발방지를 위한 강력한 대응 시스템 마련을 촉구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690개 여성단체가 가정폭력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수사기관의 대응 시스템을 규탄하며 거리로 나섰다. 한국여성의전화 등 여성단체들은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가정폭력 범죄를 좌시하는 국가가 가해자”라며 “국가는 제대로 된 가정폭력 가해자 처벌을 위해 가정폭력 대응 시스템을 전면 쇄신하라”고 외쳤다.
이들 단체는 서울 강서구 등촌동 주차장 살인사건을 ‘강서구 가정폭력 가해자에 의한 여성살해사건’이라고 명명한 뒤 “폭행과 상해, 스토킹 등 (피해자의) 가정폭력 범죄 신고에 국가는 무대응, 무능력, 무책임으로 일관했다”며 수사기관의 미온적인 대처를 비판했다. 단체들은 “가해자가 25년 동안 폭력을 자행하는 동안 여러 차례 경찰 신고가 있었고, 국가는 분명 폭력을 중단시킬 기회가 있었지만, 가해자의 ‘잘 해결됐다’는 말만 믿고 돌아가거나 ‘다음에 또 그러면 그때 가서 신고하라’며 피해자의 구조 요청을 무시했다”며 “이런 국가를 몸소 경험한 가해자는 ‘너를 죽여도 심신미약으로 6개월이면 감옥에서 나올 수 있다’는 말을 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가정폭력 가해자에 대한 구속 비율은 수년째 1% 안팎에 그치고 있다. 지난해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아 공개한 자료를 보면, 2016년 가정폭력 범죄 검거 건수는 4만5614건으로 2011년(6848건)에 견주어 7배 가까이 늘어났다. 하지만 이 가운데 구속된 이는 약 1%(509명)에 그쳤다. 2011년부터 2016년까지 6년 동안 가정폭력 사범의 구속율도 0.7%~1.5% 수준이었다. 김명진 여성인권실현을위한전국가정폭력상담소연대 준비위원회 준비위원은 “2015년부터 올 6월까지 가정폭력으로 검거된 된 이들 가운데 99%에 달하는 이들이 풀려났다. 구속율은 0.995%로 1%도 되지 않았다”며 “기소율도 8.5%다. 경찰에 신고해도 사실상 거의 처벌이 되지 않고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열린 ‘국가의 가정폭력 대응 강력 규탄 기자회견’ 참석자들이 가정폭력 강력 대응을 촉구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참가자들은 최근 발생한 ‘강서구 전처 살인’ 같은 사건이 가정폭력에 대한 국가의 대응 부실로 발생했다며 재발방지를 위한 강력한 대응 시스템 마련을 촉구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가정폭력 사범의 재범 위험성을 고려해 접근 금지 등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리하는 조처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왔다. 경찰은 가정폭력의 경우 ‘재범 위험성 조사표’를 작성하고 이를 근거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등의 임시 조처를 하고 있다. 하지만 경찰청 통계상 임시 조처를 하는 비율은 평균 10건 가운데 1건(2013~2017년)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가해자와 분리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이에 한국여성의전화 등은 “(재범 위험표를 작성할 때) 가정폭력을 가족 문제로 보고 가해자의 말을 그대로 받아 적거나 흉기 사용 등 폭행의 정도나 빈도가 높음에도 재범 위험성이 높지 않다고 판단했다”며 “가해자를 피해자로부터 확실하게 격리하고, 피해자에게 (처벌 의사를) 묻지 말고 가해자를 처벌하라”고 밝혔다.
한편, 이날 기자회견에는 등촌동 사건 피해자의 친구인 ㄷ씨가 나와 가해자 김아무개씨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촉구하기도 했다. ㄷ씨는 “이혼 뒤 4년 간 살해 위협에 시달린 고인과 가족들의 고통이 너무나 크다”며 “이런 가해자가 약한 처벌을 받아 나중에 출소를 한다면, 친구의 온 식구들은 4년 전의 그 무서웠던 고통 속으로 되돌아갈 것”이라며 피의자 김씨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요구했다. 이날 현장에서는 피의자의 엄벌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피해 여성과 자녀들이 가정폭력을 호소할 때 경찰은 법에 명시된 제대로 된 조치만 했었더라면 피해 여성은 가정폭력에서 벗어나 자녀들과 지금쯤 국가가 말하는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라며 “반복되는 경찰의 가정폭력 대응 시스템의 문제를 바꾸기 위해서는 직무를 방기하고 무성의 무조치 무대응으로 일관한 사건 당시의 경찰을 찾아내어 제대로 징계하고 시스템을 똑바로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신민정 기자
sh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