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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인도 커피 들여와 고생 좀 했지만…아티칸 커피가 한국에 오기까지

등록 2020-02-01 11:21수정 2020-02-02 16:54

[토요판] 서필훈의 얼굴 있는 커피
③인도 남부 아티칸 농장 사람들

예멘 모카항에서 인도로 커피
숨겨온 이슬람 사제 ‘바바 부단’

인도 수라트에 동인도 상관 설립해
커피 무역 시도한 네덜란드인 피터르

야생 무화과나무 빽빽한 정글
아티칸에 커피 농장 만든 모리스

커피가 인도로 가는 길 연 사람들
솔리가 여성 노동자들이 커피 열매를 선별하고 말리는 일을 하고 있다. 서필훈 제공
솔리가 여성 노동자들이 커피 열매를 선별하고 말리는 일을 하고 있다. 서필훈 제공

내 이름은 부단이다. 나는 인도 남부 찬드라기리 지역에서 이슬람 수피교 사제로 일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제라는 의미의 ‘바바’를 붙여 나를 ‘바바 부단’이라고 부른다. 열 달 전 메카로 순례를 시작했고, 이제 인도로 돌아가기 위해 지난 3주간 예멘의 항구 도시 모카에 머물고 있다.

오늘은 모카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다. 잠이 오지 않는다. 저녁에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서일 수도 있고, 내일 아침 내가 도모하려는 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 코란의 율법은 도둑질하지 말라 가르쳤고, 나는 평생 그 말씀을 지켜왔다. 하지만 나는 내일 어쩌면 도둑질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모카는 커피 재배와 무역을 독점하며 엄청난 부를 거둬들이고 있다. 이곳 총독은 커피 씨앗이 외부로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수출용 커피는 살짝 삶아 싹이 틀 수 없게 해서 팔고, 모카를 떠나는 모든 배와 사람을 철저히 검색하고 있다.

무굴제국이 기울고 있다. 우리는 무슬림이지만 오랫동안 힌두교를 믿는 이웃들과 잘 지내왔다. 하지만 새로운 황제가 힌두교를 종교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힌두교도들은 힘을 모아 제국군에 대항했고 무슬림을 살던 곳에서 쫓아냈다. 나와 신앙 공동체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는 마을을 떠나 찬드라기리 깊은 산속 동굴로 피신했다. 언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고, 불안해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사제로서 아무런 미래도 보여줄 수 없었다. 괴로웠다. 나는 사람들에게 메카로 가서 알라의 뜻을 듣고 오겠다며 서둘러 순례길에 올랐다. 하지만 이런 내 결정이 현실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에 대한 부끄러움과 그로부터의 무책임한 도피가 아니었노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메카에서 보낸 시간은 무엇보다 큰 위로와 믿음을 주었다. 돌아가면 불안한 마음을 떨치고 예배와 기도에 더 집중하려고 한다. 우리는 보통 낮에는 일하고 밤에 모여 늦게까지 예배를 드린다. 아무래도 일에 지치다 보니 졸거나 집중하지 못하는 동료가 많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커피를 마시면 밤에도 피곤하지 않고 눈이 맑아졌다. 나는 위기에 처한 우리 신앙 공동체와 가난한 이웃들에게 커피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날이 밝아온다.

수라트에서 무역을 시작할 수 있을까?

내 이름은 피터르 판덴브루커다. 나는 가난 때문에 어릴 때부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선원보조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여러 번의 아프리카 항해, 전투 참여, 난파를 경험하며 승진했고 지금은 무역 선단의 대표 상인이자 선장이다. 나는 아라비아와 아시아에 새로운 항로를 열고, 커피와 향신료 무역을 개척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올해(1616년) 모카에 입항했다.

모카는 커피 재배와 커피 무역의 중심지로서 아라비아반도에서 가장 번성한 항구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모카에서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모카 총독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지만, 상관(외국인이 경영하는 큰 상점) 설립은 허가하지 않았다. 실망이 크다. 나를 믿어준 본국에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막막하다. 망망대해를 오가며, 가보지 못한 세계의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선단의 안전을 지키며, 새로운 교역로를 개척하고 지속적인 수익을 내는 결정을 이어가기란 무척 힘든 일이다. 사업은 나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일투성이다. 그리고 마침내 실패라는 재판정 앞에 서 있다.

나는 인도로 가려고 한다. 그곳은 지난 세기부터 포르투갈이 강력한 함대를 기반으로 모든 향신료 무역을 장악하고 있는 곳이다. 인도는 풍요로운 땅인 만큼 늘 전운이 감돈다. 하지만 나에겐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내일 아침 모카를 떠나 인도 북부의 주요 무역항인 수라트로 간다. 소문에 따르면 인도 고아주 남쪽 어딘가 커피를 재배하는 곳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고아주는 포르투갈이 지배하고 있어서 정박할 수가 없다. 과연 수라트에서는 커피 무역을 제대로 시작할 수 있을까. 나는 어젯밤 선원들을 모아놓고 인도는 희망과 기회의 땅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큰 함성으로 호응해줬다. 모카에서 가져온 커피는 소문대로 아주 근사하다. 이토록 잠이 오지 않는 것이 커피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해무가 걷히고 있다. 아침이다.

야생동물 보호구역 안의 아티칸 농장은 ‘무화과 숲’이라는 뜻인데, 방문할 때마다 농장 매니저는 새로 찍은 호랑이 사진을 보여줄 만큼 깊은 산속에 있다. 1888년 모리스가 시작한 이 농장은 현재 아파두레이와 함시니 부부가 운영하고 있다. 서필훈 제공
야생동물 보호구역 안의 아티칸 농장은 ‘무화과 숲’이라는 뜻인데, 방문할 때마다 농장 매니저는 새로 찍은 호랑이 사진을 보여줄 만큼 깊은 산속에 있다. 1888년 모리스가 시작한 이 농장은 현재 아파두레이와 함시니 부부가 운영하고 있다. 서필훈 제공

다시 경외하는 적들의 아티칸으로

내 이름은 랜돌프 헤이턴 모리스다. 1858년 스코틀랜드에서 목사 아들로 태어났다. 18살에 선원이 되어 배를 탔고 이듬해 인도에 도착했다. 나는 아직도 내가 일하던 닐기리산 정상에서 빌리기리의 푸른 숲을 처음 보고, 알 수 없는 감흥에 가슴이 벅차오르던 날을 기억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빌리기리에 커피 농장을 만들면 어떻겠냐고 물었더니 모두가 만류했다. 실제로 빌리기리 숲속에 커피 농장을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아름드리 야생 무화과나무들로 빽빽한 정글을 일궈 커피나무를 심는 것도,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자신들만의 언어를 사용하며 반유목 생활을 하고 있던 솔리가 부족과 함께 농사일을 하는 것도 녹록지 않았다.

공들여 커피 묘목을 심어놓으면 코끼리와 들소, 노루, 멧돼지들이 헤집어놓았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제대로 된 집이 없어 텐트에서 살아야 했는데, 밤마다 야생동물의 기척에 쉬이 잠들 수 없었다. 불안과 희망이 영혼의 양면이라는 생각을 불면의 밤들을 통해 깨달아나갔다. 그래도 시간이 빨리 지나갔다. 농장은 이제 제법 자리 잡았고 해마다 조금씩 더 넓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몇 년 후 내게 큰 시련이 닥쳤다. 친구와 함께 농장을 거닐다가 엄청나게 큰 들소와 정면으로 마주친 것이다. 친구는 놀라서 허겁지겁 총을 쐈지만 빗나갔고 화가 난 들소는 돌진해 나를 뿔로 받았다.

나는 오른쪽 가슴을 들소의 커다란 뿔로 등까지 관통당하는 큰 상처를 입고 쓰러졌다. 의식이 돌아왔을 때 나는 이미 가망이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사방이 내 피로 흥건했다. 그때 솔리가 족장이 내게 이 숲을 지키는 힌두교의 소 신에게 생명을 의탁하고 기도해보자고 했다. 나를 공격한 들소는 그 신이 보낸 전령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고 과학의 힘을 믿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무런 의심 없이 그의 말을 따랐다. 눈을 감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족장의 기도 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잦아들었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다시 눈을 떴을 때, 마이소르주에서 달려온 영국인 의사가 놀랍다는 듯이, 대단한 기적이라며 신이 도왔다고 말했다. 나는 그 신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몇 달 후 간신히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후속 치료를 위해 영국으로 돌아갔다. 의사는 오른쪽 폐가 기능을 잃었으니 조신하게 살라고 충고했다. 늘 숨이 가쁘다. 빈약한 들숨과 날숨 사이마다 보잘것없는 내 목숨이, 나의 실존이, 신의 가호가 느껴졌다. 이제 내가 농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하지만 안락한 고향 집 침대에 누워 있으니 그곳은 내 관처럼 느껴졌다. 빼곡한 나뭇잎 사이를 뚫고 비추는 햇빛, 그 아래 자라고 있는 커피나무, 그리고 내가 경외하는 적들의 포효로 가득한 아티칸을 한시도 잊을 수 없었다. 그곳이 내가 머물고 내가 죽을 곳이라는 생각만 더욱 또렷해졌다. 서둘러 짐을 싸서 인도행 배편에 올랐다. 이 배는 엊그제 수에즈운하를 지나 예멘을 통과하고 있다. 내일 밤 정도면 아라비아반도를 벗어나 인도양으로 들어갈 것이다. 나는 인도로 가는 길이다.

아티칸 농장에서 현지인 솔리가 여성이 커피 열매를 따고 있다. 서필훈 제공
아티칸 농장에서 현지인 솔리가 여성이 커피 열매를 따고 있다. 서필훈 제공

인도 커피 들여와 고생 좀 했다

내 이름은 서필훈이다. 나는 장사꾼이다. 해마다 수확 철이 되면 커피 산지를 방문한다. 농장의 작황과 품질을 살피고, 한 해 필요한 양을 정확하게 예측해 좋은 가격으로 커피를 사고 싶다. 지역에 따라 수확 시기가 조금씩 다르기도 하지만 나는 지난 10년 동안 해마다 인도를 가장 먼저 방문했다. 인도와 그곳의 커피는 처음부터 내게 각별했지만, 인도는 국내에 잘 알려진 커피 산지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관심이 없었고 처음 몇 년 동안은 인도 커피를 들여왔는데 잘 팔리지 않아 고생 좀 했다. 인도는 2018년 기준 세계 7위의 커피 생산국이다.

인도에 처음 커피가 전래된 것은 16세기다. 바바 부단이 모카에서 커피 씨앗 7개를 몰래 숨겨 나오는 데 성공했다. 그는 찬드라기리 인근에 커피를 심었고 커피 재배는 성공적으로 인도 남부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후대 사람들은 찬드라기리를 그의 이름을 딴 ‘바바 부단기리’로 바꾸었고 지금도 그곳에는 바바 부단의 묘가 남아 있어 많은 사람이 방문하고 있다. 그는 당시에도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모두에게 존경받는 사제였고, 지금도 종파를 초월해 성인 대우를 받고 있다. 한편, 1699년 네덜란드인은 인도에서 인도네시아 자바로 커피나무를 가져가 심었고, 자바는 곧 세계 최대의 커피 산지가 되었다. 1700년대 자바와 모카는 가장 유명한 커피 산지였고 이 두 지명은 지금도 여전히 커피의 동의어로 쓰인다.

커피 원산지는 에티오피아지만, 처음으로 커피가 경작되고 전세계에 이름을 알린 것은 예멘, 아라비아반도를 벗어나 최초로 커피를 재배한 곳은 인도, 그리고 인도에서 커피 씨앗을 훔쳐내 전세계로 퍼뜨린 것은 네덜란드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쉽게 커피를 거래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피터르 판덴브루커는 1616년 네덜란드인 최초로 예멘을 방문했지만 모카와의 본격적인 커피 교역에는 실패했다. 그는 모카에서 물러나 인도의 국제무역항인 수라트에 동인도회사 상관을 설립했다. 피터르는 이곳에서 다시 한번 커피 무역을 시도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모리스는 들소에 받혔다가 기적적으로 되살아났다. 그가 죽은 뒤 아내 마리벨은 모리스가 들소에게 받힌 뒤 힌두의 소 신에게 기도했던 자리에 그 신을 모시는 작은 제단을 만들었는데, 아직도 사람들은 지나며 인사하고 간다. 서필훈 제공
모리스는 들소에 받혔다가 기적적으로 되살아났다. 그가 죽은 뒤 아내 마리벨은 모리스가 들소에게 받힌 뒤 힌두의 소 신에게 기도했던 자리에 그 신을 모시는 작은 제단을 만들었는데, 아직도 사람들은 지나며 인사하고 간다. 서필훈 제공

모리스는 아티칸 숲이 되었다

지금까지 전세계 수백개 커피 농장을 다녔지만 나는 아직도 인도 남부 카르나타카주의 아티칸만큼 아름답고 신비한 곳을 보지 못했다. 아티칸 농장은 ‘무화과 숲’이라는 뜻인데 깊은 산의 야생동물 보호구역 안에 있어서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휴대전화도 연결되지 않는다. 이 농장은 사람이 일군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형성된 느낌이다. 내가 방문할 때마다 농장 매니저는 새로 찍은 호랑이 사진을 보여준다. 현재 아티칸 농장은 아파두레이와 함시니 부부가 운영하고 있다. 이 농장은 1888년 모리스가 시작했고 그가 지은 집은 130년이 지난 오늘도 건재하다.

집에는 모리스의 사진과 의자, 유품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마치 그가 얼마 전까지 이곳에 머물렀던 것처럼. 당시 모리스는 들소에 받혀 크게 다쳤는데 기적적으로 살아났고 20여년을 더 살다가 죽어 그가 바란 대로 아티칸 농장 한켠에 묻혔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아내 마리벨은 모리스가 들소에게 받히고 힌두의 소 신에게 기도했던 자리에 그 신을 모시는 작은 제단을 만들었다. 나는 모리스를 기리는 제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아직도 그곳을 지날 때마다 모자를 벗고 고개 숙여 인사한다. 현재 모리스의 묘 옆에는 그의 아내, 딸, 집에서 일을 돕던 집사가 함께 묻혀 있다. 솔리가 부족은 아직도 그가 이 숲속을 거닐고 있다고 믿는다. 모리스는 죽어서 아티칸 숲이 되었다. 바바 부단과 피터르, 모리스에게 인도와 커피는 어떤 의미였을까? 그리고 나에게는? 나는 지금 그들이 거닐고 있는 인도로 가는 길이다.

▶ 서필훈: 커피 리브레 대표. 15년 전 핸드 드립 전문점에서 바리스타로 시작해 현재는 로스팅과 생두 사는 일을 맡고 있다. 커피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본다. 아름다움과 참상, 희망이 한데 뒤섞여 있기는 매한가지다. 한 잔의 커피 뒤에 숨겨져 있는, 커피를 생산하고 가공한 사람들의 얼굴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일에 관심이 있다. 4주에 1번 연재.

아름답고 신비한 나무들 사이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아티칸 농장 풍경. 서필훈 제공
아름답고 신비한 나무들 사이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아티칸 농장 풍경. 서필훈 제공

인도 아티칸 농장의 커피 노동자. 서필훈 제공
인도 아티칸 농장의 커피 노동자. 서필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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