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서필훈의 얼굴 있는 커피
⑬ 파나마 게이샤 커피
2004 베스트 오브 파나마 1위 게이샤
일반 스페셜티보다 10배 이상 비싸
상류층 소유한 대농장 중심 생산
실제 소농들은 큰 위험 감수해야
게이샤 마케팅이 만든 신기루인가
맛있고 복잡한, ‘천의 얼굴’ 가져
⑬ 파나마 게이샤 커피
2004 베스트 오브 파나마 1위 게이샤
일반 스페셜티보다 10배 이상 비싸
상류층 소유한 대농장 중심 생산
실제 소농들은 큰 위험 감수해야
게이샤 마케팅이 만든 신기루인가
맛있고 복잡한, ‘천의 얼굴’ 가져

게이샤가 얼마나 과즙이 풍부한지 보여주겠다며 열매의 즙을 짜서 보여주는 호세. 서필훈 제공

손으로 기계를 돌려 커피 열매 껍질을 까는 호세. 서필훈 제공
대담하고 적극적인 대농장주들 나는 2010년 엘살바도르와 니카라과를 시작으로 산지 커피 농장과 다이렉트 트레이드를 여러 나라로 넓혀갔지만 파나마는 빠져 있었다. 일반 스페셜티 커피 생두보다 최소 10배 이상 비싼 파나마 게이샤를 팔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단 방문해서 여러 가능성을 타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2016년 처음 파나마로 떠났다. 아우로마르 농장은 치리키주 북서부 산속에 있다. 코스타리카 국경에서 2㎞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농장의 전체 면적은 30헥타르지만 절반은 숲으로 보전하고 있고 커피나무들도 원래 있던 나무들 아래에서 자라고 있다. 농장주 로베르토는 다양한 동식물이 잘 살 수 있는 지속 가능한 환경에서 커피를 기르는 것이 자신의 중요한 가치라고 말했다. 그는 70대라고는 보이지 않는 단단한 체구와 강렬한 눈빛을 갖고 있었다. 로베르토는 아이비리그를 졸업하고 파나마 중앙은행장을 역임한 파나마 금융계의 거물이었다. 80년대 노리에가 군사정권에 밉보여 한동안 고국을 떠나 있기도 했다. 그는 철인경기 마니아로 아직도 현역이라며 자랑했다. 그는 농장과 파나마시티를 오가며 지내고 농장 관리는 이웃 농장주가 담당하고 있다. 누구오 농장은 원시림 사이로 난 비포장 산길을 한참 올라간 뒤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누구오의 농장주 호세는 아마도 이곳이 파나마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게이샤밭일 거라고 말했다. 고도계는 2030m를 가리키고 있었다. 기온이 너무 낮거나 일조량이 부족하지만 않다면 커피 재배는 고도가 높을수록 품질에 유리하다. 그의 농장은 규모도 작고 나무도 듬성듬성 심어놔서 농장이 아니라 텃밭 같은 느낌이었다. 농장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고, 발전기도 없었다. 가공설비도 커피 껍질 까는 수동 펄퍼가 전부였는데 그가 손으로 손잡이를 계속 돌려야 했다. 껍질을 깐 커피 씨앗은 발효를 통해 과육을 제거해야 하는데 보통 시멘트로 만든 탱크를 사용한다. 하지만 호세는 그마저도 없어서 낡고 작은 나무 상자들에 담아 발효시키고 있었다. 농장 한쪽에는 발효가 끝난 커피를 말리는 건조장이 있었는데 커피에 곰팡이가 하얗게 슬어 있었다. 이유를 물으니 높은 고도 때문에 기온이 낮아 커피가 잘 마르지 않는다고 했다. 농장을 둘러본 뒤 호세는 갑자기 커피를 마시지 않겠냐고 물었다. 내가 뜨거운 물이 있냐고 되물었더니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그는 갑자기 우리가 타고 온 픽업트럭에 시동을 걸고 보닛을 열더니 배터리에 충전용 케이블을 물리고 뒷좌석에서 꺼내 온 전기 포트에 연결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무슨 문제인지 전기 포트는 작동하지 않았다. 나는 맛있는 커피를 함께 마신 걸로 하자고 호세를 위로했다. 부족한 것이 많은 누구오 농장의 호세는 내가 파나마에서 만난 사람 중 가장 밝은 미소를 갖고 있었다.

아우로마르 농장의 게이샤 열매. 서필훈 제공

응고베부글레족 아이들이 커피 수확을 하는 부모님 곁에서 놀고 있다. 서필훈 제공
게이샤 둘러싼 그들만의 리그 파나마는 다른 중남미 커피 생산국가들과는 달리 소농 및 조합을 찾아보기 힘들다. 소수가 존재하지만 대농장들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는다. 치리키에는 응고베부글레라는 인디오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데 이들은 소규모 커피 농장을 운영하거나 커피 농장 수확 노동자로 일한다. 커피 수확철이 되면 인근 코스타리카로 넘어가 계절 노동자로 일하다가 돌아오는 경우도 많다. 파나마에서 원주민이 소유한 게이샤 농장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원주민 소유의 커피 농장은 투자, 영농 지식, 설비, 마케팅, 병충해 방제 능력, 해외 바이어와의 교류가 부족해 이들이 생산한 대부분의 커피는 대형 커피 수출업체에 낮은 가격에 팔린다. 내가 파나마에서 만난 유명한 농장주는 게이샤가 낮은 커피 가격에 허덕이는 많은 커피 생산자에게 고부가가치 커피 생산을 통한 수익 증대를 가져다준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현실은 다르다. 오랫동안 게이샤 씨앗은 파나마 내에서도 친한 대농장들끼리만 공유됐다. 이들은 게이샤 씨앗을 다른 국가의 명품 농장들이 가진 귀한 품종, 영농 비결과 교환하기도 했다. 덕분에 해외에 잘 알려진 스페셜티 커피 농장이 많은 코스타리카와 과테말라에는 게이샤가 일찍 도입되어 퍼졌고 최근 두 나라 컵 오브 엑셀런스에서 입상하는 커피 상당수가 게이샤다. 하지만 온두라스나 니카라과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가난한 산지에서는 게이샤를 기르는 농장이 아직도 손에 꼽을 정도다. 이렇게 게이샤를 둘러싼 그들만의 리그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은 게이샤를 독점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이익이 상당하다는 방증이다. 게이샤는 씨앗 구하기도 힘든데다 수확량이 적고 몇몇 병충해에 매우 취약하다. 소농이 게이샤를 심었다가 병충해에 걸려 나무가 죽으면 묘목을 새로 심어야 하고 첫 수확을 기다리는 3~4년간 수입이 없어지는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소농들은 게이샤가 커피 생산자 모두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현재 파나마 게이샤는 국제 커피 거래 기준 가격의 약 30배에 거래되고 있다.

호세가 차량 배터리와 전기 포트를 연결한 모습. 서필훈 제공

게이샤나무 옆의 로베르토. 서필훈 제공
▶ 서필훈 커피 리브레 대표. 15년 전 핸드 드립 전문점에서 바리스타로 시작해 현재는 로스팅과 생두 사는 일을 맡고 있다. 커피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본다. 아름다움과 참상, 희망이 한데 뒤섞여 있기는 매한가지다. 한 잔의 커피 뒤에 숨겨져 있는, 커피를 생산하고 가공한 사람들의 얼굴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일에 관심이 있다. 4주에 1번 연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