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에서 처음 보는 여성을 폭행하고 달아난 이아무개(32)씨가 지난 4일 서울 용산경찰서에서 구속 전 피의자심문 출석을 앞두고 추가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지방철도경찰대로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법원이 서울역에서 30대 여성을 다짜고짜 폭행한 30대 남성에 대한 구속영장을 “긴급체포가 위법했다”는 이유로 기각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피해자 쪽은 반발하고 있고, 이 남성을 체포한 철도특별사법경찰대(특사경)는 “극단적 선택 등을 우려해 불가피하게 체포했다”고 해명하고 나섰다.
특사경은 5일 설명자료를 내고 “피의자인 이아무개(32)씨가 불특정 다수에게 몸을 부딪치는 등 비정상적인 행동을 해서 제2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신속히 검거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며 “이씨가 체포 당시 주거지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문을 두드리고 전화를 했으나, 휴대전화 벨소리만 들리고 아무런 반응이 없어 도주 및 극단적 선택 등 우려가 있어 불가피하게 체포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이씨는 지난달 26일 오후 1시50분께 공항철도 서울역에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여성 ㄱ(32)씨에게 다가가 어깨를 부딪치며 느닷없이 욕설한 뒤 주먹으로 ㄱ씨를 폭행한 혐의를 받는다. ㄱ씨는 이 폭행으로 쓰러지면서 바닥에 머리를 부딪쳤고, 왼쪽 광대뼈가 골절됐다. ㄱ씨는 왼쪽 눈 옆도 1.5㎝가량 찢어졌다는 진단을 받았다. 아울러 이씨는 지난 2월 서울 동작구에 있는 집 근처 건널목에서 보행 신호를 기다리던 행인에게 욕설을 퍼붓고 침을 뱉은 혐의(폭행)로 동작경찰서에 입건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중앙지법 김동현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4일 이씨의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친 뒤 “긴급체포가 위법한 이상 그에 기초한 구속영장 청구는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특사경이 체포영장 없이 이씨의 집에 들어가 체포한 것으로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긴급체포는 피의자가 사형·무기 또는 장기 3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에 해당하는 죄를 범했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을 때 법원의 영장 없이 피의자를 체포하는 절차다. 김 부장판사는 “긴급체포 제도는 영장주의 원칙에 대한 예외인 만큼 형사소송법이 규정하는 요건을 모두 갖춘 경우에 한해 허용돼야 한다. 수사기관이 피의자의 신원과 주거지 및 휴대전화 번호 등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고, 피의자가 주거지에서 잠을 자고 있어 도주하거나 증거를 인멸할 상황도 아니었던 점 등을 감안하면 피의자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받을 시간적 여유가 없어 즉시 피의자 주거지의 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가 피의자를 긴급체포하고 압수수색을 실시할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며 기각 사유를 밝혔다. 김 부장판사는 또 “한 사람의 집은 그의 성채라고 할 것인데, 비록 범죄 혐의자라 할지라도 헌법과 법률에 의하지 않고는 주거의 평온을 보호받음에 있어 예외를 둘 수 없다”고 덧붙였다. (▶관련 기사 :
서울역 폭행 피의자 구속영장 기각…법원 “위법한 긴급체포”)
피해자 ㄱ씨 가족 트위터. 트위터 화면 갈무리
이를 두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선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피해자 언니라고 밝힌 한 누리꾼은 법원의 기각 판단 직후 트위터에 글을 올려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은 잠도 못 자고 불안에 떨며 일상이 파괴됐는데, 가해자의 수면권과 주거의 평온을 보장해주는 법이라니 대단하다. 제 동생과 추가 피해자들을 보호하는 법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느냐”며 “덕분에 이제 피해를 고발했던 우리들은 두려움에 떨게 됐다”고 했다.
김면기 경찰대 법학과 교수는 <한겨레>에 “법원의 기각 사유에 ‘성채’라는 표현은 ‘캐슬(성채) 독트린’을 지칭한 것인데 이는 집은 한 사람의 성채로 보호받아야 하는 의미지만 집주인을 범죄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며 “범죄자의 집(성채)을 무한정 보호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특사경은 “법원의 기각 사유를 검토한 뒤, 법과 원칙에 따라 여죄 등을 철저하게 수사하겠다”고 밝혔다.
이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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