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간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19 탓에 많은 자영업자들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듯 이 어두운 터널을 모두 함께 웃으며 지날 수 있기를. 게티이미지뱅크
“다음주에 밀린 월세 조금씩 보낼게. 이제야 상황이 조금 풀릴 거 같아.”
“여유 되는 만큼 보내. 몸조심하고.” 성재와의 기묘한 동행이 7년째 이어지고 있다. 2015년 잠깐 특강을 나갔던 고등학교에서 성재를 만났다. 학생들의 건강을 챙겨달라는 어떤 교사의 간곡한 연락을 받고 방문했던 혁신학교였다. 성재가 속한 반은 ‘대안반’으로 크고 작은 사고를 쳤던 학생들이 정규 교과 과정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견문을 넓힐 수 있도록 조직된 별도의 학급이었다. 한 학기 수업을 진행하기로 했는데 학교에 가면 반은 빈자리였고, 남은 이들 중 몇몇은 자고 또 몇몇은 휴대전화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 소수의 학생들이 서툰 외부강사를 안쓰러운 듯 응대해줬다.
어차피 가르칠 것도 마땅치 않았다. 수업보다 우정을 쌓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학교 밖에서 학생들을 만나니 더 친해졌다. 그때 성재는 고교 2학년이었고 나는 주민들과 어울리며 모임·축제·행사 등 지역공동체 일을 닥치는 대로 하던 시절이었다. ‘마을’을 중심으로 활동을 해보겠다며 상가에 딸린 반지하 작은 집을 구했고 이곳에 비싼 월세를 감당하기 어려운 ‘동네 청년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성재는 ‘건강의 집’이라고 이름 붙인 우리 반지하 공동체에 매일 드나들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잦은 다툼 때문이었을 것이다. 숙식도 함께하기로 했다.
청년들과 함께한 공동체는 운이 따랐다. 응원하는 시민들이 출자한 보증금으로 몇명의 청년은 ‘청년 사회주택’으로 분가를 하기도 했다. 협동조합 기업을 설립하고, 지역의 축제행사를 기획·운영하는 등 나름의 일거리를 계속 만들어냈다. 우리는 좋은 직장, 좋은 집, 경제적 성취가 아니라 적당히 가까운 관계를 바탕으로 한 ‘찌질한’ 일상 속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그 반지하 공간 ‘건강의 집’에서 성재와 나는 여전히 함께 산다.
성재도 그사이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휴대전화 가게 일, 퀵 배송 등 여러 일을 전전했지만 그는 한결같이 성실했다. 그리고 2년 전 아버지와 곱창집을 열고 젊은 사장님이 됐다. 나름대로 의젓하게 자리를 잡아가나 싶었다. 그 와중에 코로나19가 터졌다. 지난 1년간 대다수 자영업자의 삶이 그러하듯 성재의 삶도 허덕였다. 가게 임대료 등 유지하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성재는 포기하지 않았다. 강추위가 기승을 부린 겨울, 밤 9시까지는 가게 일을 보고 새벽 배송에 2차 배송까지 뛰었다. 두달이 넘도록 낮과 밤이 뒤바뀐 일을 해왔다. 건강이 염려될 정도였다. 그 와중에 밀린 월세를 내겠다고 연락을 한 것이다. 월세는 서로의 책임이라고 생각해 분담해왔지만 큰 액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또한 코로나를 버텨내고 있는 성재의 사정이 나아졌다는 분명한 징후였다. 그래서 더 반가웠다.
지금 내가 남의 집을 드나드는 의사가 된 건 함께 살며 동고동락한 성재와 벗들 덕분이다. 그들과 함께한 삶 속에서 지금의 일을 용기 있게 시작할 수 있었다. 어려운 시기를 버텨준 성재가 고맙다. 코로나19가 끝날 때까지 그저 성재가 다치지 않고 그와 가족의 삶을 지키기를. 아직은 끝이 어떻게 날지 모르지만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듯 우리 모두 어둡고 긴 터널을 무사히 지날 수 있기를.
찾아가는 의사 홍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