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맥주의 맛과 향은 좋은 효모를 쓰느냐에 달려있다. 오비맥주 광주공장 내부 모습.
[매거진 Esc] 백우현 공장장과 맥주의 시대 ⑤
풍부함 위해 10분간 따르거나, 오래 유지하는 방법만 연구한 책도 나와
핀란드인 친구 니코와 한 조가 돼 만든 맥주가 콘테스트에서 1등으로 뽑혔습니다. 덕분에 <브라우벨트>라는 유명한 술 잡지에 저희 사진도 실렸습니다. 브라우벨트는 ‘양조 세계’라는 뜻입니다. 오로지 기숙사에 있는 도구만 이용해 맥주를 만들었습니다. 일단 맥주의 원료인 맥아를 샀습니다. 맥아만 따로 파는 회사가 많아 구하기 쉬웠습니다.
맥아는 보리에 싹을 틔운 뒤 싹을 잘라내 말린 것입니다. 영어로 ‘몰트’(malt)입니다. 몰트 위스키의 그 몰트입니다. 맥아를 발효시키면 맥주요, 증류주를 만들면 위스키가 됩니다. 서로 다른 맥주의 맛과 향은 맥아 자체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맥아를 말리는 과정에서 달라집니다. 더 많이, 더 오래 볶을수록 맥주의 색이 짙어집니다. 가령 맥아를 완전히 태워서 맥주를 만들면 흑맥주가 됩니다. 그러나 볶는 데도 기술이 있어서 무조건 태우면 안 됩니다.
절대 안 주는 효모를 구하다
문제는 효모였습니다. 발효를 위해 효모를 넣어야 하는데 효모를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사실 맥주의 맛은 효모가 크게 좌우합니다. 효모는 잿빛을 띠는 죽처럼 생겼는데, 어떤 효모를 쓰느냐에 따라 풍미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모든 맥주회사에서 효모는 절대 외부에 반출할 수 없는 극비에 해당합니다.
니코와 저는 좋은 효모를 구하려고 발에 땀이 나도록 돌아다녔습니다. 니코가 먼 친척의 지인인 한 맥주 회사의 ‘브루마스터’(맥주 양조 장인)를 찾아갔습니다. “머나먼 독일 땅에 맥주를 공부하러 왔다”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브루마스터는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저와 니코는 오후 늦게까지 회사 앞에서 그 브루마스터가 퇴근하기를 기다렸습니다. 걸어 나오는 브루마스터의 팔을 낚아채서 곧장 근처 맥줏집으로 끌고 갔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가 학교 맥주 콘테스트에 출품하는데 당신 효모가 아니면 절대 상을 못 탄다”고 울먹였습니다. 그제야 브루마스터가 아주 적은 양만 사는 조건으로 효모 판매를 허락했습니다.
효모를 구하고 나자 나머지 양조 과정은 어려울 게 없었습니다. 기숙사에 있는 큰 냄비와 가스렌지를 이용해 맥아즙을 만들었습니다. 평소 케이크를 담는 데 썼던 통에 맥아즙을 넣고 단백질을 제거한 뒤 천천히 식혔습니다. 발효 탱크가 따로 없으니 빈병을 구해 와 호스를 이용해 맥즙을 담고 거기에 효모를 넣어 냉장고에 넣었습니다. 15도에 온도를 맞춘 뒤 며칠간 발효시켰죠. 발효가 끝나면 다시 온도를 5도로 낮췄습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독일에서 배운 건 맥주의 기술이 아니라 맥주 문화였는지 모릅니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전통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그래서 ‘맥주순수령’을 금과옥조로 지켰습니다. 맥주순수령이란 16세기 독일의 빌헬름 4세가 맥주의 품질 향상을 꾀하기 위해 원료를 규제한 법령입니다. ‘보리·호프·물 세 가지 원료 외에는 맥주 제조에 사용하면 안 된다’는 내용입니다. 질 낮은 맥주는 순수 맥아 대신 다른 값싼 곡물을 섞거나 첨가물을 넣지만 독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독일인들의 맥주 거품 사랑입니다. 맥주 거품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더군요. 맥주 거품을 오래 유지하는 방법을 연구한 책이 따로 있을 정도입니다. 부드럽고 풍부한 맥주 거품을 만들기 위해 따르는 데 10분 넘게 걸리는 맥주도 있습니다. 성질 급한 우리나라 주당이라면 아마 절대 못 참을 일일 겁니다.
최근 ‘마이크로 브루어리’(소양조장)가 한국에서도 유행입니다. 그들의 마이크로 브루어리는 말 그대로 집에서 적은 양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뒤늦게 가내 맥주 양조를 허용한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특급호텔의 초현대식 소규모 양조를 가리키는 말로 주로 쓰입니다.(※우리나라에서 가내 맥주 양조는 불법이었다. 2002년 2월에서야 주세법 시행령이 개정돼 소규모 맥주 양조가 가능해졌다) 독일의 가내 양조장은 대개 옆에 작은 식당을 겸해서 음식과 맥주를 함께 팔았습니다.
‘1리터 사발식’… 노는 건 다 똑같더라
무지막지한 ‘사발식’도 신기했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외국 유학생 클럽에는 사발식이 있었습니다. 클럽에는 대대로 장화 모양의 1리터짜리 컵이 전해져 왔습니다. 클럽 첫 모임 때 그 커다란 장화 모양 컵에 맥주를 담아서 한 사람씩 ‘원샷’을 했지요. 마지막에 컵을 기울이면 남아 있던 맥주를 머리부터 뒤집어썼습니다. 서너 명씩 조를 이뤄 장화 컵에 든 맥주를 빨리 마셔 없애는 내기도 했습니다. ‘세상 어디를 가나 대학생들 노는 건 비슷하구나’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습니다. 이렇게 고락을 함께했던 친구들을 지금은 4년에 한 번씩 뮌헨 대학의 맥주 세미나 행사에서 만납니다.
백우현 오비맥주 광주공장장
정리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mh@hani.co.kr
정리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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