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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유 리얼리 해피?”

등록 2012-05-16 16:59수정 2012-08-09 14:21

[매거진 esc] 인간 반전
잘나가는 아나운서 접고 스페인·프랑스 등을 떠돌며 유목민의 삶 살고 있는 손미나

“행복하냐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던 나
문제가 있구나 싶었죠”

“한국여자로 사는 고단함
알려주는 멘토 없었죠.
내가 그 역할 하고 싶어요”

인기 절정이었던 아나운서답게 지난 16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 카페에서 만난 그녀에게선 여전히 신중한 몸가짐이 느껴졌다. 이 단어를, 이 문장을 꺼내들어도 될까 숙고하는 순간들이 그랬다. 하지만 그녀에게 짙게 배어든 ‘노마드’의 표지가 더 압도적이었다. 스페인과 프랑스는 여행지를 넘어 새로운 인생의 전진기지처럼 보였다. 주거에서, 인간관계에서, 일에서 한국 이상의 비중이다. 더이상 그녀에게 고정된 주거지가 있을까? 결혼이란 울타리도 필요해 보이지 않았다. 방송사를 그만둔 지 5년 만에 6권의 책(에세이 3권, 번역서 2권, 소설 1권)을 내면서 정신의 유목생활은 더욱 거침없고 단단해지고 있다. 예컨대 그녀가 구상하는 소설은 이렇다.

“‘우리에게 조선시대가 없었더라면’이라는 콘셉트의 소설을 생각중이에요. 지금도 우리를 지배하는 유교문화 때문에 한국 여자들은 너무 살기 힘들거든요. 자기 인생에 불만을 가진 젊은 여자들이 이렇게 많을 수 없어요. 고려사를 전공하고 가르치신 아버지에게 들어보니, 고려시대는 지금보다 훨씬 개방적이었어요. 현대 유럽보다 더 진취적이기까지 해요. 그래서 조선의 유교문물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궁금하더라구요.”

지난 5년은 반전을 한번 결행하자 반전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형국이었다. 그녀 안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던 걸까. 시청률 40%를 넘나들던 <도전 골든벨> 진행자 시절, 백화점에서 팬이라 자처하는 이에게 봉변을 당할 뻔하고 나서 혼자 다닐 수가 없게 됐다. 너무 갑갑해 몰디브로 혼자 여행을 떠났다. 이탈리아에서 온 여의사를 우연히 만나 일주일 내내 바닷가에서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어느 순간 그녀가 ‘아 유 리얼리 해피?’(당신 정말 행복한가요?) 하고 묻는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대충 대답할 수 있었을 텐데, 세상과 격리된 하얀 백사장에서 옷도 걸치지 않은 그녀가 묻는데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어요. 대답하지 못하는 내게 뭔가 문제가 있구나 싶었어요.”

돌아온 뒤 9시 뉴스를 진행하는데 속보가 들어왔다. 자신의 순서였다. 짜릿하고 신나서 펜을 들고 준비하는데 이어폰에서 남자 앵커에게 넘기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너무 화가 났어요. 왜 그래야 하는데요? 보면 그는 기자이며 남자고, 나는 여자이며 아나운서였어요. 9·11 테러도 아니고 이승엽 선수가 몇 번째 홈런을 쳤다는 뉴스였어요.”

‘아 유 리얼리 해피?’란 질문이 머리를 계속 울렸고, 바르셀로나대학 저널리즘 석사과정 시험을 쳤다. 휴직을 준비하는데 그때만 해도 유학 가는 아나운서가 없었다. ‘겁도 없다, 갔다 오면 후배들이 네 자리를 차고 들어올 텐데’ 같은 말로 만류했다. 1년 비워서 지킬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면 아등바등 붙든다고 될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 1년 뒤, 에너지가 넘쳐 보인다고들 했다. 유열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유학 시절 이야기를 신나게 떠들었더니 유열씨가 책을 써보라고 했고, 생방송이 끝나자마자 출판사 여기저기서 전화가 왔다. <스페인 너는 자유다>라는 첫 책을 썼고, 20만부 넘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profile

손미나 고려대 서어서문학과 졸업. 1997년 KBS 아나운서로 입사해 <가족 오락관> <도전 골든벨> 등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주말 9시 뉴스 앵커로도 활약했다. 2007년 방송사에 사표를 내고 작가로 살아가고 있다.

“그때가 산티아고 찾아가는 한국 여자들이 부쩍 늘어나던 시기와 겹쳤던 것 같아요. 나이 서른만 되면 인생 끝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제 책에 대리만족을 느낀 게 아닐까요? 출판사는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다고 하던데.”

자신이 보는 세상을 직접 기록해 뭔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잘 준비된 작업물을 전달하는 아나운서가 주지 못하는 기쁨이었다. ‘손미나라는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을 따라가고 싶다’는 다른 출판사의 제안도 받았다. 마침내 평생을 보장해주는 방송사를 그만뒀다. 그녀에게는 그만두지 않았을 경우와 그만뒀을 경우의 위험도가 똑같아 보였다. 안정적인 월급이 행복을, 미래를 보장하는 건 아니라고 믿게 된 것이다. 스타 아나운서에서 프리랜서 작가로의 반전이었다.

드라마처럼 위기가 곧바로 찾아왔다. 이국적이지 않은 나라, 자신이 언어를 모르는 나라를 일부러 기준 삼아 일본을 택해 두번째 여행에세이를 출간했다. 스스로의 만족도에서 이건 아니지 싶었다. 게다가 소문 없이 이혼을 해야 했다. 부모님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괴로움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은 버겁기만 했다. 스페인으로 건너가 혼자 1년을 지냈다. 책을 쓰지 못하고 책을 읽기만 했다. 특히 심리학 서적들.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왜 자신에게 이런 일들이 벌어졌는지 화가 났다. 인도에서 명상 훈련을 많이 한 동갑내기 요가 선생을 만나 그동안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들을 한달 동안 주고받았다. 여기에 아르헨티나에 다녀온 두번의 여행이 용기를 만들어줬다. <다시 가슴이 뜨거워져라>라는 세번째 여행에세이를 냈다. 첫번째 책과 비교하면, 그녀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확연히 달라진 게 느껴진다.

“세번째 책을 내고 나니 앞으로 계속 글을 쓰려면 계단을 하나 뛰어오를 때가 됐다 싶더라구요. 아무리 나라가 바뀌어도 내가 바뀌지 않으면 책이 새롭지 않겠구나. 그래서 파리에 가서 뭔가 성장을 한 뒤 네번째 여행에세이를 쓰기로 맘먹었고, 내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 소설부터 썼어요.”

2009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여행하면서 만난 현지인 친구와 기념촬영을 한 손미나. 손미나 제공
2009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여행하면서 만난 현지인 친구와 기념촬영을 한 손미나. 손미나 제공
그녀는 지난가을부터 줄곧 프랑스 파리에 살고 있다. 언젠가 준비가 끝나면 ‘파리라는 도시가 어떻게 한 인간을 변화시키는가’에 대해 책을 쓰게 될 터다. 유목의 삶은 행복은커녕 몸과 마음에 더 많은 외로움과 가난을 줄 수 있다. 그녀는 매번 자신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게 어떤 것인지 직관해냈고, 알아차린 데서 끝내지 않고 선택으로 결행해왔다. 타인의 기준은 필요없었다. 비밀은 여기에 있었다. 그녀는 또 새로운 계획을 목전에 두고 있다.

“한국 여자로 살아오면서 아쉬운 게 그게 어떤 것인지 미리 팁을 주는 선배가 없었다는 점이에요. 이제 내가 그런 멘토 역할을 해주고 싶어요. 프랑스로 여행 오는 30대 여자들에게 아웃렛 가서 샤넬백 사지 말고 그 돈으로 손미나와 며칠 동안 캠핑을 하자고 제안하고 싶어요. 예쁜 시골 농장에 가서 같이 자고 먹으면서 세미나도 하면서 세상을 다시 보고 새로운 용기를 내게 도와주고 싶어요.”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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