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인간 반전
잘나가는 아나운서 접고 스페인·프랑스 등을 떠돌며 유목민의 삶 살고 있는 손미나
잘나가는 아나운서 접고 스페인·프랑스 등을 떠돌며 유목민의 삶 살고 있는 손미나
대답할 수 없었던 나
문제가 있구나 싶었죠” “한국여자로 사는 고단함
알려주는 멘토 없었죠.
내가 그 역할 하고 싶어요” 인기 절정이었던 아나운서답게 지난 16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 카페에서 만난 그녀에게선 여전히 신중한 몸가짐이 느껴졌다. 이 단어를, 이 문장을 꺼내들어도 될까 숙고하는 순간들이 그랬다. 하지만 그녀에게 짙게 배어든 ‘노마드’의 표지가 더 압도적이었다. 스페인과 프랑스는 여행지를 넘어 새로운 인생의 전진기지처럼 보였다. 주거에서, 인간관계에서, 일에서 한국 이상의 비중이다. 더이상 그녀에게 고정된 주거지가 있을까? 결혼이란 울타리도 필요해 보이지 않았다. 방송사를 그만둔 지 5년 만에 6권의 책(에세이 3권, 번역서 2권, 소설 1권)을 내면서 정신의 유목생활은 더욱 거침없고 단단해지고 있다. 예컨대 그녀가 구상하는 소설은 이렇다. “‘우리에게 조선시대가 없었더라면’이라는 콘셉트의 소설을 생각중이에요. 지금도 우리를 지배하는 유교문화 때문에 한국 여자들은 너무 살기 힘들거든요. 자기 인생에 불만을 가진 젊은 여자들이 이렇게 많을 수 없어요. 고려사를 전공하고 가르치신 아버지에게 들어보니, 고려시대는 지금보다 훨씬 개방적이었어요. 현대 유럽보다 더 진취적이기까지 해요. 그래서 조선의 유교문물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궁금하더라구요.” 지난 5년은 반전을 한번 결행하자 반전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형국이었다. 그녀 안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던 걸까. 시청률 40%를 넘나들던 <도전 골든벨> 진행자 시절, 백화점에서 팬이라 자처하는 이에게 봉변을 당할 뻔하고 나서 혼자 다닐 수가 없게 됐다. 너무 갑갑해 몰디브로 혼자 여행을 떠났다. 이탈리아에서 온 여의사를 우연히 만나 일주일 내내 바닷가에서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어느 순간 그녀가 ‘아 유 리얼리 해피?’(당신 정말 행복한가요?) 하고 묻는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대충 대답할 수 있었을 텐데, 세상과 격리된 하얀 백사장에서 옷도 걸치지 않은 그녀가 묻는데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어요. 대답하지 못하는 내게 뭔가 문제가 있구나 싶었어요.” 돌아온 뒤 9시 뉴스를 진행하는데 속보가 들어왔다. 자신의 순서였다. 짜릿하고 신나서 펜을 들고 준비하는데 이어폰에서 남자 앵커에게 넘기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너무 화가 났어요. 왜 그래야 하는데요? 보면 그는 기자이며 남자고, 나는 여자이며 아나운서였어요. 9·11 테러도 아니고 이승엽 선수가 몇 번째 홈런을 쳤다는 뉴스였어요.” ‘아 유 리얼리 해피?’란 질문이 머리를 계속 울렸고, 바르셀로나대학 저널리즘 석사과정 시험을 쳤다. 휴직을 준비하는데 그때만 해도 유학 가는 아나운서가 없었다. ‘겁도 없다, 갔다 오면 후배들이 네 자리를 차고 들어올 텐데’ 같은 말로 만류했다. 1년 비워서 지킬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면 아등바등 붙든다고 될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 1년 뒤, 에너지가 넘쳐 보인다고들 했다. 유열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유학 시절 이야기를 신나게 떠들었더니 유열씨가 책을 써보라고 했고, 생방송이 끝나자마자 출판사 여기저기서 전화가 왔다. <스페인 너는 자유다>라는 첫 책을 썼고, 20만부 넘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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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여행하면서 만난 현지인 친구와 기념촬영을 한 손미나. 손미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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