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인간 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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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드매니저 일 하다가
직접 된장 판매 뛰어들어 펀드매니저로 잘나가던 남자가 안락한 온실에서 벗어난 건 다 아이엠에프(IMF) 구제금융 사태 때문이다. 자금 흐름의 최전방에서 구제금융 사태를 맞은 정두철 대표는 이러다가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세상이 엄청나게 바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세상에선 뭐든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죠.” 마침 벤처붐이 일었고, 선배가 만든 투자자문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바로 거기서 인생의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된장 담그는 학승과 서울대 음대를 나온 첼리스트가 결혼해 만든 ‘메주와 첼리스트’ 법인 전환 업무를 돕던 중 흥미로운 제안을 받았다. “이참에 회사 운영을 맡아주면 어떨까?” 당시 그의 나이 33살. 책임감을 느끼기보다 사장이 된다는 것이 마냥 기뻤던 시절이다. ‘메주와 첼리스트’는 신문이나 잡지에 많이 소개되어 꽤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학승이 강원도 정선에서 된장을 담그고, 독일 유학까지 다녀온 아내가 첼로 연주를 하며 지낸다니까 얼마나 근사해요! 거절할 이유가 없었죠.” 친구나 선후배들의 격려도 대단했다. “네가 드디어 전공을 살리는구나!” 찬사가 쏟아졌다. 하지만 흥분도 잠시. 몇 달 후부터 사장이라는 자리의 압박이 거세졌다. ‘메주와 첼리스트’는 자금이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남들은 묵은 콩이나 수입콩을 사다 된장을 담그는데, 비싼 해콩을 사다 제대로 된장을 담그다 보니 들어갈 돈은 많고 들어오는 돈은 많지 않았다. 1년을 정성껏 만들어야 겨우 자금 회전이 되는 형국. 직원 월급도 주지 못하는 사장의 비애를 통감한 그는 직접 된장을 들고 팔러 다녔다. 금융사 선배들을 찾아가 된장을 팔 때는 무시를 당할까봐 평소 입지 않던 양복을 꼬박꼬박 입기도 했다. 된장을 팔면서 그가 배운 것은 생의 치열함만이 아니었다. 브랜드를 어떻게 포장해서 시장에 내놔야 하는지, 기획과 전략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모 회사에서 브랜드 매니저로 일하는 선배를 찾아가 된장을 선물했는데, 고마워하기는커녕 화를 내는 거예요. 어떻게 새우젓 통 같은 데 담아 된장을 팔려 하냐고. 그때 화가 나면서도 일단 브랜드 마케팅이 뭔지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메주와 첼리스트’에서 만든 된장을 ‘작품’이라는 콘셉트로 팔기 시작했다. 패키지도 예술작품처럼 만들고, 팸플릿도 갤러리 초대장처럼 꾸몄다. 고급 된장의 품질에 걸맞은 고급 이미지를 갖췄다. “그때 비로소 확신을 갖게 됐죠. 내용의 실체가 있으면 브랜드와 디자인이 더해졌을 때 파급력이 엄청나구나!” ‘명인명촌’ 사업 맡아
전국 숨겨진 장인들 발굴
상품으로 소비자에게 연결 이후 디자인전문회사 안그라픽스에서 기획이사로 일한 경력까지 더해지면서 그는 브랜드 마케팅 전략의 고수가 됐다. 지금도 그는 지식경제부가 지원하는 ‘명인명촌’ 사업을 우직하게 밀고 나가고 있다.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은 전국의 숨겨진 장인들과 지역 특산품을 발굴해 브랜드 전략을 만들고 소비자와 이어주는 일을 한다. 그가 발품 팔아 찾아낸 지역 명인들은 조금 남다른 구석이 있다. 대를 이어 한 업에 종사한 사람보다 어떤 철학으로 만들고 있는지 철학과 자세를 더 중요하게 바라본다. 그가 생각하는 진정성은 단순명료하다. 농업은 생물이니까 매해 날씨나 상황에 따라 맛이 변한다. 어느 해 키우던 석류의 당도가 낮아졌다고 해서 고른 당도를 유지하기 위해 억지로 설탕을 넣지 않는 것. 그런 진정성이 생각보다 큰 울림을 갖는다는 것을 그는 현장에서 매 순간 느끼고 있다. “명인명촌에 소속된 장인들 중 제2의 인생을 사시는 분들이 참 많아요. 기자 출신도 있고,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일했던 분도 있고. 오래 농사를 짓고 상품을 생산하진 않았지만 제대로 만드니까, 또 브랜드 전략과 그에 걸맞은 디자인이 더해지니까 파급력이 생겨요. 다들 행복하게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죠.” 언젠가 전통 식초를 직접 만들어보고 싶다는 그가, 앞에 앉은 사람에게도 강력하게 식초 장인을 권한다. “전통 식초 한번 만들어보세요! 이건 21세기 최고 유망사업이에요.” 귀가 솔깃해지는 진정성 있는 권유다.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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