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라운지’의 백상욱 바리스타가 케멕스로 커피를 추출하고 있다.
[esc] 커버스토리 고품질 커피 인기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의 북적이던 인파가 조금씩 이동하고 있다.
스페셜티 커피, 싱글 오리진 커피처럼 커피의 풍미를 본격적으로 즐길 수 있는 로스터리 커피전문점으로 말이다.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의 북적이던 인파가 조금씩 이동하고 있다.
스페셜티 커피, 싱글 오리진 커피처럼 커피의 풍미를 본격적으로 즐길 수 있는 로스터리 커피전문점으로 말이다.
20세기가 가장 사랑했던 여배우 중 하나인 오드리 헵번. 그를 거의 닮지 않은, 둘째 아들 루카 도티가 지난 8월 말 한국을 찾았다. 커피 때문이다. 그는 프랜차이즈 식품업체 바인에프씨를 사업 파트너로 서울 역삼동에 오드리 헵번 테마 카페를 열었다. 세계 최초다. 백지수표를 들이민 일본 기업도 마다하고, 한국의 대기업도 아닌, 그다지 유명하지도 않은 업체를 선택한 이유는 의외로 소박했다. 쿠바산 ‘크리스털 마운틴’을 독점 수입한다는 점이 그를 사로잡았다. “크리스털 마운틴은 최상의 퀄리티(질)를 가진 커피입니다. 커피 질에 집중하는 점이 마음에 들었죠.” 체 게바라와 헤밍웨이가 좋아했다는 최고급 커피다. 루카 도티는 스타벅스나 카페베네 등의 프랜차이즈 커피에 질려, 좀더 다양하고 고급스러운 맛을 찾는 최근 한국 소비자들의 변화를 알아챈 것이다.
때는 추석 연휴의 막바지인 21일. 장소는 서울 연희동의 커피전문점 ‘5브루잉(5BREWING) 커피’. 한적하다. 장사가 될까 싶다. 주변에 슈퍼조차 없다. 하지만 바리스타 장문규씨는 “어제는 9시간 내내 앉을 시간도 없었다”고 말한다. 실내는 과학실험실을 연상시킨다. ‘브루잉’(양조)은 요즘 커피 맛 좀 안다는 이들이 ‘커피’를 붙여 자주 쓰는 말이다. 다양한 방법으로 커피를 우려내는 것을 말한다. 차림표 첫 장에는 ‘추출도구 선택 후 오늘의 브루잉커피를 선택해주세요’라고 적혀 있다.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커피 추출도구가 이토록 많다니! 핸드드립, 케멕스, 에어로프레스, 사이펀, 클레버, 에바솔로, 프렌치프레스, 에스프로프레스 등. 프렌치프레스를 고르자 원두를 선택할 차례. 스페셜티 원두(미국스페셜티커피협회의 까다로운 심사를 거친 고급커피 재료)까지 포함해 9가지 원두가 있다. 평소 신맛이 강해 기자가 좋아하는 ‘케냐 레드 마운틴 에이에이(AA)’를 골랐다. 장씨는 로스팅한(볶은) 케냐에이에이를 그라인더에 간다. 천만원대로, 국내에 몇대 없는 우버보일러(물 온도 조절기구)를 돌려 뜨거운 물을 내린다. 실험실 용기 같은 프렌치프레스에 커피가루와 물을 넣고 이리저리 뭔가를 한다. 1분, 2분, 3분. 시간이 흐른다. 5분 걸려 커피가 탄생한다. 몇 초 만에 뚝딱 나오는 프랜차이즈와 사뭇 다른 시간 개념이다. 230㎖. 가격은 8천원.
1970년대 이전 인스턴트 커피가
몰고온 제1의 물결
스타벅스가 중심 된 제2의 물결
로스터리 커피점이
제3의 물결을 끌어냈다 와인만 현란한 말로 평가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신의 물방울> 남매로 빙의해 한번 맛을 읊어봤다. “흙모래 이는 거친 광야를 달리다가 신맛이 담뿍 담긴 바람을 만나더니 ‘만종’의 서글픔이 몰려오는구나.” 잔을 내려놓고 몇 분 뒤 또 한 모금 마시자 “외로운 흙먼지는 사라지고 덜 익은 감귤의 신맛, 꽃향 등이 뜨거운 심장을 케냐의 들판으로 인도한다”는 외침이 나온다. 기자는 같은 원두로 요새 인기 최고라는 에어로프레스 추출을 주문했다. 거친 흙바람은 사라지고 세련된 도시인의 새침한 신맛이 지배한다. 프렌치프레스가 대형 스포츠실용차(SUV)라면 이건 세단이다. 같은 재료지만 맛은 다르다. 프렌치프레스는 망으로 거르기에 더 텁텁하고, 에어로프레스는 더 촘촘한 필터가 있다고 장씨가 말한다. 그 차이다. “추출시간이나 온도도 다르고, 양도 달라요. 프렌치프레스에 들어가는 원두 양은 19g, 에어로프레스는 18.5g이죠. 추출방법에 따라 넣는 양이 달라집니다.” 커피의 천 가지 얼굴이 추출방법에 따라 그 풍부한 표정을 드러낸다.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의 ‘파젠다’도 각종 추출기로 가득 찬 실험실 같다. 김숙희 대표는 영화 <가비>의 커피자문을 한 실력자다. 이곳도 로스터기가 있어, 추출방법에 따라 원두를 갈아서 팔기도 한다.
‘5브루잉 커피’나 ‘파젠다’ 같은 커피전문점을 ‘로스터리(Roastery) 커피전문점’이라고 부른다. 작년부터 부쩍 많이 생기고 있다. 이들은 공통점이 있다. 원두생산지와 직거래를 하거나 고품질의 원두를 들여와 직접 볶고 추출해 스페셜티 커피, 싱글오리진 커피(단일 품종 원두만 사용한 커피) 같은 커피 본연의 맛에서 끌어낸 고급 커피를 팔고, 종류도 다양하다. 또 소비자가 직접 원두나 추출방법을 고를 수도 있다는 점, 프랜차이즈가 선호하는 강배전이 아닌 중배전이나 약배전을 한다는 점, 스시바나 칵테일바처럼 커피바가 있고, 무분별한 문어발식 지점 확장을 지양한다는 점 등이 겹친다. 5브루잉커피는 각종 국제 바리스타대회에서 수상 경력이 있는 도형수 바리스타가 주인이다. 장씨는 “작년 열었을 때는 커피업체 사람들이 많았는데 요즘 일반 손님들이 더 많다”고 한다. 종종 이곳을 찾는다는 대학원생 김수진(26·서대문구 연희동)씨는 “프랜차이즈점보다 많이 비싼 것도 아닌데 맛은 확실히 많이 달라요. 천원, 2천원 더 내고 질 좋은 커피 마시는 게 좋아요”라고 한다. 그는 커피 마니아도, 맛집 순례자도 아니라고 했다. 그저 평범한 20대란다. “제 친구들 대부분 저와 같아요.”
커피업계 관계자들은 ‘커피 제3의 물결’(The Third Wave of Coffee)이 한국에도 상륙했다고 본다. 커피 제3의 물결은 미국에서 시작됐다. 1970년대 이전 인스턴트커피가 대세였던 시절이 제1의 물결, 1970년대 이후 스타벅스 등 프랜차이즈의 성공이 제2의 물결이었다면 90년대 중반 이후 ‘인텔리겐치아’, ‘스텀프타운’ 등의 로스터리 커피전문점의 등장이 제3의 물결로 일컬어진다. 이들 커피점들은 스타벅스로 대표되는 표준화된 맛을 거부한다. 홍차의 나라 영국이나 북유럽, 일본도 제3의 물결이 한창이다. 흔히 일본이 한국보다 커피 문화가 10년 정도 앞서 있고, 우리가 그 궤도를 따라간다는 점에서 일본 시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 현장을 다녀온 숭의여자대학교 김순하 교수가 생생하게 전한다. “2010년부터 도쿄에 신세대들이 운영하는 카페 중심으로 새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며 “‘도쿄 커피 벨트’라는 명칭이 생겼고, 농장을 통째로 사는 이도 있고, 생산 지역, 생산자 이름까지 카페에 명시하는 수준”이라고 한다.
이런 흐름을 눈치 빠른 기업이 모를 리 없다. 지난 5월 탐앤탐스는 7가지 싱글오리진 커피를 로스팅하는 ‘탐앤탐스 더 칼립소’를, 투썸플레이스는 ‘투썸커피’를 열어 스페셜티 커피를 선보였다. 자뎅도 스페셜티 커피 전문점 ‘커피 휘엘’을 연 상태. 씨케이코앤(CKCO&)은 독특한 콘셉트의 커피놀이터 어라운지(AROUNZ)를 서울 양평동에 오픈했다. 스페셜티 원두를 포함해 약 50종 원두를 소비자가 직접 골라 그 자리에서 로스팅해 가져갈 수 있다. 추출도구부터 필터까지 커피 관련 제품 5000종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몇천만원대의 로스터기 관람과 실력을 갖춘 바리스타의 무료 커피 시음은 보너스다. ‘어라운지’ 관계자는 “일본은 집에서 원두커피를 만들어 먹는 추세가 이미 10년 전부터 대중화되었다”며 “우리나라에도 홈카페족이 급속히 늘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 ‘홈바리스타클럽’ 카페는 현재 약 6300여명이 회원으로 활동한다. 소비자들이 자기만의 취향을 담은 커피를 찾아내려는 노력도 제3의 물결의 한축이다. 커피업계에는 인텔리겐치아가 한국 파트너를 구한다는 둥, 최근 가장 핫한 미국의 로스터리 커피전문점 ‘핸섬’이 방송인 강호동과 손을 잡는다는 둥, 재미있는 소문이 많다.
최근 2011년까지 해마다 20% 이상 성장했던 커피시장이 꺾였다는 통계가 발표됐다. 관세청 추정 1인당 커피 소비량이 2011년 338잔에서 2012년 293잔으로 줄었고 카페베네 등 주요 업체들의 영업이익은 손실이 났다. 커피점포 초과 공급으로 인한 과열경쟁, 경기침체, 줄어든 카페 창업 등을 요인으로 꼽는다. 하지만 이 현상은 프랜차이즈의 퇴보일 뿐 로스터리 커피전문점 등 고급 카페 시장의 성장동력은 여전하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커피경제학>의 저자 김민주씨는 “1인당 커피 소비량은 우리 기준으로 미국은 약 3배, 일본은 2배, 유럽은 약 7~8배이기에 아직 여력이 있다”고 내다봤다. 이미 서구화된 식생활 습관 때문에 커피 소비량은 늘 수밖에 없다는 게 업계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그럼 7, 8천원대의 고급 커피만 시장에서 승리할까라고 묻는다면 또 다른 답이 나온다. 김순하 교수는 “일본은 또 다른 트렌드로 ‘맛집 카페’, ‘100엔 커피’ 등의 이름을 달고 편의점에서 맛 좋고 저렴한 커피를 공급한다”고 전했다. 심지어 “바리스타를 둔 편의점도 있다”고 한다. 카페든 편의점이든 질 좋은 저가 커피 시장도 열린다는 소리다. ㈜한국바리스타알앤디 정병인 대표는 “곧 한 편의점 업체와 제휴해 실력파 바리스타를 내세운 핸드드립커피를 출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가격은 확정되지 않았으나 저렴한 가격정책을 쓸 예정이라고 한다. 로스터리 커피전문점의 다채로운 맛을 선택할 것인가, 편의점 등의 저가 커피를 고를 것인가는 소비자 몫이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몰고온 제1의 물결
스타벅스가 중심 된 제2의 물결
로스터리 커피점이
제3의 물결을 끌어냈다 와인만 현란한 말로 평가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신의 물방울> 남매로 빙의해 한번 맛을 읊어봤다. “흙모래 이는 거친 광야를 달리다가 신맛이 담뿍 담긴 바람을 만나더니 ‘만종’의 서글픔이 몰려오는구나.” 잔을 내려놓고 몇 분 뒤 또 한 모금 마시자 “외로운 흙먼지는 사라지고 덜 익은 감귤의 신맛, 꽃향 등이 뜨거운 심장을 케냐의 들판으로 인도한다”는 외침이 나온다. 기자는 같은 원두로 요새 인기 최고라는 에어로프레스 추출을 주문했다. 거친 흙바람은 사라지고 세련된 도시인의 새침한 신맛이 지배한다. 프렌치프레스가 대형 스포츠실용차(SUV)라면 이건 세단이다. 같은 재료지만 맛은 다르다. 프렌치프레스는 망으로 거르기에 더 텁텁하고, 에어로프레스는 더 촘촘한 필터가 있다고 장씨가 말한다. 그 차이다. “추출시간이나 온도도 다르고, 양도 달라요. 프렌치프레스에 들어가는 원두 양은 19g, 에어로프레스는 18.5g이죠. 추출방법에 따라 넣는 양이 달라집니다.” 커피의 천 가지 얼굴이 추출방법에 따라 그 풍부한 표정을 드러낸다.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의 ‘파젠다’도 각종 추출기로 가득 찬 실험실 같다. 김숙희 대표는 영화 <가비>의 커피자문을 한 실력자다. 이곳도 로스터기가 있어, 추출방법에 따라 원두를 갈아서 팔기도 한다.
2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에 위치한 커피용품점 ‘어라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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