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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호모 컨비니쿠스’

등록 2017-03-02 08:46수정 2017-03-02 08:50

[ESC] 커버스토리
없는 것도, 안 되는 것도 없는 ‘만능 편의점 시대’의 자화상
편의점은 현대인들에게 삶의 일부분이 됐다. 해가 질 무렵 서울 명동의 편의점 앞을 사람들이 지나치고 있다. 박미향 기자 mh@hani.co.kr
편의점은 현대인들에게 삶의 일부분이 됐다. 해가 질 무렵 서울 명동의 편의점 앞을 사람들이 지나치고 있다.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서울 지하철 2호선 선릉역 인근 직장에 다니는 박수해(31)씨는 ‘호모 컨비니쿠스’(인간을 뜻하는 ‘호모’와 편의점을 뜻하는 ‘컨비니언스 스토어’의 합성어)다. 그는 출근하면서 종로구 집 근처 편의점에서 커피를 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스스로를 “스벅 덕후”라고 말할 정도로 스타벅스 커피를 좋아해 매일 ‘출근 도장’을 찍을 정도였지만, 올해부터 가계부를 쓰기 시작하면서 일주일에 1~2번 가는 것으로 줄였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 편의점 커피다. “1000원이라는 가격에 비해 꽤 먹을 만하다”는 것이 그의 평가다. 선릉역에 내린 박씨는 바로 회사로 가지 않고 편의점에 들른다. 여기서 아침밥 대신 먹을 바나나 1개와 우유를 산다. 점심 도시락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점심시간에 가면 이미 도시락이 다 팔리고 없다”는 이유에서다.

점심은 회사 회의실에서 동료들과 모여 먹는다. 아침에 사 온 편의점 도시락과 샐러드가 주 메뉴고, 가끔 컵라면을 곁들이기도 한다. 점심 뒤엔 가벼운 산책도 할 겸 회사 밖으로 나가 편의점에서 커피와 디저트를 사 온다. 요새 편의점 치즈케이크와 티라미수 같은 디저트의 품질이 전문 제과점 못지않다.

오후 4시, 간식시간이다. 요새 동료 여직원들이 꽂힌 건 ‘바나나킥’이다. 추억의 과자 바나나킥이 아니다. 녹차, 초코, 딸기 3가지 맛으로 새로 나온 바나나킥이다. 한 편의점에서 한 가지 맛만 파는데, 많은 편의점을 이용하는 박씨는 3가지 맛을 모두 섭렵했다.

퇴근 뒤에도 먼저 가는 곳은 편의점이다. 저녁에 먹을 맥주와 간식거리를 사고 택배를 받기 위해서다. 편의점에서 파는 ‘4개 1만원’ 수입맥주는 그의 ‘최애’(제일 사랑한다는 뜻) 아이템이다. 안주는 주로 피비(PB·자체 생산)상품인 ‘고구마 말랭이’를 산다. 택배 서비스도 너무 마음에 든다. 편의점 택배 서비스가 생긴 뒤로 집에서 물건을 받은 적이 없다. 여성 1인가구에게 택배기사 방문은 여전히 부담스럽다. 이렇게 하루 평균 3~4차례 편의점에 들르는 그는 매일 1만5000~2만원가량을 편의점에 지출한다.

왜 이렇게 편의점을 자주 찾는 것일까. “편하고 늘 열려 있다. 항상 반겨주기도 한다. 거기다가 맛있는 음식까지 있다. 싫어할 이유가 있겠나.” 그의 답이다. “항상 밝다”는 것도 매력이다. 어두침침한 원룸의 조명 밑에 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편의점에 들어서면 기분이 밝아진단다.

서울 송파구의 한 편의점 풍경.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서울 송파구의 한 편의점 풍경. 박미향 기자 mh@hani.co.kr

박씨처럼 현대인에게 편의점은 없어서는 안 될 ‘생활 거점’이 됐다. 하루의 시작과 끝이 편의점에서 이뤄진다. 교통카드 충전, 현금입출금, 공과금 수납, 상품권·스포츠토토·로또·공연표 구입, 택배, 팩스 등 살아가면서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편의점에서 할 수 있는 세상이다.

‘편의점으로 퇴근해 쇼핑하는 것으로 하루를 끝내는 사람’이란 뜻의 ‘편퇴족’이란 단어도 생겨났다. 지난해 말 한 취업포털이 직장인 403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했더니, 응답자의 절반에 가까운 44.9%가 자신을 ‘편퇴족’이라고 답했다. 편의점 음식을 소재로 한 티브이엔(tvN) 예능프로그램 <편의점을 털어라>는 시험방송 중 평균 2%대의 시청률을 기록해 3월 중순부터 정규 편성됐다. 최근엔 일본에서 18년 동안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한 지은이가 쓴 소설 <편의점 인간>이 국내에 출간돼 화제가 됐다.

1989년 5월 세븐일레븐이 서울 올림픽선수촌에 한국 최초의 편의점을 열 때만 해도, 편의점이 사람들의 생활을 지배하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 못했을 것이다. 그해 생긴 편의점은 모두 7개, 매출은 14억원에 불과했다. 28년이 지난 지금, 편의점은 3만3000여개, 매출액은 19조원을 넘어섰다. 양적 팽창은 질적 변화를 불러왔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음식과 서비스는, 더는 성장이 어려울 것처럼 보였던 편의점 산업을 더욱 발전시키고 있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가늠할 수 없어진 것이다.

<편의점 인간>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나는 문득, 아까 나온 편의점의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손과 발도 편의점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자, 유리창 속의 내가 비로소 의미 있는 생물로 여겨졌다.” 편의점 속에서 의미를 찾는 현대인의 모습이 그려진 대목이다. 편의점의 발전은 편의점의, 편의점을 위해, 편의점에 의해 살아가는 ‘호모 컨비니쿠스’를 탄생시켰다. 부정적으로 보진 말자. 이 또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니까.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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