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주택으로 이사 온 다음주, 아랫집 강찬 엄마(가명)의 초대를 받았다. “이사하느라 피곤하지? 우리집으로 저녁 먹으러 와요.” 나는 고마워하며 바로 내려갔다. 아이들 이야기, 집안 이야기 등등 한참 수다를 떠는데, 강찬 엄마가 물었다. “언니! 아침에 일어나보면 우리 마당 잔디 위에 이상한 똥 같은 게 있어. 이게 뭘까? 언니는 동물 전문가잖아. 좀 봐주세요.”
나보다 두어살 아래인 강찬 엄마의 말투엔 걱정이 묻어났다. “그래? 저 아래 하얀 집 강아지나 길고양이 똥 아니고?” “아냐, 개나 고양이 똥은 좀 크고 길잖아. 훨씬 작은데 뭐라 할까? 콩이나 옥수수 알갱이만한 데 그보다는 조금 길쭉하다고 해야 하나? 뭉쳐 있는 건 포도송이 같기도 하고.” 강찬 엄마가 말하는 걸 확인하기 위해 함께 마당에 나가는데 아이들도 따라 왔다. “엄마, 뭔데? 뭔데?”
딱 보니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수도 없이 많이 보아오던 바로 그 똥. 주로 산속 수풀에서만 보다가 잘 가꾸어진 잔디 위에 있으니 참 안 어울린다. “영락없는 고라니똥이네. 아니 근데 고라니가 어떻게 이 집 마당까지 오지? 거참, 겁도 없는 고라니네.”
아랫집 마당은 4m 언덕 위에 있고, 완만한 도로 쪽으론 울타리가 있다. “언니, 고라니가 뭐야? 너구리 같은 동물이야? 설마 무는 동물은 아니지?” 강찬 엄마는 어린 시절 개에게 물린 적이 있어 동물을 꽤 무서워 한다. 이때 아이들이 나섰다. “엄마, 나 알아. 학교 뒷산 산책할 때 봤는데, 사슴 같은거야.” 사슴이라는 소리에 안심이 된 강찬 엄마는 마음을 내려 놓는다. 그리고 확인을 바라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봤다. “맞아, 작은 사슴이라고 생각하면 돼. 세계적으로 희귀한 우리나라 고유 종 사슴이야. 예민하고 겁이 많은 성격인데….”
강찬 엄마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바로 옆에 아랫집 텃밭이 눈에 띄었다. 그동안 이 밭의 작물들을 누가 훔쳐갔는지 알 것 같다. “자기네 상추랑 고춧잎이랑 누가 자꾸 훔쳐 간다고 하지 않았어? 아무래도 그 고라니 소행 같네. 하하하.” 작물을 먹으려고 마당으로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여길 어떻게 들어오는 거지? 도로 쪽 옆길엔 울타리도 쳐 있고 말이야.” 강찬 엄마가 말했다. “고라니는 높이뛰기 선수거든. 뒷산에서 골목길 따라 내려와서 울타리를 한번에 넘었을거야.” “언니, 근데 고라니가 왜 내려왔을까? 산에서 안 살고? 안 내려오게 할 수는 없는거야?”
얼마 전, 마을회관에서 만난 동네 어르신들이 “농사를 망치는 골칫덩이 고라니들”의 퇴치법을 물어오셨다. 어르신들이 몹시 화가 나 있어서 그때는 하고 싶은 말을 못했지만, 이번엔 용기를 내보았다. “우리 사람들이 산을 깎아 집을 지었잖아. 원래 야생동물들이 살던 그들의 땅과 집을 빼앗은 셈이지. 게다가 깊은 산도 많이 훼손돼서 고라니들의 먹이가 부족하거든. 그래서 배가 고파 자꾸만 마을로 내려오는거야. 월세라고 생각하고 그냥 좀 나눠주면 안될까?” 그러나 강찬 엄마의 표정은 어두웠다.
며칠이 지난 아침, 강찬 엄마가 길을 가던 나를 멈춰 세우곤 흥분하며 말했다. “언니, 나 봤어! 봤어! 오늘 아침을 차리려고 내려와 거실 창문 커튼을 걷는데, 고라니랑 눈이 딱 마주쳤지 뭐야. 깜짝 놀라서 잠시 바라만 보고 있었는데, 고라니가 돌아서더니 울타리를 단번에 껑충 뛰어 넘어 사라졌어. 진짜 잘 뛰더라. 그 착해 보이는 눈망울은 또 어찌나 예쁘던지….그래서 나 결심했어! 우리 밭에 상추를 좀 더 많이 심어야겠어. 아이들도 배고파하는 고라니가 불쌍하다고 나눠주자고 조르고… 언니 말대로 고라니들에게 월세를 줄테야.”
고라니 편으로 돌아선 강찬 엄마가 말을 이었다. 고라니의 맑은 눈망울에 폭 빠진 그는 자신과 같은 태도였던 사람들의 마음도 돌려놓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언니! 저번에 고라니 미워하는 마을 어르신들도 같이 설득해보면 어떨까? 모두가 조금씩만 나눠주면 고라니도 더 이상 배가 고프지 않을텐데 말이야.”
우리나라의 사슴들
한국에는 4종의 사슴류가 서식해요. 대륙사슴, 노루, 고라니, 사향노루예요. 대륙사슴은 지금은 백두산 인근에서만 볼 수 있어요. 크기가 가장 큰 꽃사슴이에요. 노루는 수컷의 머리에 뿔이 달리고 무늬가 없는 종이며, 고라니는 머리에 뿔이 없고 길쭉한 송곳니가 삐죽 튀어나온 독특한 사슴이에요. 마지막으로 이들 가운데 가장 작은 사슴으로 사향노루가 있어요. 고라니 외 3종은 심각한 멸종 위기종으로 깊은 산에서만 발견됩니다. 오직 고라니 단 한 종 만이 우리 이웃으로 남아 쉽게 만날 수 있어요.
마승애 동물행복연구소 ‘공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