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조류인플루엔자(AI) 항원이 검출된 경기도 화성시의 한 산란계 농장에서 방역 관계자들이 살처분 준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날벼락이나 참담하다는 말로는 부족해요. 그저 대역죄인이 된 느낌이라고밖에는….”
전국에서 발생하는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 피해를 겪은 농민들은 이런 말을 서로 짠 듯이 토해냈다.
4년 전 산란계 16만8천마리를 살처분했다가 이번에 또다시 19만3천마리를 ‘가슴에 묻은’ 경기도 여주시 한 농장주는 “이제 손들었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지난 6일 닭 천마리가 폐사해 신고한 뒤 이틀 만에 일사천리로 진행된 살처분 현장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올해만 그렇다면 어찌 버텨 보겠는데, 내년이라고 또 안 터지겠느냐. 이제 사료회사에서 압류 들어오고 농장이 경매처분되는 절차밖엔 남지 않았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 농장은 올해 경기도 지역에서 처음으로 조류인플루엔자가 발생했다. 1천여마리의 닭이 폐사해 간이검사 결과에서 ‘양성’ 판정을 받았을 때만 해도 ‘설마’와 ‘제발’을 되뇌며 정밀검사에서 판정이 뒤집히길 바랐다. 하지만, 허사였다. 농장주는 “폐사 직전, 닭 8만여마리를 새로 들여와 소득을 기대했는데 알 한번 낳지 못하고 모두 살처분됐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지난달 중순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 소식을 듣고 광역이동초소와 마을 입구 방역초소, 농장 입구 자체초소 등에서 3중 방역을 했지만, 재앙을 막지 못했다. 이 추운 겨울을 어떻게 나야 할지…”라며 망연자실했다.
날마다 사료와 물을 챙겨 주며 온갖 정성을 쏟아부었지만, ‘하늘에서 마구 던지는 폭탄’에 비유되는 조류인플루엔자 때문에 모조리 살처분해야만 하는 농민들의 정신적 상처도 심각하다. 당국은 혹시 모를 인체 감염 우려를 차단하기 위해 의심축(감염 의심 가축) 발생 즉시, 해당 농장의 닭과 오리를 살처분한다. 고병원성으로 확진될 경우 발생 농장 3㎞ 이내 가금농장에 대해서도 가차 없이 ‘예방적 살처분’을 진행한다.
농장주는 살처분 진행 과정에 직접 참여한다. 방역 관계자들과 함께 분주히 개체 수를 헤아리면, 살처분법 사전 교육을 마친 수십명의 방역요원이 보호복과 고글 등을 갖춰 입고 농장에 들어선다. 방역요원들은 살처분 과정에 쓰일 이산화탄소 가스 용기를 각 사육동 앞에 두고,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닭과 오리들을 한곳으로 내몬다. 대형 비닐과 마대자루에 이들을 마구 잡아 쓸어 담은 뒤, 가스를 주입한다. 말은 ‘안락사’지만, 죽어가는 닭과 오리는 물론 이를 지켜보는 이들에게도 ‘생지옥’이다.
충남 천안시에서 12만마리 규모의 산란계 농장을 운영하다 2016년과 2017년 두 차례 피해를 겪은 ㅂ씨는 “칠순이 넘은 아버지는 이를 지켜보시다 병석에 누우셨고, 나도 꿈속에서 닭이 달려들어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며 “결국 다 때려치우고 잠시 다른 일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배운 게 도둑질이라 다시 농장을 시작했지만, 지금은 또다시 그 공포와 두려움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털어놨다.
ㅂ씨는 “내가 키우던 살아 있는 닭을 내 앞마당에 묻고 그곳에서 다시 생계를 이어나가는 농민들의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며 “죄를 지은 것 같은 부담감 때문에 상담치료는커녕 밥도 못 먹고 시름시름 앓다 양계를 포기하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살처분된 닭과 오리는 농장 인근 구덩이로 옮겨지며, 온도조절·공기공급 장치를 통해 자연 퇴비(호열호기성 미생물 처리)로 처리된다. 또는 가금류의 사체를 고온멸균처리한 뒤 기름 성분을 짜내 재활용하고 잔존물을 퇴비나 사료 원료로 활용하는 렌더링 방식을 쓰기도 한다.
지난 11일 전남 장성의 한 오리농장 주변에서 방역당국 관계자들이 살처분 뒤 사체를 처리할 방식인 ‘렌더링’을 준비하고 있다. 이는 사체를 고온멸균처리한 뒤 기름 성분을 짜내 재활용하고 잔존물을 퇴비나 사료 원료로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연합뉴스
모두에게 아픔일 수밖에 없는 이런 살처분을 놓고 논란은 여전하다. 과연 이 방법밖에 없느냐는 것이다. 동물친화적인 방식으로 닭을 사육하는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의 산안마을농장은 지난 27일 성명을 내어 “예방적 살처분 행정명령 집행을 중지해달라”라고 정부에 요구했다. 이들은 중국이나 일본, 미국 등은 살처분을 제한적으로 하고 있다”며 “우리 정부는 (조류인플루엔자 발생지로부터) 거리만 따져 일괄적으로 살처분하는 무자비한 행정을 펴고 있다”고 말했다.
양계업계의 한 전문가는 “올해 유럽 등지에서 대규모 살처분이 있었다. 하지만 반경 3㎞ 전체를 살처분하는 나라는 많지 않다”고 전했다. 그는 “예방적 살처분이 방역에 도움을 주는 것은 맞지만, 일률적 적용으로 인한 부작용과 불만도 없지 않은 게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최근 충남 천안에서 40여마리의 관상용 거위를 키우는 농원에서 집단 폐사가 일어났는데, 반경 3㎞ 안에 있는 닭과 오리 60만마리를 살처분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전해 들었다. 관상용이라 출하할 일도 없을 터인데, 엄청난 피해가 뒤따르는 획일적 살처분을 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되물었다.
살처분에 따른 보상에도 불만이 많다. 역학조사 과정에서 농장 쪽의 과실이 없을 경우 시가의 80%를 보상하지만, 농가 피해 복구에는 어림없는 수준이다. 살처분과 매몰, 소독 등 방역 작업을 마치고 상황이 잠잠해질 때까지 최소 3~6개월간 새끼 닭·오리를 들이는 것도 불가능하다.
천안의 산란계 농장주는 “달걀은 매일 생산되는 것이기 때문에 6개월 정도 지나면 거래처가 없어진다. 자체적 판매능력이 없고 자체 브랜드도 없기 때문에 재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양계업은 완전 자동화 설비를 갖춰야 하는 고비용 장치산업이다. 본인 인건비와 농장 유지비를 생각하면 보상받는 비용은 최소 생계유지에도 힘든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살처분에 따른 보상체계는 발생 농장은 무조건 20%를 깎고, 두번 발생하면 다시 20% 깎고, 소독 준수 여부 따져 5% 또 깎아버린다. 10만마리를 살처분하고 8억원을 받았다고 보면, 6개월 후에 다시 닭을 들여와야 하는데 10만마리가 알을 낳을 때까지 8억원이 그대로 들어가야 한다. 나머지는 모두 다시 빚덩어리가 되는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환경운동가 출신인 이항진 여주시장은 “조류인플루엔자는 국제사회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풀어야 할 ‘또 다른 코로나19’라고 본다. 야생 조류가 물어다 던지는 폭탄 세례의 책임을 개별 농가의 방역 문제인 것처럼 바라보면 지금 같은 악몽은 되풀이하게 된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국제사회와 공조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김기성 이정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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