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0월 전남 순천열차사무소 소속 여객 차장이었던 김영기(가운데)씨와 동료들. 여순민중항쟁전국연합회 제공
여순사건 특별법의 제정이 늦어지면서 민간인 희생자 유족들이 2차 재심에 나섰다. 한국전쟁 초기 수감장소에서 집단학살을 당하거나 행방불명된 피해자의 유족들이다.
광주지법 순천지원은 13일 오후 이 법원 316호 법정에서 순천역 철도원 김영기(당시 23)씨와 여천군 농민 김운경(당시 23)씨 등 민간인 희생자 9명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재심 청구사건의 첫 공판을 진행한다. 재판부는 이날 향후 절차와 일정, 기록 제출과 증인 채택 등에 대한 유족과 검찰의 의견을 듣는다.
유족들은 지난해 5월12일 광주지법 순천지원에 재심을 청구했고, 8개월 만인 지난 1월29일 재심개시 결정을 받았다. 애초 청구인은 순천역과 대전형무소 관련 26명이었고, 이 가운데 9명이 먼저 공판을 진행하게 됐다. 대전형무소 관련 25명 중 8명은 재심을 시작했고, 13명은 심사 중이다. 4명은 제수나 조카 등 친인척이어서 신청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기각되자 광주고법에 항고했다.
순천역 관련 재심 대상인 김영기씨는 1948년 10월22일 기관사 장환봉(당시 29·지난해 1월 재심에서 무죄 확정)씨 등 동료들과 함게 진압군에 영장도 없이 체포됐다. 이어 22일 만인 같은해 11월14일 순천동초등학교에서 열린 군사재판에서 내란·국권문란죄 등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수감 중 목포형무소에 서울 마포형무소로 옮겼다가 50년 6월 말 한국전쟁 초기에 행방불명됐다.
대전형무소 관련 재심 대상인 김운경씨는 1948년 11월 여천군 율촌면 취적리 율현마을 자택에서 낙지잡이를 마친 뒤 아침을 먹다가 돌연 경찰에 연행됐다. 이어 12월13일 여수에서 열린 군사재판에서 포고령 위반죄 등으로 징역 20년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 갇혔다. 그는 2년 뒤인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6월27일~7월1일 대전시 산내동 골령골에서 다른 재소자 1400여명과 함께 학살을 당했다.
김영기씨의 아들 규찬(72·여순민중항쟁전국연합회 지도위원)씨는 “6·25 두달 전 어머니가 돌이 지난 아들을 보여주려고 아버지를 면회한 적이 있다고 한다. 좌도 우도 아닌 민간인한테 들씌운 내란죄의 굴레를 이제라도 벗겨내야 한다”고 호소했다. 김운경씨의 동생 운택(89· 6·25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 전남지회장)씨도 “형님이 돌아가신 것도 억울한데 남은 이들도 ‘빨갱이 가족’으로 몰려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억울함을 풀어줄 특별법을 기다리다 지쳐 결국 법정에 호소하게 됐다”고 전했다.
앞서 법원은 지난해 1월 순천역 기관사 장환봉씨의 재심 판결 때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를 개별적인 형사 절차로 바로잡기보다는 여순사건 특별법을 제정해 일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하지만 여순사건 특별법은 2001년 16대 국회 때부터 네차례 발의됐지만 20년 넘게 통과되지 못하고 번번이 폐기됐다. 21대 국회 들어서도 더불어민주당 소병철 등 의원 152명이 발의했지만 여야 이견으로 상임위인 행정안전위원회에 10개월째 계류 중이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19일 여수읍 신월리에 주둔했던 14연대 군인들이 제주4·3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진압군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전남 동부권과 지리산 일대의 민간인 등 1만여명이 숨진 현대사의 비극이다.
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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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민간인 희생자 72년 만에 무죄…재판부 “특별법 제정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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