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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조선인 북송’은 일본의 기만이었다

등록 2007-08-03 18:40수정 2007-08-03 18:57

‘조선인 북송’은 일본의 기만이었다
‘조선인 북송’은 일본의 기만이었다
디아스포라의 눈

나 정도의 나이가 되면 책을 읽고 심하게 마음이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직도 이 세상에 내가 모르는 게 많지만 인간사회의 냉혹함이나 추한 일에 대해서는 새삼 놀라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런 나도 최근 읽은 책 한 권 때문에 오랜만에 몸이 떨릴 정도로 분노를 느꼈다. 그 책은 테사 모리스 스즈키가 쓴 〈북조선으로의 엑소더스〉다. 내가 읽은 것은 일본어판(아사히신문사, 2007년 5월)인데, 한국에서도 번역 출판된 것인지 모르겠다.

이 책이 담고 있는 것은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1959년부터 시작된 재일 조선인의 북송 ‘귀국사업’은 실제로는 일본정부가 의도적, 계획적으로 자행한 추방정책이었다는 것이다. ‘귀국사업’의 결과 10만명 정도의 재일 조선인이 북조선으로 귀국했는데, 북조선 정부나 귀국자들의 생각이 어떠했든지 간에 적어도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추방’이었다.

2004년 6월 역사가인 모리스 스즈키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 교수는 최근 공개된 기록문서를 조사하기 위해 제네바 적십자 국제위원회를 찾아갔다. 거기서 그녀가 본 문서 내용은 그때까지의 ‘귀국사업’에 관한 설명을 완전히 뒤엎는 내용이었다. 공식적인 설명은, 재일 조선인들의 북조선 귀국 요구 움직임이 1958년에 시작됐으나 귀국운동이 더이상 무시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조된 1959년에야 일본 정부가 (마지못해) 필요한 중개를 국제적십자사에 의뢰한 것으로 돼 있었다. 그러나 실은 이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재일 조선인 쪽이 아니라 일본 쪽이 재일 조선인의 귀국 문제를 국제적십자사에 제기했다.

1955년 9월 제네바를 방문한 일본적십자사 외사부장 이노우에 마스타로는 국제적십자사 고위직원에게 재일 조선인의 북조선 귀국사업에 대한 중개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 방문 뒤 이노우에는 국제적십자사에 숱한 편지를 보내 재일 조선인은 “극도로 난폭한 성질”을 갖고 있다, ‘폭동’이 일어날지 모르겠다 따위의 말을 강조하면서 국제위원회에 신속한 결단을 내리도록 재촉했다.

재일 조선인이 일본 국내에서 생활하게 된 것은 일본이 조선을 식민 지배하고, 조선인에게 일본 국적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1945년 광복(일본 패전) 뒤 일본 정부는 재일 조선인의 일본 국적은 계속 유효하다는 견해를 앞세우면서 (조선인들의) 민족교육 등 민족적 권리들을 억압했으나, 패전 직후부터 일본 정부의 일관된 입장은 실제로는 한시라도 빨리 재일 조선인을 국외로 추방하는 것이었다.


“재일 조선인들의 북송 ‘귀국사업’은, 그들의 자발적인 요구 때문이었다고 알려진 것과 달리 일본 정부의 계획적인 추방정책이었다. 제국주의자였던 일본 적십자의 한 부장과 A급 전범이 이끌던 내각의 합작품이다. 그래놓고 지금에 와선 그때 귀국한 조선인들을 연민하거나 조소한다. 자국의 식민 지배 역사에 대한 성찰은커녕 위선이 증폭되고 있을 뿐이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와 함께 재일 조선인은 일본 국적을 박탈당하고 사실상 난민 상태로 내몰렸다. “외국인이 됐다”는 이유로 기본적 인권 보호 대상에서 제외됐다. 공영주택에 입주할 수도 없었고, 공무원이 되는 것도 금지당했다. 조선인 기업은 금융기관에서 융자를 받을 수도 없었다. 1959년에 시작한 국민보험이나 국민연금에 가입할 수도 없었다. 당시 재일 조선인 전체의 약 8할이 실업·반실업 상태였다고 한다.

더욱이 1956년에는 재일 조선인에 대한 생활보호지원이 대거 중단됐다. 이 복지삭감 정책은 모리스 스즈키에 따르면, 일관된 재일 조선인 추방정책과 연동해 계획적으로 추진한 혐의가 짙다.

이노우에라는 인물은 ‘어느 제국주의자의 초상’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다. 그는 견직물 상사의 지점장 아들로, 1899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명문 사립학교를 나와 도쿄대학 법학부로 진학한 뒤 외교관이 됐다. 외무성 근무 초기 몇년 동안 괴뢰국가 만주국에서 중국공산주의의 적대적 영향에 관한 조사임무를 수행했다. 일본 패전 뒤 오카자키가 외무대신(외상)이 됐을 때 외무성에 불려가 동아시아, 특히 중국의 공산주의에 관한 정보 수집에 전념했다. 그 뒤 1955년에 일본적십자사로 옮겨 갔다. 즉 그는 원래 ‘인도적 활동’과는 인연이 없는 대공정보활동 전문가였던 것이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류 엘리트 대학에서 쌓은 교양, 유창한 프랑스어 능력, 세련된 매너. 하지만 그런 외형과는 정반대로 그의 흉중에는 패전 전이나 후나 조금도 변함없이 피지배자에 대한 멸시와 저항하는 사람에 대한 적의가 가득 차 있었다. 이노우에는 재일 조선인의 국외추방에 이례적일 정도로 열의와 에너지를 쏟았다. 경탄을 금할 수 없을 정도로 집요하게 국제적십자사를 설득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귀국사업을 실현시켰다. 그와 같은 확신범적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몇만 몇십만에 이르는 사람들의 운명이 갈렸던 것이다. 추방당한 사람들의 분노와 슬픔 따위는 그들에겐 털끝만큼의 의미도 없었다.

1959년 2월 기시 노부스케 내각은 세계인권선언에 들어 있는 “누구든지 자국을 포함한 어느 나라에서든 떠날 수 있고, 또한 자국에 돌아갈 권리가 있다”는 조항을 확인하고 재일 조선인의 북조선 귀국을 실현시키기로 각의에서 결정했다. 만주국 고위관료와 도조 히데키 내각 각료를 지낸 A급 전범이 후안무치하게도 ‘세계인권선언’을 자신의 무자비한 추방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용해먹은 것이다.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성공회대 연구교수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성공회대 연구교수
이 위선은 그 뒤에도 지금까지 길게 이어지고 있는 일본 국민 다수의 자기기만의 한 원인이 됐다.

아베 신조 정권은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의 재일 조선인 정책을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현재 일본 국내에서 고조되고 있는 북조선 배싱(때리기) 여론 중에는 그때 북조선에 귀국한 재일 조선인을 연민의 눈길로 보거나 조소하는 언설도 많이 발견된다. 거기엔 자국의 식민 지배 역사를 깊이 성찰하는 시각도, 전후 재일 조선인 추방정책에 대한 자각도 전혀 없다. 위선과 자기기만이 반복되고 증폭되고 있을 뿐이다.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서경식/도쿄경제대 교수·성공회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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