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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몰입의 즐거움으로 이끄는 소녀도둑

등록 2008-02-29 19:38

〈책도둑 1, 2〉
〈책도둑 1, 2〉
한미화의 따뜻한 책읽기 /

〈책도둑 1, 2〉
마커스 주삭 지음/문학동네·1만1000원

‘긍정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여가를 수동적 여가와 능동적 여가로 나눈다. 멍하니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수동적 여가요, 피아노를 치거나 책을 읽는 일은 능동적 여가다. 능동적 여가는 처음에 어느 정도 집중력을 쏟아 부어야 재미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불편하고 힘든 시동 에너지가 필요한 일을 할 때 사람들은 몰입 경험을 하게 된다. 책읽기는 그저 흘러가는 영상의 세계와 달리 능동적으로 책장을 열고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좀처럼 속내를 보여주지 않는다. 심리학자는 이런 어려움을 두고 시동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일종의 무아지경인 몰입의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다고 설득한다.

주변의 책벌레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재미있는데 사람들이 왜 책을 안 읽는지 몰라” 하고 말하지만 솔직히 책읽기는 수고스러울 때가 많다. 특히 시동 에너지가 필요한 처음이 그렇다. 그래서 대중소설 작가들은 어떻게든 손에 잡은 책을 놓을 수 없도록 처음부터 재미와 강렬함으로 독자를 유혹한다.

1, 2권을 합하여 무려 798쪽이나 되는 〈책도둑〉을 읽으며 칙센트미하이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시동 에너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분량도 그렇지만 시도도 낯설다. 예컨대 소설의 화자는 사신이다. 인간에게 진실이란 오로지 ‘죽을 것’이라는 정답 한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철학적 사신이자, 때로 인간의 영혼을 거두러 가서 ‘아이는 내 심장을 딛고 간다. 나를 울게 한다’라고 말할 줄 아는 연민을 간직한 사신이기도 하다. 사신을 화자로 삼은 덕분에 소설은 결론을 향해 질주하지 않고, 멈칫거리고, 의미를 재해석하며 때로는 후진하며 더디게 전진한다.

소설은 나치 독일 치하, 절망의 시대를 사는 한 소녀가 책을 훔치고, 읽고, 쓰며 희망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공산주의자인 부모 대신 양부모에게 맡겨진 리젤이라는 소녀는 남동생의 장례식 날, 땅에 떨어진 〈무덤 파는 사람을 위한 안내서〉라는 책을 처음으로 훔친다. 이 책을 통해 소녀는 글을 배운다. 그리고 한 권, 두 권, 모두 여섯 권의 책을 더 훔쳐 읽는다. 책에서 잊을 수 없는 부분은 소녀가 혼자 책을 읽는 것을 넘어 사람들과 책읽기를 공유하는 장면들이다.
한미화의 따뜻한 책읽기
한미화의 따뜻한 책읽기
지하실에 숨었던 유대인 청년 막스와의 우정도 책을 통해 이뤄졌다. 대피소에서 두려움에 찬 사람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었던 것도 소녀가 책을 읽어 주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살아 남지못한 그 시절, 소녀는 책읽기를 통해 살아가는 이유를 찾았고 살아남았다. 국내에서는 일반 성인을 대상으로 출간되었지만, 〈책도둑〉은 청소년 문학이다. 소설을 읽으며 시동 에너지가 자못 필요한 이 두꺼운 책을 다른 나라에서는 청소년들이 읽는구나 싶어 놀랐다. 국내 청소년문학의 보이지 않는 금기 중 하나는 200쪽을 넘지 말라는 주문이다. 입시에 발목이 잡힌 청소년들이 두꺼운 책을 읽을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영어공부도 필요하지만 몰입을 경험하는 건 충만한 삶을 사는 데 더 필요한 자질이 아닐까.

한미화 출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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