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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45만원짜리 공연과 FM 라디오 문화장벽, 돈 핑계는 마세요

등록 2006-05-28 20:00

저공비행
보리스 에이프만이 다시 우리나라를 찾는다. 안 갈 수가 없어서 얼마 전에 에스(S)석 좌석을 예약했는데, 한 장당 5만원이 들었다. 불평하는 게 아니다.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의 좌석은 비교적 싼 편이다. 가장 좋은 자리를 예약해도 10만원 안쪽으로 해결된다. 작년에 온 베를린 필의 가장 비싼 좌석은 45만원, 가장 싼 좌석은 25만원이었다.

슬슬 문화 빈부격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법 하다. 45만원이라면 어떤 사람의 한 달 월급일 수도 있는 돈이다. 공연 하나 보기 위해 이만큼의 돈을 쓸 수밖에 없다면 문화생활은 럭셔리 계급의 전유물인가? 물론 베를린 필의 45만원은 좀 심했다. 하지만 여러분이 열성적인 공연 문화 애호가이고 돈지갑도 넉넉하다면 한 달에 100만 원 이상 깨지는 건 흔한 일일 거다. 솔직히 말해볼까? 부러워 죽겠다.

그러나 오늘은 다른 식으로 생각해보기로 하자. 좋다. 45만원을 들여 베를린 필하모닉의 공연에 갈 수 없다면 다른 대안은 없을까? 물론 있다. 사이먼 래틀과 베를린 필은 지금까지 수많은 음반들을 냈고 그것들은 레코드 가게에서 비교적 이성적인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물론 실제 공연의 생생한 맛은 없다. 하지만 이 ‘통조림 음악’에는 통조림만의 장점도 있다. 현장감은 부족할지 몰라도 지휘자와 악단의 의도는 더 정확하게 반영되어 있다. 사전 정보만 충분히 확보한다면, 연주의 질도 보장된다. (45만 원 짜리 공연이 언제나 좋기만 한 건 아니다.) 음질은? 물론 여러분이 까다로운 귀를 가진 오디오파일이라면 제대로 된 시스템을 구축하느라 몇 천만 원을 날릴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에겐 동네에서 몇 십만 원 주고 산 오디오로도 충분하다. 그 정도도 투자하기 싫다고? 그럼 에프엠(FM)라디오라는 것이 있다. 난 지금 한국방송 1라디오에서 방송하는 말러의 4번 교향곡을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이 호사를 누리는 동안 내가 한국방송에 땡전 한 푼이라도 냈을까? 그래도 생음악이 고프다고? 최근 들어 지자체 오케스트라의 수준이 얼마나 높아졌는지 확인해보는 게 어떨까? 내가 자주 가는 부천 필의 예를 들어볼까? 이달 27일에 부천필은 베버의 오뤼안테 서곡, 슈만의 라인 교향곡과 가단조 피아노 협주곡으로 구성된 꽤 알찬 레파토리로 공연을 하는데, 가장 비싼 좌석이 만원이고 가장 싼 좌석은 3천원이다. 물론 부천시민회관은 그렇게까지 이상적인 공연무대도 아니고 학교 숙제 때문에 억지로 온 동네 아이들 때문에 분위기가 좀 소란스럽긴 하지만 가격대비를 고려해보면 이건 거의 거저다. 웬만한 영화보다 낫다.

종종 우리는 기계문명과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얼마나 굉장한 사치를 안겨주었는지 잊고 있는 경우가 있다. 18세기 유럽 사람들은 우리가 라디오 스위치만 켜도 들을 수 있는 음악을 듣기 위해 엄청난 돈을 들여 오케스트라를 운영하거나 극장에서 대여섯 시간 동안 계속되는 엄청난 공연을 견뎌야만 했다. 20세기 초만 해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연애대위법’의 에드워드 경에게 지금의 에프엠 라디오와 시디가 있었다면, 그렇게 사랑하는 바흐의 음악을 연구실에서도 만끽할 수 있었을 것이고, 괜히 위층에서 열리는 음악회 중간에 굶주린 개처럼 뛰어들어 폼을 망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문화적 빈부격차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게 없다면 이 글을 쓰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건 극복할 수 없는 엄청난 장벽 따위는 아니다. 베를린 필의 45만 원 짜리 좌석이 문화의 가치만을 상징하는 건 아니다. 그 안에는 음악과 무관한 엄청난 양의 스노비즘(속물주의)과 경제력의 과시도 포함되어 있다. 라디오를 켜기만 해도 말러 4번 교향곡 전곡을 들을 수 있는 이 기술문명의 시대에, 문화적 빈곤의 제1차 책임자는 늘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다. 물론 모두가 예술 애호가일 필요는 없다. 단지 45만 원 짜리 표 값을 그 핑계로 들이밀지는 말라는 말이다.

영화평론가/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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