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규장각 (사진=이정국 기자)
총독부 시절, 1000여권 대출뒤 ‘한일협정’ 빌미 ‘입닦아’
조선왕조실록 환수위, ‘규장각’ 소극적 고문서 관리 공개
조선왕조실록 환수위, ‘규장각’ 소극적 고문서 관리 공개
“규장각은 이토 히로부미의 도서대출 사실을 40년이 지나도록 침묵하고 있다. 명백한 직무유기다.”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회(공동의장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 봉선사 주지 철안 스님·환수위)은 10일 “조선왕조실록의 귀환을 환영하며”란 성명서를 내어 “규장각은 약탈문화재 환수운동에 동참하라”고 주장했다.
환수위는 성명에서 “차질없이 실록을 반환받은 서울대에 감사한다”며 “그러나 도쿄대의 기증의사를 신중한 고려없이 결정한 서울대의 태도는 역사의식이 결여된 것으로 남북한 불교도, 일본 동포사회, 국민들의 지지를 통해 진행된 ‘실록반환’ 의미를 퇴색시키고 말았다”고 서울대를 비난했다. 환수위는 “규장각 도서를 이토 히로부미가 강제 반출해간 사실을 확인했고 아직까지 이 도서들이 돌아오지 못한 것을 확인했다”며 “규장각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는지, 아직까지 공식 문제제기를 못하고 있다. 이는 명백한 직무유기다”고 주장했다. 환수위는 “규장각이 실록을 소장하고 싶다면 민간운동의 성과에 기대어 자기 몫을 챙기려는 자세를 버리고 이토 히로부미가 대출한 규장각 도서의 환수에 나서야 ‘행동하는 지성, 양심있는 지성’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고 본다”고 서울대쪽의 자성을 요구했다.
어떻게 알려지게 됐나
1965년 서울대 규장각 도서 정리중 총독부 서류철 조사도중 ‘발견’ 이토 히로부미가 규장각 도서를 일본으로 가져갔다는 사실은 1965년 처음 밝혀졌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백린 열람과장이 1965년 규장각 도서를 정리하다가 1911년의 조선총독부 취조국 서류철을 발견하게 된 게 발단이었다. 이 서류철은 규장각 장서를 접수할 당시와 관련된 문서였다. 서류철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으로 가져간 책의 목록과 이를 보관하고 있던 궁내부대신 와타나베가 당시 조선총독 데라우치에게 “이토 히로부미가 한·일 관계사항 조사목적으로 가져온 서적을 ‘궁내성 도서료’에 보관하고 있고 이 책들은 일본의 왕족·공족의 실록 편수에 참고로 필요하며, 일본의 제실도서관에도 없는 것들이니 모두 궁내성으로 양도하였으면 한다”는 내용의 공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토대로 1968년 백린은 〈서지학〉창간호에 ‘이등박문에 대출된 규장각 도서에 대하여’란 논문을 발표하게 된다. 이후 1972년 <서울신문>에 이구열씨가 ‘문화재 비화’ 시리즈를 연재하면서 다시 이 사실이 언급되었고 1998년 연합뉴스(당시 연합통신)의 보도가 있었으나 곧 잠잠해졌다. 2002년에는 서울대 국사학과의 이상찬 교수가 기존 백린의 논문에서 틀린 점을 바로잡고 다시 ‘이등박문이 약탈해간 고도서 조사’(2002, 서울대 인문대학 <한국사론> 48집)란 논문을 발표하게 된다. 이 논문에선 백린이 간과했던 총독부의 또 다른 공문(궁내성 공문을 받은 총독부가 이토가 가져간 77종 1028책 중 24종 200책은 양도할 수 있지만 53종 828책은 돌려줄 수 없다는 내용의 공문)들과 이토가 가져갔던 책이 기존 백린의 33종 563책이 아니라 77종 1028책이라는 사실이 새로 드러났고, 한 권도 돌아오지 못한 걸로 알려져 있던 책이 1966년 한일협정 당시 11종 90책 돌아온 사실도 추가됐다. 하지만 이 뒤에도 별다른 조처는 취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환수위와 서울대와의 협상자리에서 우연히 이 얘기가 나오게 된 후로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문제제기 이후 수십년간 당국 논의와 파악 시도조차 안해
논문 쓴 이상찬 교수 “한일 협정으로 인해 문화재 반환 어렵다”
처음 제기된 문제가 아니지만 당국은 전혀 손을 쓰지 않고 있다. 이런 사실이 있었는지조차 몰랐던 것이 확인됐다. 해당기관인 규장각에선 논문을 쓴 당사자인 이상찬 교수 이외에는 이 사실 자체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규장각 부원장인 송철의 교수는 “공식적으로 규장각 차원에서 논의가 된 적은 없다. 자세한 것은 이상찬 교수에게 물어보라”고 말했다. 이밖에도 조은수 교육·교류부 부장, 김종은 정보자료관리부장, 김윤제 기관연구부장 모두 “잘 모르겠다. 공식적으로 논의된 적은 없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정작 2002년 논문을 쓴 이상찬 교수는 이런 상황에 부담스러워 했다. 이 교수는 “규장각이 나태하거나 직무를 유기한 것이 아니라 1966년 한일협정 당시 “더이상 문화재 반환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조항 때문에 선뜻 규장각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국가기관에서 체결한 조항을 국가기관인 규장각이 깨뜨릴 수 없는 아주 입지가 좁은 상황”이라며 “개인적으로 계속해서 사실을 추적하고 있고 궁내청의 도서목록을 입수해 대조해본 결과 실제로 일본 궁내성에 관련 도서의 이름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이교수는 “실제로 궁내청에 들어가 책 상태를 확인한 후 규장각의 도서가 확인되어야 공식적인 반환을 요구할 수 있다”며 “오히려 성급한 요구는 일본이 책을 영원히 감춰버리는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마지막으로 “책은 꼭 돌아와야 하며 일본에 직접가서 확인하고 책을 찾아오고 싶다”고 말했다. “일본 궁내성에 반출 규장각 도서 목록 있는 것 확인”
하지만 규장각이나 서울대 차원에서 공식적인 지원과 협의가 있었는지에 대한 물음에는 즉답을 회피했다.
문화재청도 같은 상황이었다. 문화재청도 첫 논문이 나온 지 40년 가까이 흘렀는데도 실태 파악조차 하지 못했다. 최근 환수위의 문제제기를 통해 최근 실태조사를 착수한 상태다. 문화재청 강경환 문화재교류과장은 “최근 환수위쪽의 문제제기를 듣고 실태 파악을 하고 있다”며 “그 전에는 이런 사실에 대해 알려지지 않았고 공식논의된 적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한·일협정 문제가 있어서 정부 차원에서 공식논의가 가능한지도 검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문화관광부 문화정책국의 노세호 서기관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경우 문화재청이 담당해야 옳지만 이런 문화재 지정이 안되어 있는 도서의 경우 원래의 주인인 규장각에서 반환업무를 추진해야 하는것이 옳다”고 말했다. 노 서기관 역시 “이토의 도서 반출건에 대해선 처음 들어본다”고 말했다.
〈한겨레〉온라인뉴스팀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1965년 서울대 규장각 도서 정리중 총독부 서류철 조사도중 ‘발견’ 이토 히로부미가 규장각 도서를 일본으로 가져갔다는 사실은 1965년 처음 밝혀졌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백린 열람과장이 1965년 규장각 도서를 정리하다가 1911년의 조선총독부 취조국 서류철을 발견하게 된 게 발단이었다. 이 서류철은 규장각 장서를 접수할 당시와 관련된 문서였다. 서류철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으로 가져간 책의 목록과 이를 보관하고 있던 궁내부대신 와타나베가 당시 조선총독 데라우치에게 “이토 히로부미가 한·일 관계사항 조사목적으로 가져온 서적을 ‘궁내성 도서료’에 보관하고 있고 이 책들은 일본의 왕족·공족의 실록 편수에 참고로 필요하며, 일본의 제실도서관에도 없는 것들이니 모두 궁내성으로 양도하였으면 한다”는 내용의 공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토대로 1968년 백린은 〈서지학〉창간호에 ‘이등박문에 대출된 규장각 도서에 대하여’란 논문을 발표하게 된다. 이후 1972년 <서울신문>에 이구열씨가 ‘문화재 비화’ 시리즈를 연재하면서 다시 이 사실이 언급되었고 1998년 연합뉴스(당시 연합통신)의 보도가 있었으나 곧 잠잠해졌다. 2002년에는 서울대 국사학과의 이상찬 교수가 기존 백린의 논문에서 틀린 점을 바로잡고 다시 ‘이등박문이 약탈해간 고도서 조사’(2002, 서울대 인문대학 <한국사론> 48집)란 논문을 발표하게 된다. 이 논문에선 백린이 간과했던 총독부의 또 다른 공문(궁내성 공문을 받은 총독부가 이토가 가져간 77종 1028책 중 24종 200책은 양도할 수 있지만 53종 828책은 돌려줄 수 없다는 내용의 공문)들과 이토가 가져갔던 책이 기존 백린의 33종 563책이 아니라 77종 1028책이라는 사실이 새로 드러났고, 한 권도 돌아오지 못한 걸로 알려져 있던 책이 1966년 한일협정 당시 11종 90책 돌아온 사실도 추가됐다. 하지만 이 뒤에도 별다른 조처는 취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환수위와 서울대와의 협상자리에서 우연히 이 얘기가 나오게 된 후로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문제제기 이후 수십년간 당국 논의와 파악 시도조차 안해
논문 쓴 이상찬 교수 “한일 협정으로 인해 문화재 반환 어렵다”
1911년 일본 궁내성이 조선총독부에 이토히로부미가 가져온 규장각 도서의 양도를 요구한 공문 사본(출처: 이상찬, ‘이등박문이 약탈해 간 고도서 조사’, 2002, 서울대 국사학과 한국사론 48집)
처음 제기된 문제가 아니지만 당국은 전혀 손을 쓰지 않고 있다. 이런 사실이 있었는지조차 몰랐던 것이 확인됐다. 해당기관인 규장각에선 논문을 쓴 당사자인 이상찬 교수 이외에는 이 사실 자체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규장각 부원장인 송철의 교수는 “공식적으로 규장각 차원에서 논의가 된 적은 없다. 자세한 것은 이상찬 교수에게 물어보라”고 말했다. 이밖에도 조은수 교육·교류부 부장, 김종은 정보자료관리부장, 김윤제 기관연구부장 모두 “잘 모르겠다. 공식적으로 논의된 적은 없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정작 2002년 논문을 쓴 이상찬 교수는 이런 상황에 부담스러워 했다. 이 교수는 “규장각이 나태하거나 직무를 유기한 것이 아니라 1966년 한일협정 당시 “더이상 문화재 반환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조항 때문에 선뜻 규장각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국가기관에서 체결한 조항을 국가기관인 규장각이 깨뜨릴 수 없는 아주 입지가 좁은 상황”이라며 “개인적으로 계속해서 사실을 추적하고 있고 궁내청의 도서목록을 입수해 대조해본 결과 실제로 일본 궁내성에 관련 도서의 이름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이교수는 “실제로 궁내청에 들어가 책 상태를 확인한 후 규장각의 도서가 확인되어야 공식적인 반환을 요구할 수 있다”며 “오히려 성급한 요구는 일본이 책을 영원히 감춰버리는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마지막으로 “책은 꼭 돌아와야 하며 일본에 직접가서 확인하고 책을 찾아오고 싶다”고 말했다. “일본 궁내성에 반출 규장각 도서 목록 있는 것 확인”
이토히로부미. 1906년 조선에 통감부가 설치되자 초대 통감으로 부임, 한국 병탄의 기초공작을 수행하였다. 1909년 통감을 사임하고 추밀원 의장이 되어 만주시찰을 겸하여 러시아 재무대신과 회담차 중국 하얼빈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서 안중근의사에게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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