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동의 동서횡단
“한-미 유대 복원 없이 평화체제 전환은 위험”하다는 한 유력신문 21일치 사설을 보고, 마침내 반세기를 넘긴 정전=비평화체제가 끝나고 평화체제가 되긴 될 모양이라는 생각을 했다. 미국 중간선거 공화당 패재 효과인가. 우리는 자그마치 50년 이상, 거의 두 세대에 걸쳐 평화체제가 아닌 위험한 세상을 지겹도록 살아왔다. 정상과 비정상이 뒤바뀐 걸 느낄 수도 없을 정도로 오랜 세월이었나 보다. 도대체 평화체제로의 전환이 왜 안전에서 위험으로 빠지는 길이란 말인가. 사설은 장황하게 그 이유를 설명했지만, 요령부득이다. ‘평화체제 전환 없는 한-미 유대’야말로 얼마나 부서지기 쉽고 또한 일방적인가.
그런 사설이 나오기 사흘 전에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쪽은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경우” “한국전의 종료를 선언하고 경제협력과 문화·교육 분야 등의 유대를 강화”할 수 있다는 뜻을 표명했다. 같은 시각 송민순 청와대 통일외교안보 정책실장은 “두 정상은 북한이 핵을 폐기하는데 상응해 취할 수 있는 대북 경제지원, 안전보장, 평화체제 문제에 대해 심도있게 의견을 교환했다”고 발표했다. 21일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19일 열린 미-중 정상회담에서도 조지 부시 대통령은 후진타오 국가주석에게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한국전쟁 종결을 공식 선언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런데 여기에다 대고 ‘북한이 설사 핵을 포기하더라도 한-미 유대가 먼저 복원(끊어지기라도 했나?)되지 않으면 절대 한국전쟁 종결하면 안돼!’라고 외치다니.
그건 그렇다 치고, 미국의 얘기를 과연 믿을 수 있을까? 미국은 지난해 베이징 6자회담 때도 거의 꼭같은 내용의 ‘9.19 공동성명’에 합의했다가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사실상 뒤엎었다. 하필 그때를 골라 위조달러 지폐 유통과 마약거래대금 세탁 등을 이유로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은행 북한계좌를 동결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호주 국립대학 교수 개번 맥코맥은 <범죄국가, 북한 그리고 미국>(이카루스미디어, <녹색평론> 2006년 11~12월호에서 재인용)에서 이렇게 평했다. “2005년 9월의 합의는 비록 모호하고 불완전하기는 해도 국제법에 합당한 원칙을 선언했고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역내 국가들의 이해를 인정했으며, 북한의 불만에 공감했다. 하지만 베이징 협상 테이블에서 이룬 듯했던 ‘상호존중’은 …협상대표들이 가방을 싸들고 베이징을 떠나자마자 증발해버렸다.” 그리고 맥코맥은 미국이 그때 들이댄 북한의 불법행위 증거라는 게 얼마나 믿기 어려운 것인지, 왜 그렇게 했는지, 그 ‘증발’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자세히 썼다.
그랬던 미국이 다시 ‘9.19 공동성명’ 이행하자고 나섰다. 그것도 이해당사국 정상들을 직접 만나 확약하는 파격적인 모양새를 갖추고. 더 두고 봐야겠지만, 중간선거 패배 이후 확실히 뭔가 달라졌다. 골수 네오콘 편에 섰던 <역사의 종말> 저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부시 2기 정권이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고 일찌기 내다봤다. <기로에 선 미국>(America at the crossroads. 랜덤하우스)에서 패권주의자 후쿠야마는 뻣뻣한 네오콘 방식에 문제가 있었음을 자인하면서 조지프 나이가 주장했던 ‘소프트 파워’식 부드러운 패권 추구를 권했다. 중간선거 패배 직후 럼스펠드 국방장관을 경질하고 현실주의파인 ‘이라크 연구그룹’을 가까이하고 있는 부시 정권도 작동불능에 빠진 네오콘에 거리두기를 가속화하고 있다. ‘폭군’에 ‘불량국가’, ‘악의 축’과 다시 협상하자는 것도 그 유력한 증거다. ‘클린턴만 빼고 다 괜찮다(ABC)’고 호기를 부렸던 부시 정권도 결국 막판에 마음바꿔 국무장관을 평양에 보냈던 클린턴 정권 따라가려나.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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