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이제 유리에게 유일하게 남은 대안이다. 지금까지 육지와 도시를 개발한 방식으로 접근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해안 절경엔 부유층의 별장과 그들이 이용하는 골프장이, 주변부엔 빈곤층이 거주하는 곳으로 개발되어서는 안 된다. 도심의 교외로 개발되어서도 안 된다. 땅 투기가 판치는 곳, 학군으로 구분되는 곳이 되어서도 안 된다. 2006년 초 남해 금산 드므개 마을 앞 바다 풍경. <한겨레> 자료사진
대륙형 개발 앞다투다 도시적 삶에 숨막혀
인간·문화가 숨쉬는 지중해 다시 찾아
우리 해안도 ‘닫힌’도시개발 방식 말고
주민 참여 인간·바다 공존의 접근을
인간·문화가 숨쉬는 지중해 다시 찾아
우리 해안도 ‘닫힌’도시개발 방식 말고
주민 참여 인간·바다 공존의 접근을
안과 밖 /
지중해는 맑고 푸르다. 여름이면 프랑스 사람들은 물론 유럽 사람들 대부분이 지중해로 달려간다. 피서 시즌이 되면 당연히 휴가를 가야하고, 피서를 못갈 경우 이웃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무서워 외출도 못하고 집안에만 머문다. 피서를 못가는 것은 너무나 창피한 일이고, 지중해에 다녀오지 못하는 것은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한국사람 일본사람 중국사람들도 지중해를 찾는다.
사람들은 지중해에 와서 지중해를 바라보며 지중해에서 수영을 하며 지중해에 감탄을 해댄다. 왜 지중해는 녹색인가? 왜 파란 색인가? 왜 흰빛이 나는가? 왜 지중해는 청정한가? 왜 지중해 바다와 연안은 개인이 소유를 못하는가? 왜 지중해에는 양식장이 없는가? 횟집이야 없다 치더라도 왜 음식점들이 모두 해변에서 떨어져 있는가? 왜 모래사장에서 멀리 떨어진 육지 쪽에 파라솔을 세우는가? 파라솔을 모래사장에 촘촘하게 박으면 그 게 다 돈이 될 텐데….
지중해는 일찌기 지중해 주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그들은 여기서 태어나 물고기를 잡고 상품을 교역하고 전쟁을 하다가 죽었다. 지중해는 유럽, 북아프리카, 서아시아, 발칸반도, 흑해와 인접해 있으면서 오랜 시간의 누적을 통해 인간, 물품, 문화가 소통되는 개방된 네트워크였다. 한국해양대학교의 정문수 교수는 지중해를 하나의 개방된 해역 네트워크로 보고 그 결절점인 항구들을 외부에 개방된 열린 공간으로 보았다. 지중해의 여러 항구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서로 교류하면서 다층적이고 다원적인 문화를 만들어 내었다는 것이다. 지중해의 항구들은 역내의 각 지역을 연결시켰을 뿐만 아니라 먼 곳에 있는 역외의 거점과도 연결되어 광범한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말하자만 집결과 확산의 기능이 동시에 작동하는 공간이었다는 것이다.(「근대 지중해 항구도시」 정문수) 지중해 항구들은 지중해 연안 국가들의 국경 안에 가두어진 폐쇄적 공간이 아니라 개방된 초국가적 공간이었고 더구나 그것은 문화공간이었다. 중간 중간이 터져 있어 특정 국가의 국경으로 기능하는 대신 지역민들이 상호 교류하는 공간 기능을 했다.
지중해는 ‘열린 네트워크’
지리상의 발견 이후 지중해 연안 사람들은 지중해를 버리고 대서양으로, 대륙으로 나아갔다. 에스파냐,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가 대서양으로 나아가자 지중해는 더 넓은 유럽적 세계사의 일부로 포함되면서 격이 떨어졌다. 사람들은 당시까지 자신들의 파트너였던 지중해를 버리고 대양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 결과 18~19세기에 이르면 지중해는 문명세계의 중심에서 낙후된 지역으로 전락했다. 더구나 세계가 대륙국가 중심으로 재편되고 철도와 육로가 발달하면서 지중해 해양 네트워크들은 육지 교통로의 보조수단으로 전락하고 점차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이제 지중해는 대륙의 도시들을 연결시켜주는 단순한 도구로, 근대 국민국가의 대두와 함께 특정 국가의 소유로 구획되고 분절되면서 원래의 기능을 상실해버렸다.
그런데, 최근 사람들이 지중해로 되돌아오면서 지중해는 오래 동안 역사의 조연으로 있다가 주연 자리를 되찾고 있다. 사람들은 숨이 막히는 대도시에, 비좁은 육로에, 성냥 곽 같은 좁은 아파트에, 도시의 땅 투기에 넌더리가 나서 삶의 공간을 다른 곳에서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산으로 달려갔지만 산 또한 도시의 연장임을 목격했다. 산에도 이미 빈부의 격차가 격심하게 존재하고 있었고, 부유한 사람들의 별장과 콘도와 고급 호텔이 있었고, 땅 투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부자들이 이미 경계를 쳐 놓고 있었다.
사람들은 바다, 그 옛날 선조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지중해로 방향을 돌렸다. 휴가의 장소로, 피서지의 장소로, 관광지로 지중해를 선택했했다. 이곳에서 수중탐사를 하고 해저유물을 찾고 해양박물관을 가고 고대문화의 유산을 확인했다. 지중해에서 살기 위해, 다시 교역을 하기 위해, 비행기 대신 배를 타고 아프리카로 가기 위해, 지중해 해상 네트워크를 복원하기 위해 지중해로 되돌아왔다. 그들은 그 동안 지중해를 무시했고 경멸하기까지 하다가 뒤늦게 지중해의 소중함으로 알고 되돌아 온 것이다. 그들은 처음에 고급 호텔들과 화려한 영화제, 화려한 요트들을 보면서 주눅이 들었고 지중해도 도시와 닮아버린줄 알고 실망을 했지만, 지중해에는 아직도 도시와 닮지 않은 곳, 사람들이 함께 살아갈 공간, 인간과 바다가 공존하는 곳이 많이 남아 있다는 걸 알아챘다.
우리에게도 바다가 있고 육지로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동서남해안으로 되돌아오려 한다. 서해시대가 열렸다면서 장보고의 해상 네트워크를 복원하라는 요구가 쏟아졌다. 충무공이 왜군을 물리친 격전지들을 관광지로 개발하면 장사가 된다면서 경상남도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내놓았다. 부산시는 부산항을 동북아의 허브 항구로 삼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울산시는 일본에 간 남편을 기다리다 돌이 되었다는 곳을 관광지로 개발하고 신라시대의 해양활동을 복원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어떤 기업체는 남해안의 한려수도를 크루즈 관광지로 개발하여 떼돈을 벌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세계 어디에 내어놓아도 당당할 수 있는 우리의 이 소중한 해양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를 위해선 우리가 그동안 생각하던 바와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바다에 접근해야 한다. 근대국가가 성립한 이후 해양 정치학자들은 민족 또는 국가들을 해양지향군과 내륙지향군으로 대립시킨 뒤, 글로벌 해양전략론을 제창했다. 대표적인 사람이 알프레드 마한(Alfred Mahan)이다. 마한은 해양을 대교통로로 정의하고 이 교통로를 이용하여 무역에 종사하는 자국 상선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정부의 임무라고 규정했다. 해양국가란 자고로 생산하고 수출해서 경제번영을 달성해야 하며, 무역은 해군을 주체로 한 해양력의 확보로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국내생산, 해외무역, 식민지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이 3가지를 가장 잘 결합시킨 수단이 해상의 안전보장, 다시 말해 해양력 확보라고 파악했다. 그의 이론은 미국의 공식 해양전략이 되었고, 미국을 따르는 많은 국가들도 금과옥조인양 받들고 있다. 그러나 마한의 해석은 근대 국민국가 시기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 결과 해양은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정의되어, 바다와 항구는 육지의 식민지로 전락해버렸고 타자화되었으며 국가들의 영토로 파편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국민국가에서 중앙과 지방의 관계가 설정됨에 따라 항구도시들은 열린 공간으로서의 역동성을 제한받아 폐쇄적 공간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우리의 바다를 마한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데서 진일보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도시를 개발하는 식으로 해양에 접근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지방자치단체들이 육지를 개발하는 방식으로 해양을 개발해서도 안 된다. 해안의 절경에 부유한 계층이 살고 주변부에 가난한 계층이 거주하는 곳으로, 부유한 사람들의 별장지역과 골프장으로 개발되어서는 안 된다. 거리가 협소하고 건물이 높은 도심의 교외로 개발되어서도 안 된다. 땅 투기가 판치는 곳, 학군으로 구분되는 곳이 되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해양은 오래 전부터 우리 모두의 것이며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온 곳이며 현재 우리에게 유일하게 남은 대안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다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돼야 한다. 지자체별 개발 해양 망쳐 그러나 현실은 딴판이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한반도의 해안이 지닌 자연과 역사성 마구잡이로 훼손하고 있다. 조선시대 수군진들을 복원한다면서 기적처럼 남아 있는 유적을 콘크리트로 발라버렸다. 어느 섬에서는 수군 만호진 성터를 벽으로 삼아 개집들을 지어 놓고 있다. 임진란의 장렬한 투쟁을 기리는 비석들을 지역 개발을 한답시고 한 곳으로 몰아 놓기도 했다. 어떤 기업인은 공장을 짓는답시고 천해의 해안을 완전히 메워버리고, 수군진 성터 자리를 불도저로 다 깔아뭉개어 놓았다. 그러고는 부도를 내어 회사를 망하게 하고 자신은 부자가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은 희망이 있다. 지방자치단체들은 시민단체와 지방 주민들을 대등한 파트너로 인식하면서 상호 협조하고 후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전제로 조심스럽게 바다에 접근해야 할 것이다. 즉 진정한 파트너십을 의미하는 거버넌스(gouvernance) 개념으로 해양에 접근해야 한다. 거버넌스 접근이야 말로 근대 국민국가가 지닌 한계성을 뛰어 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동서남해안을 해양네트워크, 열린 문화 공간, 인간과 바다의 공존, 특정인들이 독점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
정부의 특정부처가 개발 주체가 되는 것을 한사코 막아야 한다. 그들은 이미 대륙에서, 도시에서 실패만 거듭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제 해양마저 이들에게 맡기고 이들이 해양마저 망친다면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게 된다. 해양정책은 육지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다에서 육지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맡겨야 할 것이다. 해안을 열린 공간으로 파악하고 항구의 장구한 역사성, 초국가적 영역, 다양한 문화가 혼재하는 곳으로 파악할 때, 해양은 자신의 자원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제공해줄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해양이 지닌 보고를 진정으로 개발하게 될 것이며, 해양을 지속적 발전이 가능한 곳으로 만들어 훼손없이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학수/해군사관학교 군사학처 교수. 프랑스현대사 전공
우리에게도 바다가 있고 육지로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동서남해안으로 되돌아오려 한다. 서해시대가 열렸다면서 장보고의 해상 네트워크를 복원하라는 요구가 쏟아졌다. 충무공이 왜군을 물리친 격전지들을 관광지로 개발하면 장사가 된다면서 경상남도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내놓았다. 부산시는 부산항을 동북아의 허브 항구로 삼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울산시는 일본에 간 남편을 기다리다 돌이 되었다는 곳을 관광지로 개발하고 신라시대의 해양활동을 복원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어떤 기업체는 남해안의 한려수도를 크루즈 관광지로 개발하여 떼돈을 벌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세계 어디에 내어놓아도 당당할 수 있는 우리의 이 소중한 해양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를 위해선 우리가 그동안 생각하던 바와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바다에 접근해야 한다. 근대국가가 성립한 이후 해양 정치학자들은 민족 또는 국가들을 해양지향군과 내륙지향군으로 대립시킨 뒤, 글로벌 해양전략론을 제창했다. 대표적인 사람이 알프레드 마한(Alfred Mahan)이다. 마한은 해양을 대교통로로 정의하고 이 교통로를 이용하여 무역에 종사하는 자국 상선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정부의 임무라고 규정했다. 해양국가란 자고로 생산하고 수출해서 경제번영을 달성해야 하며, 무역은 해군을 주체로 한 해양력의 확보로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국내생산, 해외무역, 식민지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이 3가지를 가장 잘 결합시킨 수단이 해상의 안전보장, 다시 말해 해양력 확보라고 파악했다. 그의 이론은 미국의 공식 해양전략이 되었고, 미국을 따르는 많은 국가들도 금과옥조인양 받들고 있다. 그러나 마한의 해석은 근대 국민국가 시기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 결과 해양은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정의되어, 바다와 항구는 육지의 식민지로 전락해버렸고 타자화되었으며 국가들의 영토로 파편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국민국가에서 중앙과 지방의 관계가 설정됨에 따라 항구도시들은 열린 공간으로서의 역동성을 제한받아 폐쇄적 공간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우리의 바다를 마한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데서 진일보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도시를 개발하는 식으로 해양에 접근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지방자치단체들이 육지를 개발하는 방식으로 해양을 개발해서도 안 된다. 해안의 절경에 부유한 계층이 살고 주변부에 가난한 계층이 거주하는 곳으로, 부유한 사람들의 별장지역과 골프장으로 개발되어서는 안 된다. 거리가 협소하고 건물이 높은 도심의 교외로 개발되어서도 안 된다. 땅 투기가 판치는 곳, 학군으로 구분되는 곳이 되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해양은 오래 전부터 우리 모두의 것이며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온 곳이며 현재 우리에게 유일하게 남은 대안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다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돼야 한다. 지자체별 개발 해양 망쳐 그러나 현실은 딴판이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한반도의 해안이 지닌 자연과 역사성 마구잡이로 훼손하고 있다. 조선시대 수군진들을 복원한다면서 기적처럼 남아 있는 유적을 콘크리트로 발라버렸다. 어느 섬에서는 수군 만호진 성터를 벽으로 삼아 개집들을 지어 놓고 있다. 임진란의 장렬한 투쟁을 기리는 비석들을 지역 개발을 한답시고 한 곳으로 몰아 놓기도 했다. 어떤 기업인은 공장을 짓는답시고 천해의 해안을 완전히 메워버리고, 수군진 성터 자리를 불도저로 다 깔아뭉개어 놓았다. 그러고는 부도를 내어 회사를 망하게 하고 자신은 부자가 되었다.
이학수/해군사관학교 군사학처 교수. 프랑스현대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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