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의 종횡사해
김지석의 종횡사해/
어떤 업체가 경남의 백두대간 낙남정맥 한가운데에 골프장을 지으려고 지도에서 산맥의 주 능선이 지나가는 위치를 조작했다가 적발됐다고 한다. 간단한 지도 왜곡이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지도를 활용한 현실 왜곡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독일 나치 세력은 국수주의적 지도제작 전통과 지정학을 결합시켜 주변국 침략을 합리화했다. 당시 지리학자 카를 하우스호퍼는 지구상에 강대국이 지배하는 몇 개의 기본지역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유럽·아프리카는 독일이, 아시아는 일본이, 미주는 미국이 지배하며, 소련이 유라시아 중심부의 강대국으로 떠오른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에다 게르만족의 생활공간(레벤스라움) 이론을 결합시켜 독일의 팽창을 ‘피할 수 없는 자연적 요구’라고 강변했다. 그가 비슷한 본보기로 꼽은 게 일본의 한국 합병이다. 이런 주장은 굵은 선과 선명한 색으로 잘 표시된 지도를 통해 대중에게 선전됐다.
세계 지도는 애초부터 제국주의적 성격을 가졌다고 <지도와 권력>(알마 펴냄)과 <분노의 지리학>(천지인 펴냄)은 설명한다. 15~19세기 세계 지도는 영토 확장을 강조했다. 유럽 나라들이 탐험과 식민 정책을 가속화함에 따라 지도 제작도 유럽인이 주도했다. 16세기 이후 400년간 지도 제작을 지배해온 메르카토르 도법은 극 쪽으로 갈수록 실제 공간을 심하게 왜곡한다. 그래서 중간 위도에 있는 북미 대륙과 유럽은 너무 커보인다. 은연중에 구미 중심 인식을 부추기는 것이다.
지리학·지정학은 2차대전 이후 찬바람을 맞는다. 여기에는 미국에서 시작된 1950년대의 신지리학과 70년대의 급진적 지리학 등이 기여했다. 이런 운동은 기존 지리학의 유럽중심주의, 제국주의, 인종차별주의, 국가중심주의 등을 시정하는 효과를 낳았지만 동시에 많은 대학의 지리학과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 지리학·지정학이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 냉전 종식 이후 세계가 그만큼 복잡해진 탓이다. 그 정점에는 9·11테러와 대테러 전쟁이 있다. 하지만 최근의 지리학과 지정학 또한 이전의 강대국 중심 편향과 지리결정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미국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이 그런 보기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동북아에서는 중국의 앞선 문명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간다는 식의 지정학적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인식은 이후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사이의 주변 세력으로 자기 정체성을 설정하는 것으로 바뀐다. 모양만 살짝 바뀐 강대국 중심 지정학이다.
미국·중국·일본·러시아라는 강국이 한반도들 둘러싸고 있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과거와는 달리 이들 나라는 평화 공존이라는 틀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됐다. 한반도가 지정학적 중심이 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그럴 만한 무기 또한 갖고 있다. 평화를 사랑하는 전통과 남다른 민주화·산업화 경험, 적극적 국민성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통일 과정에서 생길 활력과 폭넓은 시야가 결합하면 ‘동북아 문명의 중심축으로서 한반도’라는 새 지정학이 가능하다. 이제 그 내용을 채워가야 할 때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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