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의 종횡사해
김지석의 종횡사해 /
지난 2분기 중 5분위(상위 20%) 가구 월평균 소득(664만8968원)은 1분위(하위 20%) 가구 소득(89만1240원)의 7.46배였다. 2003년 이후 최고치다. 아이엠에프 위기 이후 본격화한 소득양극화 추세가 새 정부 출범 이후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성장만 하면 분배는 따라온다는 생각이 강하다. 분배적 정의의 실종이다.
분배적 정의는 재산을 사회 전체로 재분배해 모든 사람이 일정 수준의 물질적 수단을 제공받도록 보장할 것을 국가에 요구한다. 18세기 이후 서구에서 만들어진 이런 정의 개념은 적어도 다섯 가지 전제를 필요로 한다고 <분배적 정의의 소사>(서광사 펴냄)는 말한다.
첫째, 각 개인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선을 가지며 개인은 그 선의 추구에서 일정한 권리와 보호를 받아야 한다. 둘째, 물질적 재화의 어떤 몫은 모든 사람이 마땅히 받을 만한 권리와 보호의 일부다. 셋째, 이는 종교 등이 아니라 순전히 세속적 용어로 합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넷째, 이런 재화의 몫을 분배하는 것은 실천 가능하다. 다섯째, 개인이나 조직이 아니라 국가가 그 분배를 보장해야 한다.
곧, 분배적 정의의 기초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도록 돕는 것은 좋은 일이며 공통의 책무라는 사실이다. 각 개인은 자신의 행동능력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수단을 확보할 권리를 갖는다. 따라서 분배적 정의의 대상을 물질로 국한시킬 이유가 없다. ‘문화적 구성원 자격’이나 인정자본(지위·주의·존경), 자존심, 의료 등도 대상이 될 수 있다. 어떤 자원을 재분배해야 하는가는 인간 행위에 본질적 능력이 뭔가에 대한 판단에 따라 달라진다.
분배적 정의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가장 큰 장애물은 빈민을 빈곤 속에 붙들어둘 가치에 대한 믿음이었다. “불완전한 존재들(빈민)은 자연의 실패작이며 그런 것으로 밝혀지면 자연의 법칙에 따라 소환된다.…만약 그들이 생존하기에 충분히 완전하다면 그들은 분명 생존할 것이고 생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만약 그들이 생존하기에 충분히 완전하지 않다면 그들은 죽을 것이고 죽는 것이 가장 좋다.” 19세기에 구미 지식인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의 하나로 꼽힌 허버트 스펜서(1820~1903)의 말이다. 이런 사고방식에서 분배적 정의는 죄악이 된다. 20세기 후반 서구 복지국가에 대한 반발로 힘을 얻은 신자유주의는 이런 사고의 연장선에 있다.
분배적 정의의 바탕에는, 인간이 닥친 문제들은 충분한 재능과 선의만 주어지면 해결될 수 있다는 낙관주의가 있다. 이런 생각은 현대 복지국가의 기본이 됐다. 진화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1941~2002)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 세계를 단 한 차례 지날 뿐이다. 비극 중에서도 생명의 성장을 저지하는 것만큼 비참한 비극은 없다. 또한 불공평 중에서도 내부에 있다고 잘못 인식돼, 외부에서 부과된 한계에 의해 노력할 기회나 희망을 가질 기회조차 부정하는 것만큼 심각한 불평등은 없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가는가.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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