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의 종횡사해
김지석의 종횡사해 /
1952년 9월15일 오전 11시께, 미국 극동군사령부 소속 폭격기가 독도 상공을 두 차례 선회한 뒤 폭탄 네 개를 투하했다. 당시 독도에는 20여명의 선원·해녀가 조업하고 있었다. 일주일 뒤인 22일 오전 11시께 한국산악회의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단 일행 30여명이 독도 부근 2㎞ 해상에 접근했을 때도 넉 대의 폭격기가 바다에 폭탄을 투하했다.
미군은 왜 독도를 폭격했을까? <독도-다케시마 논쟁>(보고사 펴냄)에는 1952년 10월3일 주일 미국 대사관이 국무부에 보낸 편지가 실려 있다. “이 바위(독도)는 유엔군 항공기가 북한 폭격에서 돌아올 때 유용하다. 투하 목적지에 사용되지 않았던 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는 레이더 조준점으로 사용할 수 있다. 무인도일 뿐만 아니라 항로의 안표(眼標)가 되므로 실제 폭격 표적으로서 이상적이다.” 편지는 “미-일 안전보장협정에 입각한 합동위원회의 작전구역 선정에서, 이 바위는 위의 목적에 도움이 되므로 일본 정부에 의해 시설로서 지정되는 일에 합의됐다”고 말한다.
1952년 4월28일 발효한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일본의 주권을 회복시킨 2차대전 전후처리 조약이다. 애초 조약안에는 일본이 주권을 포기하는 섬의 하나로 독도가 적시됐으나 최종안에서는 빠졌다. 독도 폭격은 미국이 독도 영유권 문제와 관련해 이중적 태도를 취한 한 가지 이유를 암시한다. 일본 정부가 1905년 시마네현의 독도 편입 고시를 적극 뒷받침한 주된 이유도 러일전쟁에서 확인된 독도의 군사적 가치에 있었다. 게다가 미국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영토 획득을 전면 부정할 경우 전후처리가 혼란에 빠질 것으로 우려했다.
최근 독도 영유권 표기 문제가 불거지자 미국 정부는 한국과 일본의 독도 주권 주장을 모두 인정하지 않으며 이런 태도는 수십 년 유지돼 온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미국은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 때부터 독도가 고유의 한국 땅임을 잘 알고 있었다. 편지에서도 “이 바위는 어느 시기 조선왕조의 일부였다”며 “일본이 제국을 조선에 확장했을 때 물론 조선의 나머지 영토와 함께 병합됐다”고 하고 있다. 미국의 이른바 ‘중립적 태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일본이 독도 주권 침탈 역사는 오래됐으나 그때마다 한국 주권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났다. 일본 막부가 1696년 독도는 조선 땅이라고 확인한 것, 메이지정부의 최고 관청인 태정관이 1877년 독도를 일본 땅이 아니라고 선언한 것이 대표적 보기다. 이후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전적으로 제국주의 침탈 역사의 합리화와 궤를 같이한다. 곧, 독도 문제는 일본 제국주의 문제다.
한국 현대사는 일제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날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일본의 독도 주권 침탈 기도가 이어지는 것은 식민 잔재 청산이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친일 행위를 합리화하려는 시도까지 고개를 들고 있다.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꿔 친일 문제를 탈색하려는 일부 우익의 움직임이 그 가운데 하나다. 정부는 이런 반역사적 주장을 상당 부분 받아들여 어제 열린 광복절 기념식의 이름까지 바꿨다. 최근 독도 사태는 이명박 정부의 이런 모호한 정체성과 밀접하게 얽혀 있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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