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도시’ 가운데 하나인 독일 비텐베르크에 위치한 루터 하우스의 모습. 마르틴 루터는 1508년부터 35년 동안 이곳에서 살면서 ‘종교개혁’을 구상했고, 수많은 저작을 집필해 근대로 가는 길을 열었다. 3층으로 된 이 집은 많은 경우 50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기거했을 정도로 붐볐다고 한다.
① 루터 종교개혁 산실 ′독일 비텐베르크′
막스 베버, 게오르크 지멜을 비롯해 서구 근대 사상을 탐구해온 사회학자 김덕영 교수(독일 카셀대)가 유럽 독일어권 도시들을 기행하며 사상의 발원과 흐름을 짚어보는 기획 시리즈 ‘사상의 고향을 찾아서’를 싣는다. 어떤 도시가 어떤 사상가를 보듬었으며 그 사상가가 어떻게 근대와 현대를 주조했는가 추적해보는 사상 기행이다. 마르틴 루터를 품은 비텐베르크부터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고향인 오스트리아 빈까지, 앞으로 20회에 걸쳐 그의 기행기를 싣는다.
세계문화유산 ‘루터의 도시’
추로지향(鄒魯之鄕)!
이 한자성어는 중국에서 맹자의 고향 추나라와 공자의 고향 노나라를 합쳐 부르는 말로, 정신 또는 사상의 중심지를 가리킨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경북 안동이 추로지향으로 일컬어진다. 지식인에게 추로지향을 찾는 것은 마치 신앙인이 성지를 순례하는 것만큼이나 설레고 흥분되는 일이다. 이번 기행에서는 서구 근대사상을 빚어낸 유럽 곳곳의 추로지향을 순례하면서 어떤 도시에서 누가 어떻게 근대와 현대를 주조했는가를 추적할 것이다. 그 첫 번째 순례지는 독일 비텐베르크다. 바로 이 도시에서 근대의 물꼬가 터졌기 때문이다. 비텐베르크는 마르틴 루터(1483~1546)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고, 루터는 비텐베르크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 도시는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라고 불린다. 이 작은 도시(2011년 말 현재 인구가 4만9000명 정도)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종교개혁은 단순히 종교만의 개혁이 아니라 근대의 문을 연 거대한 사회개혁 운동이었다. 루터는 1483년 튀링겐의 작은 도시 아이슬레벤에서 광산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1546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그가 ‘95개조 반박문’을 내건 비텐베르크 궁정교회의 설교단 아래에 안장되었다. 아이슬레벤 역시 ‘루터의 도시 아이슬레벤’이라고 불린다. 두 루터의 도시는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나란히 등록됐다. 아침 일찍 카셀에 있는 숙소를 나섰는데도 비텐베르크에 도착하니 오전 열시가 넘었다. 기차역에 내려서 마치 시골길 같은 길을 따라 조금 걸으니 ‘루터 하우스’가 보였다. 비텐베르크는 루터의 도시답게 루터 하우스와 더불어 여정이 시작된다. 엄청나게 긴 길에 걸쳐 있는 이 건물은 루터가 35년 동안 살면서 종교개혁을 추진한 곳인데,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날이 추워서 그런지 다행히 관람객이 몇 안 되었다. 단체 관람객, 특히 김나지움 학생들이 몰려오면 박물관을 둘러보는 일이 만만치 않다. 루터 하우스는 3층으로 된, 상당히 큰 건물이다. 거기에는 ‘면죄부 헌금함’, ‘95개조 반박문’, 루터가 번역한 성서 등 수많은 유물이 종교개혁의 역사를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각 유물들 옆에 독일어와 함께 영어로 설명문이 붙어 있어서 관람하기가 편하다. 그리고 입구에서는 여러 언어로 된 설명서를 파는데 한국어도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루터가 사용하던 방인데, 루터는 학자들이나 신학생들과 이 방에 있는 책상에 둘러앉아 토론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 한구석에 난로가 있는데, 이것은 당시로서는 큰 호사였다고 한다. 이 건물 지하에는 루터 가족의 일상생활을 미니어처로 재현해 놓았다. 부엌 풍경, 우유를 짜거나 물고기 잡는 모습이 눈에 띈다. 또한 루터 하우스와 그 주변에서 발견된 실제 유물도 전시되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루터 가족이 식사하는 모습을 재현해 놓은 미니어처인데, 딸린 식구 수가 엄청나게 많아 눈길을 끈다. 실제로 당시 많은 학생들이 그곳에 기거했는데, 식구가 50명이나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부인인 카타리나 폰 보라(1499~1552)가 이들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했다. 그녀는 이 위대한 개혁가의 더할 나위 없는 내조자였으며 동반자였다. 루터 하우스의 안마당에는 아담한 카타리나의 기념상이 있어 이곳을 찾는 손님들을 가장 먼저 맞이한다. 사실 루터 하우스를 제대로 보려면 며칠은 걸릴 듯싶었다. 아쉽지만 다른 역사적 자취를 둘러보기 위해 나왔다. 루터 하우스에서 건물 몇 채만 지나면 루터의 개혁동지였던 필리프 멜란히톤(1497~1560)이 살던 ‘멜란히톤 하우스’가 나온다. 현재 이 건물은 확장공사가 한창이라 관람할 수 없다. 바로 그 옆에 대학이 있다. 이 대학은 ‘마르틴 루터 대학 할레-비텐베르크’에 속하는데, 그 대부분은 할레에 있고 비텐베르크에는 아주 작은 부분만 있다. 이 대학은 집과 집 사이에 있는 작은 문을 지나야 나오기 때문에 헤매기 쉽다. 이 대학을 보니까 중세 대학의 규모가 이 정도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더 작았을 것이다. 계속해서 걷자 옛시청이 나왔다. 시청 바로 오른쪽으로 루터가 설교했던 교회가, 왼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음으로써 종교개혁의 불씨를 지핀 궁정교회가 보였다. 마침 내가 찾은 날은 시청 광장에서 한창 크리스마스 시장이 열리는 날이었다. 일단 루터가 설교했던 교회와 궁정교회를 둘러보고 크리스마스 시장에서 언 몸을 녹이고 허기를 달래기로 했다. 루터가 설교했던 교회는 찾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혹시 잘못 찾았나 해서 마침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으니 맞다고 한다. 관광객들은 이곳보다 그 옆 궁정교회 앞에 몰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이곳이 종교개혁의 진원지였기 때문이다. 이 궁정교회는 비텐베르크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그 정문에는 95개조 반박문이 새겨져 있다.
면죄부까지 파는 타락한 교회 일침
95개조 반박문으로 개혁물꼬 튼 곳
그가 35년 살며 공부한 ‘루터 하우스’
마당엔 학생 뒷바라지한 부인 기념상
거리엔 역사적 궁정교회·대학건물…
루터의 삶과 고뇌, 투쟁의 숨결 넘쳐 ‘변혁의 씨앗’ 뿌린 개방적 대학 분위기 루터가 비텐베르크대학의 교수가 된 것은 1512년 10월, 그러니까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꼭 5년 전의 일이었다. 다 아는 대로, 종교개혁은 루터가 1517년 10월 비텐베르크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와 교황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면서 일어났다. 그러나 면죄부 판매는 종교개혁의 진정한 원인이 아니었다. 종교개혁은 중세의 신학과 교회의 총체적인 위기에 대한 저항운동이었다. 당시 종교와 성직자들은 세속화되었고, 교회제도는 낙후되었으며, 로마 교황청은 비대해지고 타락했다. 면죄부 판매는 바로 이러한 중세적 위기가 눈에 띄게 표출된 사례였던 것이었다. 사실 종교개혁의 원인은 좀더 시야를 넓혀서 중세 말기의 구조적 모순에서 찾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당시 인간 삶의 다른 영역은 근대로 내달리고 있었다. 예컨대 국민국가, 자본주의와 화폐경제, 인문주의 등이 등장해 발전하고 있었다. 그 결과로 근대적 개인주의가 나타났다. 먼저 국민국가는 개인들의 공화국으로서 이 개인들이 정치와 종교의 주체가 될 것을 요구했다. 또한 자본주의 및 화폐경제의 대두와 더불어 사회와 경제의 중심이 농촌의 기사계급에서 도시의 시민계층(부르주아지)으로 이행했다. 도시의 시민계층은 중세적 집단주의에 지배되던 농촌의 기사계급과 달리 근대적 개인주의의 세계관을 품고 있었다. 바로 이 사회집단이 근대 국민국가의 중추 세력이 되었다. 그리고 인문주의는 성서의 복음정신을 따라 인간의 내적 자유 및 개인의 내면적 삶과 신앙을 추구할 것을 역설했다. 이 도도한 근대의 물줄기와 동떨어진 채 종교라는 삶의 영역은 여전히 중세적 틀에 갇혀 있었다. 이 틀은 너무나도 강력하고 견고했다. 중세인들에게 구원의 문제는 현대인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도 절절한 관심사였다. 그런 만금 중세의 종교는 인간 삶의 구석구석을 지배하며 통제하고 있었다. 종교라는 거대한 중세의 둑이 근대라는 새로운 물길의 흐름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이 둑을 허물고 근대의 물꼬를 터야만 하는 것이 시대적 과제이자 요청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종교 밖의 힘이 아니라 종교 안의 힘이었다. 왜냐하면 중세에는 종교가 모든 종교 바깥 영역을 포괄하고 초월하는 보편적인 사회적·문화적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그 종교 내부의 힘이 다름 아닌 루터의 종교개혁이었으며, 그 개혁이 일어난 곳이 파리나 런던과 같은 국제적인 대도시가 아니라 독일의 한 작은 대학도시 비텐베르크였던 것이다. 그 당시 이 도시 인구가 대략 2000명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작은 비텐베르크에서 그토록 거대한 역사적 변혁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지방분권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유럽에는 여러 도시에 대학이 있어서 자유로운 사유가 가능했다. 그리고 정치적 주권을 가진 제후들은 새로운 사상을 품은 지식인들을 보호할 수 있었다. “주님의 포도원에 침입한 한 마리 멧돼지 새끼”(교황이 파문 결정을 내리면서 한 말)였던 루터가 화형에 처해지지 않고 새로운 신앙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도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1463~1525)의 보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루터는 전형적인 중세적 가톨릭교도였다. 그는 가정과 학교에서 철저하게 중세적 가톨릭의 전통 아래 성장했으며, 수도원에서 완전히 중세적인 방법으로 구원을 추구했다. 그런 루터가 종교개혁의 선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비텐베르크대학에서 자유롭게 성서를 연구하고 강의한 덕분이었다. 이 대학은 1502년에 창립되었으니까 당시로서는 신생 대학이었다. 그러나 이 대학은 라이프치히대학 같은 기존 대학과 달리 인문주의에 개방적이었다. 인문주의는 중세의 스콜라신학을 비판했으며, 사도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 권위를 부여했다. 루터는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을 통해 교회와 교황의 전통과 권위를 중시하는 중세 가톨릭 신학으로부터 신과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새로운 신학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할 수 있었다. 비텐베르크는 크기도 작은데다 워낙 루터에 의해 각인된 도시라 그런지 누구에게 길을 물어보아도 행선지를 잘 가르쳐 준다. 그러나 조금만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면 모른다고 한다. 일반인들에게 루터는 과거의 역사에 속하는 인물이고,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의 삶인지도 모른다.
4년 뒤 ‘종교개혁 500돌’ 준비 한창
시청 광장에 차려진 크리스마스 시장에 들어가 보았다. 빼곡히 들어선 가게와 거대한 놀이기구 탓에 루터와 멜란히톤의 동상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따뜻한 음료 한잔과 소시지로 요기를 하고 있는데, 시청 건물에 루터의 초상과 ‘루터 2017-종교개혁 500돌’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포스터가 여러 개 걸려 있는 것이 보인다. 종교개혁 500돌인 2017년의 기념행사를 알리는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기념행사에 대해 아무리 물어도 구체적인 정보를 알 수 없어 비텐베르크대학을 다시 찾았다. 그 긴 길을 되돌아오면서 좀 유심히 보니, 길가 양쪽에 각기 시대와 양식을 달리하는 3층 정도의 건물들이 어깨를 맞대고 서 있는데, 수많은 인물들의 기념편액이 붙어 있어 눈길을 끈다. 조금이라도 오래된 건물에는 으레 기념편액이 붙어 있고 심지어 몇 개씩 붙어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 작은 도시가 역사와 문화의 조연이 아니라 주연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은 풍경이었다.
대학에 가서 물어보니, 이미 2007년부터 독일의 여러 주가 협력하여 ‘루터 2017-종교개혁 500돌’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그 본부가 바로 비텐베르크대학이다. 루터의 삶과 활동, 그리고 종교개혁이 끼친 종교적·정치적·사회적·문화적 영향을 조명하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표라고 한다. 이제 4년 뒤면 비텐베르크로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될 것이다. 종교개혁은 단일 사건으로서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때 다시 한번 이곳을 찾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루터 하우스를 지나 기차역으로 향했다.
글·사진/사회학자·독일 카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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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년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어 종교개혁의 불씨를 지핀 비텐베르크 궁정교회의 정문. 당시에는 나무문이었으나, 1760년 ‘7년 전쟁’ 당시 불에 타 무너지는 바람에 1858년 청동으로 문을 다시 만들었다.
95개조 반박문으로 개혁물꼬 튼 곳
그가 35년 살며 공부한 ‘루터 하우스’
마당엔 학생 뒷바라지한 부인 기념상
거리엔 역사적 궁정교회·대학건물…
루터의 삶과 고뇌, 투쟁의 숨결 넘쳐 ‘변혁의 씨앗’ 뿌린 개방적 대학 분위기 루터가 비텐베르크대학의 교수가 된 것은 1512년 10월, 그러니까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꼭 5년 전의 일이었다. 다 아는 대로, 종교개혁은 루터가 1517년 10월 비텐베르크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와 교황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면서 일어났다. 그러나 면죄부 판매는 종교개혁의 진정한 원인이 아니었다. 종교개혁은 중세의 신학과 교회의 총체적인 위기에 대한 저항운동이었다. 당시 종교와 성직자들은 세속화되었고, 교회제도는 낙후되었으며, 로마 교황청은 비대해지고 타락했다. 면죄부 판매는 바로 이러한 중세적 위기가 눈에 띄게 표출된 사례였던 것이었다. 사실 종교개혁의 원인은 좀더 시야를 넓혀서 중세 말기의 구조적 모순에서 찾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당시 인간 삶의 다른 영역은 근대로 내달리고 있었다. 예컨대 국민국가, 자본주의와 화폐경제, 인문주의 등이 등장해 발전하고 있었다. 그 결과로 근대적 개인주의가 나타났다. 먼저 국민국가는 개인들의 공화국으로서 이 개인들이 정치와 종교의 주체가 될 것을 요구했다. 또한 자본주의 및 화폐경제의 대두와 더불어 사회와 경제의 중심이 농촌의 기사계급에서 도시의 시민계층(부르주아지)으로 이행했다. 도시의 시민계층은 중세적 집단주의에 지배되던 농촌의 기사계급과 달리 근대적 개인주의의 세계관을 품고 있었다. 바로 이 사회집단이 근대 국민국가의 중추 세력이 되었다. 그리고 인문주의는 성서의 복음정신을 따라 인간의 내적 자유 및 개인의 내면적 삶과 신앙을 추구할 것을 역설했다. 이 도도한 근대의 물줄기와 동떨어진 채 종교라는 삶의 영역은 여전히 중세적 틀에 갇혀 있었다. 이 틀은 너무나도 강력하고 견고했다. 중세인들에게 구원의 문제는 현대인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도 절절한 관심사였다. 그런 만금 중세의 종교는 인간 삶의 구석구석을 지배하며 통제하고 있었다. 종교라는 거대한 중세의 둑이 근대라는 새로운 물길의 흐름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이 둑을 허물고 근대의 물꼬를 터야만 하는 것이 시대적 과제이자 요청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종교 밖의 힘이 아니라 종교 안의 힘이었다. 왜냐하면 중세에는 종교가 모든 종교 바깥 영역을 포괄하고 초월하는 보편적인 사회적·문화적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그 종교 내부의 힘이 다름 아닌 루터의 종교개혁이었으며, 그 개혁이 일어난 곳이 파리나 런던과 같은 국제적인 대도시가 아니라 독일의 한 작은 대학도시 비텐베르크였던 것이다. 그 당시 이 도시 인구가 대략 2000명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작은 비텐베르크에서 그토록 거대한 역사적 변혁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지방분권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유럽에는 여러 도시에 대학이 있어서 자유로운 사유가 가능했다. 그리고 정치적 주권을 가진 제후들은 새로운 사상을 품은 지식인들을 보호할 수 있었다. “주님의 포도원에 침입한 한 마리 멧돼지 새끼”(교황이 파문 결정을 내리면서 한 말)였던 루터가 화형에 처해지지 않고 새로운 신앙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도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1463~1525)의 보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터 하우스에 들어서면 안마당에 세워진 루터의 부인 카타리나 폰 보라의 기념상이 손님을 맞이한다. 루터의 든든한 내조자이자 개혁의 동반자였던 그는 루터 하우스를 찾는 수많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환대하고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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