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젤대학 건물의 외변에 조각돼 있는 ‘스승과 제자’ 조각상. 스승과 제자의 키가 똑같은 것이 눈에 띈다. 바젤대학은 스위스 최초의 대학으로, 프리드리히 니체가 고대 그리스 언어와 문학 담당 교수로 재직했다.
[김덕영의 사상의 고향을 찾아서]
<19> 니체의 교수시절, 스위스 바젤
<19> 니체의 교수시절, 스위스 바젤
독일서 대학 졸업하기도 전에
바젤대학서 교수 초빙된 니체
철학을 문헌학·심리학과 결합
아름다운 언어로 사유 담아내 그의 철학 핵심은 ‘반시대성’
문화를 정치에 예속시키며
왜소화된 근대적 주체 비판
투쟁하는 모더니티 철학자 “나는 망치로 철학을 한다.” 철학은 마치 망치로 모든 것을 때려 부수듯이 기존의 모든 가치를 전복시킨다는 뜻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은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이다. 이번에는 이 망치를 든 철학자의 궤적을 찾아 바젤로 향했다. 프라이부르크에서 고속열차(ICE)를 타니 50분이 채 안 걸렸다. 니체는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그는 본대학과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신학과 고전문헌학을 공부했는데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인 1868~69년 겨울학기 바젤 대학의 교수직을 제안받았다. 그가 이미 탁월한 업적을 쌓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라이프치히대학은 그때까지 발표한 논문을 근거로 니체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하고 교수자격 취득에 필요한 모든 과정을 면제해주었다. 1869년 2월 니체는 바젤대학의 고대 그리스 언어와 문학 담당 부교수로 초빙되었고, 그 이듬해 3월에는 정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인생지사 새옹지마라고 할까, 니체는 1876년부터 병 때문에 여러 차례 휴직을 해야 했고 1879년에는 결국 사직을 했다. 1876년부터 니체는 건강에 좋은 곳을 찾아 베네치아, 시칠리아, 투린, 니스, 제네바, 질스-마리아 등을 떠돌았다. 그러다가 1889년 1월 쓰러진 뒤 10년 이상을 정신적으로 혼미한 상태로 살다가 1900년 8월 바이마르에서 세상을 떠나 고향에 묻혔다.
니체의 발자취를 더듬는다고 하니까 여러 사람들이, 특히 옛날 지도 교수님은 그의 고향 뢰켄을 방문할 것을 권유했다. 거기에 니체의 생가와 무덤을 비롯해 볼 것이 많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지도 교수님 말씀에 따르면 니체의 고향은 독일의 특징을 단적이고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뢰켄처럼 ‘코딱지만한’ 동네(현재 인구가 600명 정도 된다)에서 세계적인 대사상가가 나올 수 있는 나라가 독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전통적으로 각 지방의 군주들이 경쟁적으로 문화와 예술 및 학문을 보호하고 권장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문득 괴테가 말년에 한 말이 떠올랐다. “독일의 위대한 점은 놀랄 만한 국민문화가 나라의 모든 지역에 골고루 퍼져 있다는 사실이다. …독일에는 나라 전체에 20여 개의 대학과 100개 이상의 공공도서관이 흩어져 있다. 미술 수집품을 모아놓은 미술관이나 자연 전체의 영역에 걸친 수집품을 모아놓은 박물관의 숫자도 상당한데, 그것은 각 군주가 그러한 아름다운 것과 유익한 것을 가까이 모아두려고 애썼기 때문이다. 인문계 중고등학교나 기술 공업학교는 남아도는 형편이고, 학교가 없는 마을은 독일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그렇지만 이 시리즈는 사상가의 고향이 아니라 사상의 고향을 찾는 기획이니, 나중에 니체에 대한 책을 쓸 때 꼭 뢰켄을 찾겠다고 지도교수님께 말씀드리고 나 스스로에게도 그렇게 다짐했다.
비록 고전문헌학을 공부하고 고대 그리스 언어와 문학 교수를 역임했지만 니체는 철학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문헌학에 바탕을 두는 철학이라는 표현이 그의 지적 세계에 어울릴 것이다. 게다가 니체가 구축한 계보학적 접근방법은 철학과 심리학을 결합시키고 있다. 니체는 이러한 결합을 자신의 커다란 업적으로 평가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내적-정신적 삶과는 무관한 형이상학적-초월철학적 도덕이론에 대한 반기라고 이해할 수 있다. 니체의 계보학은 문화의 계보학이며 문화의 사회심리학이다. 내가 보기에는 이처럼 철학을 문헌학 및 심리학과 결합시킨 점에서, 니체가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아주 중요한 계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니체 철학이 갖는 또 다른 장점은 빼어난 문학성이다. 내가 ‘체계적으로’ 니체를 공부한 것은 비교적 늦은 시기인 독일 대학교수 자격취득 논문을 쓸 때였다. 독일어에 대해 이렇다저렇다 평가할 처지가 못 되는 내가 보기에도 아름다운 언어가 장려한 철학적 사유를 담아내고 있었다. 어깨 너머로 철학을 배운 풋내기 사회학자의 마음을 단숨에 빼앗았다. 아마 어린 시절부터 시를 짓고 그리스 언어와 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횔덜린 시의 진가를 처음 발견한 사람도 바로 니체였다.
바젤은 인구가 17만명이 조금 넘으며 독일에서 43번째로 큰 도시인 자브뤼켄과 맞먹는다. 이 정도면 충분히 걸어다닐 만하다. 게다가 바젤은 말이 스위스지 독일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걸어다니는 데에 아무런 지장도 없다. 사실 여행은 지도를 들고 물어물어 찾아가야 제 맛이 난다. 그러다가 길동무라도 생기면 금상첨화이다. 그런데 간사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독일이 아니라는, 그러니까 ‘남의 땅’이라는 점이 적지 않은 심적 부담으로 와 닿았다. 그래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니체가 살던 곳을 찾았다. 두 군데였다. 니체는 ‘슈팔렌토어베크’ 48번지에 있는 집에서 1869년부터 1875년까지 살았고, ‘슈첸그라벤’ 47번지에 있는 집에서 1875년부터 1876년까지 살았다. 이 두 거리는 서로 만나며 니체가 살던 두 집은 한 100m 정도 떨어져 있는 것 같다. 이 두 집 모두 기념편액을 부착해 바젤이 이 비운의 철학자와 맺은 짧지만 소중한 인연을 기리고 있다. 바젤대학도 니체가 건강상의 이유로 떠나는 것을 진심으로 애석해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여러 어려운 상황에서도 니체에게 상당한 액수의 연금을 주었다고 한다.
이 두 집은 바젤대학 바로 옆에 있다. 바젤대학은 1460년에 개교한 스위스 최초의 대학이다. 인접한 독일의 프라이부르크대학이 문을 연지 3년 뒤의 일이다. 현재 학생 수는 1만3000명 정도로 그리 큰 편은 아니다. 문화사의 창시자 야콥 부르크하르트(1818~1897),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로 꼽히는 칼 바르트(1886~1968), 대표적인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1883~1969) 등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바젤대학에서 가르쳤다. 이 가운데 부르크하르트는 니체와 교분이 있었으며 니체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도 했다.
바젤대학 건물의 외벽에 양각되어 있는 “스승과 제자”라는 조각상이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스승과 제자의 키가 똑같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일방적인 지배 복종의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인격체라는 사실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한 것이 아닌가 하고 멋대로 상상해 보았다. 그렇다면 제자를 스승보다 더 크게 해서 “청출어람”을 형상화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서구인들의 예술세계에 너무 동양적인 사고를 투사시켰나? 아니 그렇게 하면 ‘포스트모던’한 예술이 되지 않을까?
흔히 니체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선구자요 포스트모더니티의 가장 대표적인 사상가로 간주된다. 니체는 망치로 철학을 한다고 했으니, 즉 기존의 모든 가치를 때려 부순다고 했으니, 그의 지적 세계를 포스트모더니티, 즉 탈근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아예 ‘파(破)근대’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니체의 철학은 근대 서구사회 전반, 그러니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국가와 시민사회, 과학과 교육 그리고 기독교 등에 대한 근본적이고도 철저한 비판과 대안을 모색한다. 이 철학적 사유를 관통하는 인식관심은 그 시대의 근본적인 삶과 실천의 문제에 있었다. 그것은 서구의 문화, 가치와 도덕이 몰락하고 타락하며, 또한 그로부터 데카당스하고 니힐리즘적인 인간유형과 행위유형이 나타나게 된 것을 가리킨다. 이런 한에 있어서 니체는 전적으로 시대적인 사상가이다. 그러나 니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근본적으로 새로운 문화, 가치 및 도덕의 정립을 통해서 근대의 심각하고 근원적인 위기를 극복하려고 한다. 다시 말해 니체는 모든 가치를 재평가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이런 한에 있어서 그의 철학은 전적으로 반시대적인 성격의 것이다. 요컨대 니체의 철학은 반시대성의 시대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니체를 포스트모더니티의 선구자요 포스트모더니티의 가장 대표적인 사상가로 간주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니체는 모더니티의 철학자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듯싶다. 왜냐하면 그의 철학은 모더니티의 또 다른 한 측면인 미학적-문학적 모더니티에 대한 성찰이라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학적-문학적 모더니티는 정치적, 경제적 및 사회적 모더니티를 바탕으로 하면서, 동시에 이와는 끊임없는 긴장과 갈등 그리고 투쟁의 관계에 있다.
니체에 따르면 근대세계에서는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삶의 영역이 예술과 문화의 영역을 예속시키고 지배하게 됨으로써, 거리와 고귀함의 파토스에 기반하는 귀족주의적 개인주의 대신에 데카당스하고 니힐리즘적인 인간유형과 행위유형이 만연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니체가 근대세계와 인간의 주체를 해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합리주의적이고 계몽주의적인 근대세계와 왜소해지고 무화된 근대적 주체를 디오니소스적이고 미학적인 세계와 주체로 대체하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니체의 철학은 근대세계의 디오니소스적-미학적 갱생을 지향하는 지적 모험인 것이다. 그것은 철저한 부정인 동시에 철저한 긍정이다. 그것은 철저한 가치의 비판이자 파괴인 동시에 철저한 가치의 정립이자 창조이다.
니체는 그때까지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던 모더니티의 다른 측면인 미학적-문학적 모더니티를 시적인 수단을 이용해서, 그리고 때로는 매우 과장되고 극단적인 방식으로 논했다. 그것은 모더니티에 대한 가장 아방가르드한 자아성찰이자 자기반성이었다. 그것은 포스트모던한 모더니티 이론이었다.
바젤 대학의 이곳저곳을 둘러본 다음 시내 구경을 나섰다. 사실 외적으로 보면 바젤은 독일의 여느 도시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시장 광장에 서 있는 시청이 눈길을 끌었다. 진한 피를 연상케 하며 이국적인 정취를 풍기는 붉은 색의 건물이 그 주변과 강렬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 바젤 시청은 1504년부터 1514년까지 붉은 사암으로 지은 후기 로마네스크-고딕 양식의 유서 깊은 건축물이라고 한다.
스위스가 외적으로 독일과 다른 점이 한 가지 더 있다. 유로가 아니라 스위스 프랑켄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처음 바젤에 도착했을 때 중앙역에 있는 여행 안내소에서 시내 대중교통 일일 사용권을 샀다. 9프랑켄이라고 해서 10유로를 냈더니 3프랑켄을 거슬러주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다시 중앙역에 돌아와 물을 한 병 샀다. 온통 도시를 휘젓고 다니느라 목이 탔다. 물 값은 프랑켄과 유로 두 통화로 치렀다. 일일 사용권을 사면서 거슬러 받았던 3프랑켄으로는 모자라 50센트(0.5유로)를 보탰다. 바젤 중앙역에 있는 상점들 중에는 직접 유로를 받는 곳도 있다. 타는 목마름으로 마시는 물보다 달고 시원한 감로주가 있던가, 어디!
김덕영 사회학자·독일 카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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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1875~1876년에 살았던 바젤의 슈첸그라벤 47번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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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젤 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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