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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나치 편든 하이데거 프라이부르크는 그를 지우려 했다

등록 2013-05-01 19:56수정 2013-05-02 08:46

프라이부르크 북쪽에 위치한 하이데거가 살던 집. 비탈진 길에 자리한 이 집은 아담하고 단아했지만 기념편액 하나 붙어 있지 않았다. 하이데거가 나치에 동조한 탓에 프라이부르크는 하이데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프라이부르크 북쪽에 위치한 하이데거가 살던 집. 비탈진 길에 자리한 이 집은 아담하고 단아했지만 기념편액 하나 붙어 있지 않았다. 하이데거가 나치에 동조한 탓에 프라이부르크는 하이데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김덕영의 사상의 고향을 찾아서]
<18> 하이데거 철학 낳은 프라이부르크

프라이부르크서 신학·철학 공부
후설의 현상학에 큰 영향 받지만
존재론적 물음을 출발점 삼아
기초존재론으로 독자 철학 형성

세계대전때 학생들 나치 참여 독려
프라이부르크인들에겐 부정적 기억

나는 대학에서 독어독문학을 부전공으로 공부했다. 그리고 청강과 도강을 반복하며 철학을 배웠다. 당시에는 부전공을 하나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어 독일에서는 철학을 제2 부전공으로 택했다. 이처럼 지적으로 어린 시절부터 철학에 매달린 이유는 사회학, 특히 이론사회학을 제대로 하려면 철학적 훈련이 필수적이라고 나름대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어깨너머로 배운 실력이지만 중요한 철학자들에 대해서 조금은 풍월을 읊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철학자가 있다.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이다.

내가 하이데거를 어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언어 때문이다. 그의 철학은 언어유희, 아니 심지어 선문답처럼 들린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관련해 사용하는 용어만 해도 너무 많아서 혼란을 주기 십상이다. ‘존재’, ‘존재성’, ‘존재자’, ‘존재자의 존재’, ‘현존재’, ‘상(常)존재’, ‘안에 있음(존재함)’, ‘곁에 있음’, ‘더불어 있음’, ‘눈앞에 있음’, ‘손안에 있음’…. 세미나나 컬로퀴엄에서 이런 개념들이 난삽하게 얽혀 있는 발제문을 듣고 있노라면 눈꺼풀이 한없이 무거워진다. 아무튼 하이데거는 나에게 ‘뜨거운 수프’였다. 먹고는 싶지만 뜨거워서 먹을 수 없는 수프!

이번에는 프라이부르 크에서 이 뜨거운 수프 하이데거의 발자취를 찾기로 했다. 전날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자고 아침 일찍 오펜부르크로 나와 고속철도(ICE)를 탔다. 프라이부르크까지는 30분 걸렸다. 프라이부르크는 인구가 23만명 정도로 독일에서 34번째로 큰 도시이다.

프라이부르크 중앙역에서 보니 도시가 좀 커도 물어보면서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시청 안에 있는 여행안내소를 찾아갔다. 이 도시가 하이데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안내하는 여직원에게 프라이부르크를 찾아온 연유를 말하니, 대뜸 아무 흔적도 찾을 수 없을 거라고 대답한다. 하이데거와 나치의 관계 때문이냐고 되물었더니 아주 단정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는 식으로 말한다.

하이데거는 1933년 나치에 참여했으며 그해 11월3일에는 프라이부르크대학 총장의 자격으로 ‘독일 학생들에게 고함’이라는 연설을 통해 학생들에게 나치 참여를 독려했다. 아마 이러한 전력이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가운데 한 명인 하이데거에 대한 프라이부르크의 집단기억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하이데거와 나치의 관계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솔직히 나 같은 아마추어가 이 문제를 판단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러나 어느 철학자의 말대로, 만약 하이데거의 과오가 “그의 사유의 결과였다면 그의 사유는 그러한 과오와 더불어 끝장났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유는 1934년 이후에야 본래적으로 전개되었다. 그가 오랜 기간에 걸쳐 대학에서 행하였던 모든 작업은 사유의 경험을 전한다는 유일한 과제를 위한 것이었다.” 물론 하이데거의 과오를 정당화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와 그의 지적 세계를 한 특정한 시점이나 행위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프라이부르크대학 전경.
프라이부르크대학 전경.
사실 프라이부르크에서 하이데거의 흔적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살던 집이 남아 있다. 이 집은 구 시가지를 벗어나 북쪽으로 한참 걸어야 나온다. 대중교통을 이용할까 하다가 마음도 썰렁하고 해서 그냥 걷기로 했다. 꽤 비탈진 길에 자리한 이 집은 아주 아담하고 단아했다. 산을 배경으로 하고 온통 흰 눈을 이고 있는 모습이, 뭐랄까 ‘설중매’를 연상케 했다. 그러나 기념편액 하나 붙어 있지 않았다.

그곳에서 다시 걸어 프라이부르크대학을 찾아갔다. 이 대학은 1457년 독일에서 일곱번째로 문을 열었으며 현재 학생 수는 2만4000명 정도이다. 철학과가 소재하는 건물 안에 있는 뮤즈(문예와 학술의 아홉 여신)의 상이 눈에 띄었다. 밝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라 어둡고 슬픔과 고뇌에 잠긴 모습이었다. 하이데거는 메스키르히라는 슈바르츠발트의 작은 마을(현재 인구가 8200명 정도)에서 태어나 콘스탄츠와 프라이부르크에서 김나지움을 다닌 뒤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신학, 철학 및 자연과학을 공부했으며 철학 박사학위와 ‘하빌리타치온’(독일 대학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하이데거는 1923년부터 1928년까지 마르부르크대학에서 ‘원외 정교수’로 재직한 후 1928년 에드문트 후설의 후임으로 프라이부르크대학의 정교수로 초빙되었다. 그는 베를린대학의 초빙을 두번씩이나 거절했으며 뮌스터대학의 초빙도 거절했다.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그리고 그의 고향인 메스키르히에 잠들어 있다). 한마디로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인이었던 것이다.

하이데거의 하빌리타치온 지도교수는 신칸트학파의 한 지류인 서남학파의 거두 하인리히 리케르트(1863~1936)였으며, 하이데거가 마르부르크대학으로 초빙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신칸트학파의 또다른 지류인 마르부르크학파의 거두 파울 나토르프(1854~1924)였다. 하이데거가 그의 주저인 〈존재와 시간〉의 집필에 착수한 것은 마르부르크 시절인 1923~24년 겨울학기였으며, 이 책이 출간된 것 역시 마르부르크 시절인 1927년이었다. 이렇게 보면 하이데거의 철학사상이 형성, 발전하는 데에 무엇보다도 신칸트학파 철학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프라이부르크대학의 뮤즈(문예와 학술의 아홉 여신)상.
프라이부르크대학의 뮤즈(문예와 학술의 아홉 여신)상.
그러나 그때는 이미 신칸트학파가 몰락기에 접어들었으며 마르부르크학파도 해체된 상태였다. 하이데거 철학의 젖줄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것은 에드문트 후설(1859~1938)의 현상학이었다. 현상학을 창시한 후설은 1901년부터 괴팅겐대학의 철학 정교수로 재직하다가 1916년 프라이부르크대학의 정교수로 초빙되었다. 그리하여 프라이부르크는 현상학 연구와 운동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에서 후설의 조수로 일했으며 그의 현상학을 철저히 연구했다. 또한 강의에서도 심도있게 후설의 저작을 다루었다. 사실 후설 철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관심은 대학 첫 학기부터 시작되었다. 이미 그때부터 그의 책상 머리맡에는 후설의 〈논리 연구〉가 꽂혀 있었다고 한다. 1900~1901년에 두 권으로 출간된 이 책은 현상학의 ‘출생 신고서’였다. 이렇게 보면 하이데거가 철학을 보편적인 현상학적 존재론이라고 규정한 이유가 드러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이데거가 후설 현상학의 단순한 계승자가 아니라 거기에서 출발해 새로운 철학적 사유의 세계를 구축했다는 사실이다. 하이데거가 후설의 현상학에서 배운 것은 대상이 아니라 방법이다. 후설 철학의 대상은 의식의 작용 또는 체험을 현상학적으로 구명하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하이데거 철학은 처음부터 존재론적 물음에 그 출발점이 있었다. 의식이 주체의 문제라면 존재는 주체를 넘어서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이다. 존재는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을 포괄한다.

물론 하이데거는 인간 삶에서 주체, 의식, 자아 등이 중요하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존재론적 토대를 찾고자 했다. 다시 말해 그 이전의 철학이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따라서 더 이상 소급할 수 없는 마지막 심급으로 간주했던 것을 하이데거는 다시 한번 소급하고자 했다. 바로 이 점에서 하이데거의 철학사적 위상을 엿볼 수 있다.

후설의 현상학적 방법은 판단중지와 현상학적 환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쉽게 말하자면 기존의 이론이나 견해 등에 의한 판단을 중지하고 근원과 토대로 파고드는 것이다. 이는 달리 본질직관 또는 본체직관이라고 한다. 그렇게 얻어진 근원과 토대가 선험적 주관성과 상호주관성이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보기에는 이 현상학적 본질직관을 한 단계 더 작동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과 그 작용은 (인간)존재의 한 양태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하이데거는 스스로를 자기 자신에게 나타내 보이는 것, 즉 현상에 도달한다. 이것이 존재이다. 이는 후설이 설정하는바 인간의식에 주어지는 현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존재의 본질구조 또는 실존범주를 구명하려고 하며, 바로 이런 점에서 기초존재론이라고 불린다. 내가 보기에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이 갖는 일대 장점은 존재 자체에서 존재를 이해하려는 시도에 있다. 이는 그가 제시한 세계성(세계-내의-존재), 내던져짐, 기투(企投), 시간과 공간, 언어, 기술과 도구, 배려함, 돌봄, 둘러봄, 불안, 죽음 등 일련의 존재론적 개념을 보면 쉽게 드러날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사유는 실존철학, 인간학, 심리학, 사회학, 신학 등 다양한 분야에 풍요로운 지적 자양분을 공급해준다.

프라이부르크 시청.
프라이부르크 시청.
내가 프라이부르크를 찾았을 때는 2월 중순인데도 한겨울이었다. 도시는 설국이었다. 그러나 추로지향 순례는 별반 수확이 없었다. 진정한 프라이부르크인, 하이데거를 기리지 않는 프라이부르크가 서운하고 야속했다. 시내 구경을 하면서 마음을 달래보려고 했지만,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이 혼합된 고풍스럽고 웅장한 대성당을 보아도 앙금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래서 무작정 걷다 보니 시청에 이르렀다. 그 앞쪽에 교회가 있고 그 광장에 기념상이 하나 서 있었다. 인부 한 사람이 조명장치를 손보고 있었고 그 앞에는 고상하게 생긴 할머니 한 분이 서 계셨다.

그 인부한테 누구의 기념상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카이네 아눙’(Keine Ahnung)이라고 답한다. 모른다(No idea)는 뜻이다. 다시 할머니께 물었더니 마찬가지였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분풀이한다고, 괜히 심술이 뻗쳐서 “나는 지금까지 카이네 아눙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랬더니 그 두 사람 파안대소를 하는 게 아닌가? 그게 인연이 되어 그들과 한동안 조금은 껄렁한, 조금은 진지한 수다를 떨었더니 한결 마음이 풀어졌다.

문득 하이데거의 언어철학 한 조각이 기억을 밀치고 올라왔다.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규정한다. 이 명제는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으며 곧잘 인용되거나 회자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언어란 단지 타인들과 의사소통을 하는 수단이거나 개인의 내면적인 정서를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존재가 머물고 존재가 세계 및 사물과 만나는 곳이다. 그러니까 언어는 존재의 근원이자 바탕이 된다. 여기에서 존재란 단순히 인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삼라만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한국어도 제대로 못하는 어린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거나 무분별하게 외국어를 남용하는 등 언어생활에 심각한 혼란을 겪고 있다. 이처럼 내 존재의 집을 버리고 다른 존재의 집에 존재하려는 이 존재자들의 존재론적 양태를 보았다면 하이데거는 무어라고 했을까? 내가 너무 심하게 하이데거 흉내를 냈나?

김덕영 사회학자·독일 카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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