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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근대의 비이성적 병리 성찰…집단지성이 ‘낭만주의’ 꽃피워

등록 2013-01-30 19:57수정 2013-01-30 20:31

독일 낭만주의의 발원지 예나에 있는 ‘낭만주의자들의 집’(왼쪽). 이 집에 살았던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는 독일 관념론을 대표하는 철학자였지만, 모든 현상을 형성 과정 속에서 살피는 역사적 정신과학으로 낭만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낭만주의자들의 집’ 뒤에 있는 작은 정원에는 슐레겔 형제와 카롤리네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오른쪽) 이들은 노발리스, 티크, 셸링 등과 더불어 18세기 독일 낭만주의를 이끌었다.
독일 낭만주의의 발원지 예나에 있는 ‘낭만주의자들의 집’(왼쪽). 이 집에 살았던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는 독일 관념론을 대표하는 철학자였지만, 모든 현상을 형성 과정 속에서 살피는 역사적 정신과학으로 낭만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낭만주의자들의 집’ 뒤에 있는 작은 정원에는 슐레겔 형제와 카롤리네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오른쪽) 이들은 노발리스, 티크, 셸링 등과 더불어 18세기 독일 낭만주의를 이끌었다.
[김덕영의 사상의 고향을 찾아서]
⑤ 낭만주의 사조 형성된 예나
독일을 대표하는 사상가는 누구일까? 마르틴 루터, 이마누엘 칸트,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카를 마르크스, 막스 베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이름만 들어도 가히 그 중량감을 가늠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꼭 추가해야 할 사상이 있으니, 바로 낭만주의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낭만주의를 빼고 독일의 사상을 논한다는 것은 도교는 쏙 빼고 유교만 가지고 동아시아의 사상을 논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낭만주의는 18세기 말에 일어나 19세기 중반까지 지속된 정신적 사조다. 문학을 비롯해 언어학, 문헌학, 조형예술, 음악, 철학, 법학 그리고 나아가 자연과학까지 포괄하는 종합적 문화운동이었다. 낭만주의는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인물들에 의해 추진되고 발전되고 전파된 전 독일적 현상이었다. 낭만주의는 독일에만 국한된 운동은 아니었지만, 가장 독일적인 정신 사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낭만주의가 형성된 곳이 예나이며, 그 중심에 슐레겔 형제, 곧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1767~1845)과 프리드리히 슐레겔(1772~1829)이 있었다.

예나는 바이마르에서 불과 20㎞밖에 떨어져 있지 않고 기차로도 2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바이마르를 방문한 날 하루 그곳에서 묵고 다음날 예나로 가고 싶었지만, 연말이라 이런저런 일이 생겨서 다시 카셀로 돌아왔다가 3일 후에 예나로 향했다. 바이마르를 지나서 조금 더 가자 기차는 흰 눈이 쌓여 있는 산으로 접어들었다. 마음이 울적하거나 무언가 새로운 것을 구상할 때 산속으로 기차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들었다. 낭만주의의 고향을 찾아가는 길답다고나 할까, 무척 낭만적인 여행이다.

기차역에서 예나 옆 도시의 에르푸르트대학에 다니는 여학생을 만났다. 이곳 예나대학의 도서관에 지료를 찾으러 오는 길이라고 한다. 그 학생과 이야기하며 역을 빠져나왔다. ‘실러의 정원집’이 눈에 띄었다. 실러가 예나대학의 역사학 교수로 있을 때 이 집에서 집필을 했다고 그 학생이 설명해준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스마트폰으로 ‘낭만주의자들의 집’을 검색해 가는 길을 일러주었다.

낭만주의 용어 만든 슐레겔 형제
그들 추모하는 집엔 작은 흉상뿐
개인유품 찾아보기 힘들어 의외
흔히 반이성·반근대 비판받는 사상
실은 개인소외와 인간 노예화 반기
근대의 자기성찰 추구한 문화운동
노발리스·티크·셸링·파이트와 함께
공동철학·공동문학 집단지성 잉태

내가 예나 방문의 일차적인 목표로 삼은 낭만주의자들의 집은 예나 시내에서 좀 후미진 곳에 있었다. 성냥갑 같은 모양에 색깔도 칙칙한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낭만주의자들의 집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았다. 방문객이라고는 나 혼자뿐이다.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슐레겔 형제의 개인적인 유품도 찾아볼 수 없었고 전문가가 아니라면 크게 호기심을 느끼고 볼 만한 것도 없었다.

예나에 있는 슐레겔 형제가 살던 집(위쪽). 동생인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낭만주의의 이념과 이론을 정초했고, 형인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은 문헌학자이자 비평가로서 번역을 통해 낭만주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예나대학을 설립한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의 기념상(아래쪽). 예나의 시장 광장 한가운데 세워져 있다. 예나는 규모는 작지만 수많은 지식인들을 품은 대학 도시다.
예나에 있는 슐레겔 형제가 살던 집(위쪽). 동생인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낭만주의의 이념과 이론을 정초했고, 형인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은 문헌학자이자 비평가로서 번역을 통해 낭만주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예나대학을 설립한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의 기념상(아래쪽). 예나의 시장 광장 한가운데 세워져 있다. 예나는 규모는 작지만 수많은 지식인들을 품은 대학 도시다.
이 집은 본디 철학자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1762~1814)가 살던 집이다. 피히테는 1794년부터 1799년까지 예나대학의 철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집을 낭만주의자들의 집으로 만들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피히테는 독일 관념론을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명이다. 이성을 중시하는 관념론과 감성을 중시하는 낭만주의가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다고 피히테가 살던 집을 낭만주의자들의 집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들의 지적 유산을 보존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러나 피히테는 낭만주의가 형성되는 데에 철학적으로 중요한 기여를 했다.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모든 현상을 그 형성 과정에서 보는 피히테의 발생론적 방법을 원용해 역사적 정신과학을 구축했다. 역사성은 낭만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독일 관념론을 대표하는 또다른 철학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셸링(1775~1854)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셸링의 자연철학은 낭만주의자들의 자연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예나에서 형성된 낭만주의는 집단지성의 산물이었다. 슐레겔 형제를 중심으로 하여 노발리스(1772~1801), 루트비히 티크(1773~1853), 셸링, 그리고 카롤리네 슐레겔(1763~1809)과 도로테아 파이트(1764~1839) 같은 여성들이 모여들었다. 또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던 슐라이어마허와도 연대를 맺고 있었다(피히테는 1799년 무신론자라는 혐의로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베를린으로 갔다). 이렇게 해서 낭만주의 서클이 만들어졌다.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낭만주의적 집단지성을 ‘공동철학’과 ‘공동문학’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공동철학이라는 용어의 ‘철학’이라는 말은 좁은 의미의 철학이 아니라 지적·예술적 사유와 창작 및 토론을 가리킨다. 독일에서는 전통적으로 철학이 인식과 사유 그리고 지식을 상징하는 말로 쓰인다. 이들은 공동철학과 공동미학이라는 기치 하에 상호 협력하고 보완함으로써 낭만주의라는 새로운 문화운동을 확립해 나갔다.

이 낭만주의적 집단지성 안에서 동생 슐레겔은 이론가이자 철학자로서 낭만주의의 이념과 이론의 초석을 놓았다. ‘낭만주의’라는 용어도 그가 만들어낸 것이다. 형 슐레겔은 문헌학자이자 비평가로서 외국문학을 독일어로 번역함으로써 낭만주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그는 특히 셰익스피어 번역으로 유명한데, 1797년부터 1810년까지 모두 9권으로 출간된 그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표준 번역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리고 슐레겔 형제는 ‘아테네움’이라는 저널을 창간하고 그 편집을 담당했다. ‘여신 아테나의 신전’이라는 의미로서 이 저널은 비록 1798년에 창간되어 1800년까지 총 6권밖에 출간되지 않았지만 공동철학과 공동문학의 실천적 장과 기관으로 기능함으로써 낭만주의 운동이 정착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노발리스는 시문학을 대표했다. 낭만주의적 사랑과 동경을 상징하는 말인 ‘푸른 꽃’도 그의 작품에서 연유한 것이다. 티크는 대중적인 소설가와 동화작가로 활약했다. 셸링은 자연철학자로서의 역할을, 슐라이어마허는 신학자와 모럴리스트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카롤리네 슐레겔은 작가 겸 번역가로서, 또 도로테아 파이트도 작가 겸 비평가로서 각각 낭만주의 형성사에서 확고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

낭만주의자들의 집 뒤쪽에는 작은 정원이 있고 그 정원에는 두 개의 남자 흉상과 한 개의 여자 흉상이 나란히 서 있다. 남자 흉상은 슐레겔 형제이고 여자 흉상은 카롤리네다. 카롤리네는 1784년 형 슐레겔과 결혼했다가 헤어지고 1803년에는 셸링과 결혼했다. 도로테아는 1783년 파이트라는 남성과 결혼했다가 헤어지고 1804년 동생 슐레겔과 결혼했다.

오늘날 낭만주의는 흔히 ‘낭만적이다’ 또는 ‘로맨틱하다’는 의미로 쓰인다. 물론 그런 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낭만주의는 본디 고대나 고전주의와 구분되는 ‘근대적(현대적)’ 문화운동이라는 자아상을 갖고 있었다.

정말 낭만주의는 낭만주의자들이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근대적이었을까? 사실 낭만주의는 반근대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도 그럴 것이 낭만주의는 이성을 중시하고 합리성을 추구하는 계몽주의에 반기를 들고 감정을 중시하고 비합리성을 추구했다. 심지어 낭만주의는 초자연적인 것, 동화적인 것, 공상적인 것, 신비적인 것 그리고 주술적인 것을 중요한 문학적 형상화의 모티프로 간주했다. 게다가 암흑의 시대라 불리는 중세를 그 정신적 근원으로 보았다.

이처럼 반계몽적인, 곧 반이성적이고 반합리적인 낭만주의를 반근대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충분한 근거와 일리가 있다. 근대는 이성과 계몽 그리고 거기에 기반하는 과학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파악된 근대는 절반만의 근대이다. 분명 근대는 이성과 계몽의 시대다. 그리고 과학의 힘으로 엄청난 진보와 발전을 가져왔으며 인간과 개인을 전통과 종교 그리고 사회적 힘으로부터 해방시켰으며 그들에게 자유를 주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근대는 인간과 개인을 소외시키고 노예화하고 파괴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니까 근대는 계몽적이지 못한 계몽, 이성적이지 못한 이성 그리고 합리적이지 못한 합리성의 시대이기도 하다.

낭만주의는 바로 이 근대의 모순과 병리적 현상, 곧 이성과 계몽의 변증법을 깊이 통찰하고 이 사태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비판하고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기제가 바로 감정·체험·신비 등과 같은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이었다. 낭만주의는 그 어떤 정신적 사조보다도 탁월하고 광범위한 근대의 자기성찰·자기비판·자기극복을 추구했던 문화운동이었다. 이렇게 보면 낭만주의는 오늘날 사회학에서 말하는 ‘성찰적 근대’를 이미 2세기 전에 선취해 실천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낭만주의는 근대적인, 너무나 근대적인 문화운동이었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의 모더니티 담론도 직간접적으로 낭만주의에 젖줄을 대고 있다.

물론 낭만주의는 단순히 계몽주의에 대한 저항운동이라는 식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감성과 비합리성은 근대의 구성요소이다. 다시 말해 감성과 비합리성은 근대인의 삶과 행위를 결정적으로 각인하는 요소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세계의 관찰과 해석을 필요로 하는 동시에, 심미적이고 종교적인 세계의 관찰과 해석을 필요로 하는 것이 근대라는 시대의 특성이자 본질이다.

낭만주의처럼 중요한 정신적 사조의 발자취를 더듬는 사상사적 기행을 낭만주의자들의 집에서 끝낼 수는 없다. 그래서 하나라도 더 찾아볼 마음으로 로비를 둘러보니 한쪽 벽에 낭만주의자들에 대해 간략하게 적어 놓은 팸플릿이 붙어 있다. 가까이서 보니 슐레겔 형제가 살던 곳이 표시되어 있다. “마르크트 23번지”(시장 23번지). 이 낭만주의자들의 집이 “운터름 마르크트 12a”(시장 아래 12a번지)가 아닌가? 반가운 나머지 직원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한걸음에 달려갔다. 그곳엔 슐레겔 형제와 카롤리네와 도로테아의 기념 편액이 걸려 있었다.

거기서 둘러보니 시장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기념상이 눈에 들어왔다. 예나대학을 설립한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1503~1554)의 상이었다. 예나가 대학도시라는 자기정체성을 안팎에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예나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도시이다. 인구가 10만이 넘는 도시에 플랫폼도 두 곳밖에 없다. 기차역에 내렸을 때 꼭 산골짜기 탄광촌에 온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낭만주의가 탄생하고 수많은 지식인들이 모여들어 독일의 정신적 중심지가 되었던 곳이다. 오늘날에도 교육과 연구라는 자기정체성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독일 통일 뒤에는 세 개의 막스 플랑크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대학이나 연구소는 복잡하고 번다한 대도시나 신도시에 자리잡아야 국제성이 획득되고 세계화가 달성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예나를 보라!

김덕영 사회학자·독일 카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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