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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사회 체계이론’ 연구 30년, 연구비 0원…루만은 독일의 선비였다

등록 2013-02-27 20:50수정 2013-03-07 09:56

루만이 즐겨 찾은 산책길. 독일 외를링하우젠에 있는 ‘철학자의 길’.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이 연구하다 지치면 산책했던 길이다. 그는 외를링하우젠의 절간 같은 집에 머물면서 ‘체계이론’이라 불리는 새롭고 방대한 사회학적 패러다임을 구축했다.
루만이 즐겨 찾은 산책길. 독일 외를링하우젠에 있는 ‘철학자의 길’.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이 연구하다 지치면 산책했던 길이다. 그는 외를링하우젠의 절간 같은 집에 머물면서 ‘체계이론’이라 불리는 새롭고 방대한 사회학적 패러다임을 구축했다.
[김덕영의 사상의 고향을 찾아서]
⑨ 사회학자 루만 키운 빌레펠트
“연구프로젝트: 사회이론, 연구기간: 30년, 연구비: 제로.”

이는 니클라스 루만(1927~1998)이 1968년 독일 빌레펠트대학 사회학과의 교수로 초빙되었을 때 앞으로 추진할 연구 계획으로 제출한 것이다. 실제로 루만은 그때부터 199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년 동안 사회이론 연구에 몰두해 ‘체계이론’이라는 새로운 사회학적 패러다임을 구축했다.

그런데 루만의 발자취를 찾기 위해서는 빌레펠트 말고도 그에 인접한 외를링하우젠이라는 도시를 방문해야 한다. 루만은 빌레펠트에서 살다가 1977년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외를링하우젠으로 이사를 하고 홀로 1녀2남의 자녀를 키웠다. 그리고 거기에서 세상을 떠났다.

빌레펠트 대학 교수 초빙될 때
제출한 연구계획서 그대로 실천
30년간 사회이론 연구 몰두
‘체계이론’ 새 패러다임 구축해

아무래도 빌레펠트보다는 외를링하우젠에 루만의 흔적이 더 많을 것 같아서 외를링하우젠을 먼저 찾기로 했다. 루만에 대한 생생한 증언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외를링하우젠은 빌레펠트에서 직선거리로 12㎞ 정도 떨어져 있으며 빌레펠트에서 완행열차로 10분 정도 걸렸다. 인구 1만6000명이 조금 넘는 작은 도시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돌아다닐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웬걸, 열차에서 내려 다시 3㎞나 버스를 타고 큰 고개를 넘어야 닿을 수 있는 산중도시였다.

루만이 20년 동안 산 집은 334m나 되는 산 정상 가까이의 ‘마리아네 베버 슈트라세’ 13번지에 있었다. 초인종을 눌러 보았으나 응답이 없었다. 평일인데도 동네가 마치 절간 같아, 오가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어쩌다 만나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모두 루만의 생전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저기 저 집에 살았지.” “아, 그 교수님! 지금 저 집은 그분이 살던 때와는 모습이 달라.” “그 자녀들은 아직도 이 도시에 산다고 하는데 정확한 주소는 몰라.” “그 교수님은 자주 개를 데리고 저 위 산에 나 있는 길로 산책을 했지.”

빌레펠트대학과 이 절간 같은 곳이 체계이론의 산실이었다. 루만의 체계이론은 이해하기가 만만치 않다. 이는 <루만 사전>이 나온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체계란 비교적 복잡한 구조(구조란 여러 요소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결합하여 상호작용하는 것을 가리킨다)를 가리킨다. 체계는 환경과 구별되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환경은 좁은 의미의 생태적 환경이 아니라 체계 밖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칭한다. 하나의 체계에 대해서 다른 체계들은 모두 환경이 된다. 루만에 따르면, 전체 사회는 하나의 체계를 이룬다. 그러나 동시에 체계로서의 사회는 다양한 하부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체계와 환경의 경계는 일정한 통과성을 지닌 폐쇄성을 보여준다. 폐쇄성이란 체계가 외부세계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는 체계 내부의 규칙성과 법칙성 그리고 자율성의 확보를 가능케 한다. 통과성이란 체계가 환경으로부터 필요한 것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러한 특성을 지니는 체계는 사회의 복잡성을 감소시키는 기능을 한다.

그가 연구하다 지치면 올랐던
‘철학자의 길’ 따라 걸으니
치열한 사유와 고뇌 느껴지는듯

이러한 체계 개념의 기저에는 현대사회에서 복잡성이 증대한다는 루만의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현대사회가 어떻게 기능하고 작동하는가 하는 문제가 루만 사회학의 인식론적 관심이며, 이는 다시금 다양하게 분화된 하부체계가 얼마만큼 사회적 복잡성을 감소시킬 수 있느냐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주체성이니 의미성이니 이성이니 자율이니 행위니 또는 의사소통행위니 하는 것들은 모두 사회체계의 복잡성만 증가시키게 된다. 주체와 그의 의식 및 행위는 단지 체계의 환경일 따름이며, 그가 체계에 속하는 경우는 어디까지나 그가 수행하는 기능을 통해서이다.

마리아네 베버(1870~1954)는 저 유명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부인이다. 그는 외를링하우젠에서 태어났으며 근대 여성운동사에 이론적·실천적으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마리아네 베버 슈트라세’라는 길 이름은 외를링하우젠이 그를 기리기 위함이리라!

루만이 즐겨 산책을 했다는 산길을 찾아갔다. 이곳에 오기 전에 그 근처에 루만의 기념상이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기대감은 두 배로 컸다. 산책길 입구에는 정말 루만의 두상이 서 있었다. 그런데 혼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베버의 두상과 함께 나란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그 바로 밑에 있는 시민대학의 책임자가 개인적으로 세운 기념상이란다. 그는 루만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흠모하는 사회학자이다. 그날은 마치 바깥에 외출 중이라 그의 부인이 친절하고도 상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유럽연합의 고위인사와 같은 저명한 사람들도 이곳을 찾는다고 자랑이 한창이다. 그 부인에게 루만의 묘소를 꼭 한번 참배하고 싶다고 말했더니, 루만은 아주 외진 곳에 묻혀 일반인들은 도저히 찾을 수 없다며 다음에 시간을 내서 오면 기꺼이 안내하겠다고 한다.

(※클릭하면 이미지가 커 집니다.)

왜 루만의 두상과 함께 베버의 두상을 세웠을까? 그것은 베버와 이 도시의 인연 때문이란다. 베버는 1893년 가을 이곳에서 사촌누이(큰아버지의 큰딸)의 딸 마리아네와 결혼했다. 그 뒤 베버는 외를링하우젠을 마치 고향처럼 생각하고 자주 이곳에 들렀다. 지금도 그의 큰아버지 때부터 가문의 저택이었던 ‘베버 빌라’가 남아 있는데, 막스 베버는 외를링하우젠에 오면 이곳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지금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내가 보기에 루만과 베버의 두상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은 단지 이 두 거장과 외를링하우젠의 인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더 나아가 향후 사회학이론의 중요한 축이 될 ‘베버냐 루만이냐’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새로운 축은 ‘마르크스냐 베버냐’라는 기존의 축과 상호보충하면서 사회학적 논의와 연구를 아주 풍요롭게 할 것이다.

베버는 개인과 그의 행위에서 출발해 구조적인 것을 감싸는 데 반해, 루만은 체계에서 출발해 개인과 그의 행위를 감싼다. 베버는 주체성과 주관적 의미를 강조한 데 반해, 루만은 탈주체성과 기능적 의미를 강조한다. 베버에 따르면 개인은 체계에 의해 그 인격과 자유를 박탈당할 위협에 처해 있다. 반면 루만에 따르며 체계는 개인의 인격과 자유에 의해 그 기능이 상실될 위협에 처해 있다. 또한 베버에게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라면, 루만은 사회를 의사소통에 의해 구성되는 포괄적인 체계로 간주한다. 그리고 베버가 보편사적 관점에서 다양한 합리성의 유형을 추구한 반면, 루만은 체계이론적 관점에서 합리성을 체계와 환경의 차이를 인지하고 유지하는 능력으로 파악한다. 게다가 모더니티 이론가로서의 베버가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지화를 극복하고자 한다면, 루만은 생활세계에 의한 체계의 식민지화를 극복하고자 한다.

루만이 연구를 하다가 지치면 산책했던 길은 산 중턱에 난 길이라 공식적인 이름은 없다. 하지만 그곳 사람들은 비공식적으로 ‘철학자의 길’이라고 부른단다. 그 길을 직접 걸어보았다. 추운 겨울이지만 이 시대의 진정 큰 정신인 루만의 치열한 사유와 고뇌를 ‘추체험’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흥분되고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직도 그의 숨결과 체취가 남아 있는 듯했다. 바로 이런 맛에 사상의 고향을 찾는 것이다.

외를링하우젠에는 루만의 이름을 딴 중등교육기관인 ‘니클라스 루만 김나지움’이 있다. 1857년에 문을 연 유서 깊은 김나지움인데, 루만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고 그가 생의 마지막 20년을 이 도시에서 산 것을 기리기 위해서 2000년부터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사실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도 세상을 떠난 지 2년 만에 공공기관에 그의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루만과 외를링하우젠의 인연이 깊으며 외를링하우젠은 그러한 루만을 깊이 기억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회 수많은 문제점
루만의 이론에서 빌려오자면
체계적 합리성의 결여 탓 아닐지…

이 김나지움을 둘러보고 나서 빌레펠트대학으로 향했다. 빌레펠트대학은 1969년에 창립되었다. 그 당시까지 독일 대학은 훔볼트대학이 제시한 교육이념, 곧 보편적이고 전인적인 교양교육의 이념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빌레펠트대학은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요구되는 전문인력의 양성을 그 목표로 삼았으며, 다양한 인식영역의 학제적 연구와 융복합을 추구했다. 이런 점에서 빌레펠트대학은 개혁대학이라는 자아상을 갖고 있다. 이러한 자아상은 건축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곧 모든 학부가 중앙 홀을 통해서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새로운 유형의 고등교육기관인 빌레펠트대학의 교육이념을 제시하고 구체적으로 디자인한 것은 사회학자 헬무트 셸스키(1912~1984)였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철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훔볼트대학과 달리 이 대학은 사회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루만은 1966년 뮌스터대학에서 셸스키의 지도로 하빌리타치온(독일 대학교수 자격)을 취득하고 빌레펠트대학이 창립되기도 전인 1968년에 그 대학의 첫번째 교수로 초빙되었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사회학부(사회학과가 아니라!)를 만드는 것이었다. 독일어권에서 사회학이 학과가 아니라 학부인 경우는 빌레펠트대학이 유일하다.

도시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도시 안에 대학이 있고 대학 안에 도시가 있는) 전통적인 대학과 달리 빌레펠트대학은 도시 외곽에 교정이 있다. 그곳에서 우반(U-Bahn: 도시 안을 천천히 운행하는 열차로 우리의 옛 전차에 해당함)을 타고 10분 정도 가니까 시내 중심이 나왔다. 인구 34만이 넘는 빌레펠트는 그렇게 고풍스러운 도시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옛 시장 광장에 서 있는 기념상이 유달리 눈길을 끌었다. 위엄이 넘치는 왕후장상도 아니고 근엄한 예술가도 아니고 고매한 학자도 아니었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요상하게 생긴 긴 담뱃대를 입에 문 채 왼쪽 손으로 받치고 있고, 오른손에 쥔 지팡이는 다리 뒤쪽으로 빼고 있으며 등에는 무언가 헐렁한 것을 지고 있다. 기존의 기념상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그것은 특정한 인물의 기념상이 아니라 ‘아마포 직공’ 기념상이다. 곧 특정한 직업을 기념하는 상이다. 이는 빌레펠트가 전통적으로 방직업이 발달한 도시라는 자아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루만의 학문 이론은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커다란 함의를 지닌다. 그의 이론으로 보면, 한국 사회는 시급히 체계적 합리성을 확보해야 한다. 곧 다양한 사회체계와 그 다양한 하부체계가 다른 체계로부터 간섭이나 방해를 받지 않고 자체적인 논리와 법칙에 따라서 기능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문제점들은 바로 이 체계적 합리성의 결여, 곧 체계와 환경이 뒤범벅된 복잡성과 혼란성에서 오는 것이다.

루만은 연구비도 없이 대학과 이 절간 같은 동네를 오가며 연구와 강의에 매진했다. 그리고 체계이론이라는 새로운 사회학적 패러다임을 구축했다. 그는 아주 소박하고도 소탈한 삶을 살았다. 이는 모든 것을 연구비 탓으로 돌리며, 기자나 스타보다 더 자주 언론 등에 얼굴을 내밀다가 선거철이 되면 권력의 주변을 맴도는 우리 지식인들과는 근본적으로 판이한 모습이다.

나는 그날 독일 땅에서 내가 어려서부터 배워 알고 있던 선비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했다.

김덕영 사회학자·독일 카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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