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도시 상징 된 ‘거위 소녀’ 동상
독일 괴팅겐 구시청 광장에 놓인 ‘거위 소녀’ 청동상. 그림 형제의 동화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재로 한 이 청동상은 ‘대학도시’인 괴팅겐의 상징이다. 대학에 등록한 학생들이 소녀에게 키스를 하고 꽃을 바치는 전통이 전해오고 있다.
[김덕영의 사상의 고향을 찾아서]
⑪ 현상학 운동 발원지 괴팅겐
⑪ 현상학 운동 발원지 괴팅겐
교육·연구의 도시 자부심 커 후설이 괴팅겐대 교수로 온 뒤
‘주체 지향성’ 강조 현상학 창시
이성영역 머물던 철학사유 확장 그가 쓴 4만쪽의 방대한 자료
지금까지 ‘후설 총서’로 발간중 1990년대 초 박사학위 논문을 마무리하던 때의 일이다. 에드문트 후설(1859~1938)의 현상학을 두 쪽가량으로 정리할 일이 생겼다. 막스 베버의 문화과학 및 사회학에 대해 갖는 지성사적 의미를 논하는 것이었다. 논문도 거의 완성되었겠다, 가벼운 마음으로 대학 도서관에 갔다가 까무러칠 뻔했다. <후설 총서>가 두 줄로 꽂혀 있는데 너무나 방대해서 그중에 내가 찾는 책이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많이 쓸 수 있을까 하는 경외감이 들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후설 총서>는 완간된 것이 아니었으며, 지금도 그렇다! 내가 지식인의 신조로 삼고 있는 “나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는 그때의 체험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처럼 내가 지적으로 어린 시절 큰 사표로 삼았던 후설은 오스트리아 모라비아 지방(오늘날에는 체코 공화국에 속함) 출신의 유대인이다. 그러나 학자로서의 이력은 전적으로 독일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1887년부터 1901년까지 무려 14년 동안이나 할레대학에서 강사로 있다가, 1901년에 42살의 나이로 괴팅겐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게 되었다. 그리고 1916년 프라이부르크대학에 초빙되어서 1928년 정년퇴임했다. 2012년의 마지막날, 후설의 발자취를 찾아서 괴팅겐으로 길을 잡았다. 괴팅겐은 이번에 순례하는 추로지향 가운데 내가 머물고 있는 카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도시이다. 직선거리가 40㎞가 채 안 되며, ‘도시 간 고속철도’(ICE: Inter City Express)로는 20분, 완행열차로는 한 시간 걸린다. 시인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말마따나 단순히 “공간을 살해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도시 간 고속철도를 타야겠지만, 여행하는 맛을 즐기려면 역시 완행열차가 제격이다. 강이 따라오고 숲은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한다. 넓게 펼쳐진 산야와 거기에 드문드문 자리한 마을들은 한가로움과 여유로움이 넘친다. 카셀에서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맥주를 한아름씩 안고 탄다. 괴팅겐의 친구들과 송구영신 파티를 하러 가는 모양이다. 그들의 모습을 보니 나도 덩달아 젊어지는 것 같다. 좀 시끄러운 것이 흠이기는 하지만. 괴테이던가, 와인을 마시지 않고도 취하는 것이 젊음이라고 말한 이가?! 괴팅겐에 도착해 후설이 살던 집을 먼저 찾아나섰다. 그가 살던 곳은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한 아담하고 소박한 3층집이었다. ‘헤르만-푀게-베크 7번지’에 있는데, 집 오른쪽 벽 중간에 “에드문트 후설 1901~1916”이라는 글귀가 음각된 기념편액이 걸려 있다. 그리고 왼쪽 벽 중간에도 또다른 두 개의 기념편액이 걸려 있는데, 그것은 당시 여성으로서 두번째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마리아 괴페르트메이어(1906~1972)와 그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괴페르트(1870~1927)가 이 집에 살았던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지금도 한적한 편이지만, 당시에는 더욱 조용할 듯하여 사색과 연구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박사학위 논문 막바지 단계에서 참고하려고 찾았던 후설의 책은 〈논리연구〉였다. 이 책은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권은 1900년에, 제2권은 1901년에 출간되었다. 이 〈논리연구〉는 현상학의 태동을 만천하에 고지한 저작으로서, 그 지성사적 의미는 역시 1900년에 출간되어 정신분석학의 태동을 만천하에 고지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저작 〈꿈의 해석〉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업적으로 인해 후설은 1901년 괴팅겐대학의 교수로 초빙됐고, 이곳에서 살기 시작했다. 부교수로 시작한 그가 정교수가 된 것은 1906년의 일이었다. 후설이 살았던 집에서 한 집 건너에 ‘막스 플랑크 다종교 및 다인종 사회 연구소’가 있다. 괴팅겐에는 총 4개의 막스 플랑크 연구소가 있으며, 약 20㎞ 떨어진 카틀렌부르크린다우에 있는 태양계 연구소까지 합치면 총 5개가 된다(실제로 이 연구소는 괴팅겐 소재로 친다). 막스 플랑크 연구소는 대학과 독립적인 연구기관이다. 그러나 대학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이 소재하는 도시를 중심으로 전국에 분포되어 있다. 아무튼 인구 12만의 괴팅겐은 지방의 이름 없는 한 작은 도시가 아니라 교육과 연구의 중추적인 구실을 하는, 작지만 아주 큰 도시이다. 이러한 자부심은 중앙역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그곳의 플랫폼에는 괴팅겐이라는 현판 바로 밑에 “지식을 창출하는 도시”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그 이전에는 “대학도시”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는데, 막스 플랑크 연구소를 고려해 그렇게 바꾸지 않았나 싶다. 괴팅겐대학은 1734년에 설립되었다. 중세에 세워진 대학들과 달리 괴팅겐대학은 계몽주의 정신의 세례를 흠뻑 받았다. 그에 걸맞게 “모든 사람들의 복지를 위하여”를 대학의 슬로건으로 내세웠으며, 학생들을 대학 바깥의 세계에 적합하도록 교육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리하여 철학부, 법학부 및 의학부를 신학부와 동등한 위치에 놓고 가르쳤다. 이러한 계몽주의 정신에 힘입어 괴팅겐대학은 유럽 수학과 자연과학의 중심지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근대 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1777~1855)가 바로 이곳에서 공부하고 가르쳤다. 가우스와 더불어 괴팅겐대학은 근대 수학의 메카가 되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더불어서 20세기 물리학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는 양자역학은 바로 이곳 괴팅겐대학에서 발전했다고 주장하는 것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니다. 양자역학의 산파 구실을 한 세계적인 학자들이 바로 이곳에서 연구하거나 교류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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