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탈진 산꼭대기까지 도시가 펼쳐져 있다. 위쪽에 있는 시가지와 아래쪽에 있는 시가지를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가 있다. 건물이 아니라 도시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경우는 처음 본다. ‘도시간 고속철도’(ICE; Inter City Express)도 들어오지 않는다. 인구는 8만이 조금 넘을 뿐이다.
무슨 오지의 광산촌이 아니다. 독일의 유서 깊은 대학도시 마르부르크 이야기이다. 흔히 마르부르크는 괴팅겐, 튀빙겐 및 하이델베르크와 더불어 전형적인 대학도시로 꼽힌다. 인구 8만에 학생이 2만1000명 남짓하고 교직원이 3000명 정도 된다. 그러니까 도시 인구의 거의 3분의 1이 대학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는 말이다. 한국에서도 교육도시라 불리는 도시가 여럿 있다. 그러나 모든 대학이 아무런 특성도 없이 일등부터 꼴찌까지 일사불란하게 서열화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대학, 그것도 세칭 명문대학은 모두 수도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도시라는 말은 무색할 수밖에 없다.
“칸트에게 돌아가자” 기치 아래
사회학·심리학 등 분화된 시기
개별과학 논리적 정초 추구해
1900년 전후 지성계 풍미했지만
현상학과 실존철학 밀려 쇠퇴
마르부르크대학은 1527년에 문을 열었는데, 세계 최초의 프로테스탄티즘(개신교파) 대학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1517년에 종교개혁이 시작된 지 불과 10년 만에 이 대학이 세워졌다는 사실만 보아도 종교개혁이 얼마나 빨리 진행되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500년 가까운 역사의 이 마르부르크대학에서는 수많은 사상가들이 공부하거나 가르쳤다. 그 가운데 이번 기행의 대상은 ‘마르부르크학파’라 불리는 신칸트학파의 일파를 창시한 철학자 헤르만 코엔(1842~1918)이다.
사실 신칸트학파는 일반인들에게 그리 친숙한 이름은 아니다. 전문 철학자들도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신칸트학파는 187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독일 지성계를 풍미했다. 칸트 철학의 전통에 입각해 인간의 정신 및 삶, 행위와 문화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전개하는 일군의 철학자들(수백명의 강단철학자들)로 구성된 지적 공동체였다.
“칸트에게로 돌아가자”는 기치를 내건 신칸트학파 철학자들은 인간의 정신 및 삶, 행위와 문화에서 이성이 토대가 된다는 기본가정에서 출발했다. 신칸트학파는 원래 인간의 이념과 정신을 단순한 경제적·물질적 토대의 반영으로 보는 유물론에 대한 반대로 일어났는데, 점차 경험적·물질적 세계와 이념적·정신적 세계의 구분을 반대하는 여타의 철학적 또는 과학적 이론과 경향으로 그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이를테면 경험주의, 실증주의, 생리학, 민족심리학, 사회학, 실용주의, 심리학 등이 그것이었다.
마르부르크 구대학에 걸려 있는 헤르만 코엔의 편액. 신칸트학파는 철학사적 유물이 되고 말았지만, 마르부르크는 코엔을 자신의 역사 일부로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신칸트학파는 마르부르크학파와 서남학파로 구분된다. 전자는 마르부르크 대학을 중심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후자는 그 중심지인 하이델베르크대학이 독일 서남부에 위치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두 학파의 커다란 차이점은, 전자가 일차적으로 인식론과 다양한 개별과학의 논리적 정초를 추구했다면, 후자는 특히 문화철학과 가치철학의 구축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서남학파의 창시자가 빌헬름 빈델반트(1848~1915)라면, 마르부르크학파의 창시자는 헤르만 코엔이다.
유대인인 코엔은 1873년 마르부르크대학에서 신칸트학파 철학의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인 프리드리히 알베르트 랑게(1828~1875) 지도를 받아쓴 칸트에 대한 논문으로 대학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랑게가 코엔을 그의 “정신적 후계자”로 간주했기 때문에, 코엔은 1875년 랑게가 세상을 떠나자 1876년 그의 후임으로 마르부르크대학의 철학교수가 되었다. 이로써 마르부르크대학은 신칸트학파 운동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코엔은 칸트의 3대 비판서 체계에 입각해 칸트의 철학을 해석했는데, 그 결실은 〈칸트의 경험이론〉 〈칸트의 윤리학 정초〉 〈칸트의 미학 정초〉 3부작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런 칸트 해석에 입각해 자신의 철학체계를 구축했는데, 그 결실은 〈순수인식의 논리〉 <순수의지의 윤리학〉 〈순수감정의 미학>의 3부작으로 나타났다.
500년 역사 마르부르크대학엔
코엔 기념편액 등 곳곳에 흔적
코엔이 살던 집. 마르부르크 ‘우니베어지테츠 슈트라세’ 62번가에 있다. 코엔은 여기에 살면서 마르부르크 구대학에서 가르쳤다. 마르부르크 시내를 흐르는 란 강가에는 그를 기념한 ‘헤르만코엔베크’란 길도 있다.
이 가운데 1871년에 나온 <칸트의 경험이론>은 마르부르크학파의 금과옥조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 책에서 코엔은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비판한 것이 순수이성이 아니라 경험이라는 가정을 놓고 출발한다. 코엔에 따르면 이 경험은 인식 대상의 세계와 무관한 순수사유에 의해 구성된다. 그러므로 칸트 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직관과 물자체는 폐기되어야 하며 순수사유만이 철학적 논의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순수사유란 보편타당하고 필연적이며 객관적인 과학적 사유, 즉 수학과 자연과학을 가리킨다. 그것은 순수인식이다. 이 점에서 코엔은 칸트와 결정적으로 구분된다. 칸트에 따르면 선험적 능력은 경험, 즉 경험적 인식의 전제조건이지 경험 그 자체를 구성하지 않는다. 선험적 능력은 인식에서 부분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그래서 직관이 필요하고 물자체가 설정되는 것이다.
코엔은 이러한 인식론, 즉 순수인식의 논리를 윤리학과 미학에도 적용한다. 이제 윤리학과 미학은 인식론적으로 정초되며, 따라서 순수의지의 윤리학이 되고 순수감정의 미학이 된다. 순수의지와 순수감정은 각각 주관적인 의지를 초월하는 객관적 이상과 주관적인 감정을 초월하는 객관적인 법칙을 가리킨다. 이렇게 해서 칸트 철학의 분화론적 사고, 즉 인간의 정신능력을 인식이성, 실천이성, 판단이성으로 구별하는 방식이 코엔에 의해서 총체론적 사고로 회귀했다.
마르부르크에는 구(舊)대학이라는 건물이 있다. 처음 보았을 때에는 무슨 성당이나 수도원인 줄 알았다. 현재는 마르부르크대학의 신학부가 자리하고 있다. 그 한쪽 벽에 코엔의 기념편액이 붙어 있다. 코엔이 가르쳤던 바로 그곳이다. 마르부르크에서 코엔은 대학로라는 의미의 ‘우니베어지테츠 슈트라세’ 62번지에 살았는데, 그 집에서도 기념편액을 볼 수 있다. 또한 마르부르크는 란 강가에 있는 한 길을 ‘헤르만코엔베크’라고 부름으로써 이 철학자를 기억하고 있다. 이 길에서 바라보면 구대학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구대학은 마르부르크에서 산 정상에 있는 성 다음으로 큰 건축물인 듯싶다.
산 위에 자리한 마르부르크는 평지의 도시들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도시를 떠나지 않으면서 도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게다가 란 강이 도시를 에워싸고 평화롭게 흐른다. 산과 물이 있으니, 배산임수의 명당은 아닐지 몰라도 도시와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움이 있다. 도시 안에서 자연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구시가지에는 중세의 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엘리자베트 교회와 성이 볼만했다. 엘리자베트 교회는 성녀 엘리자베트(1207~1231)를 기리기 위해 1235~83년 그의 묘석 위에 세워진 교회로 독일의 초기 고딕 양식을 대표한다. 그리고 산자락에 있는 엘리자베트 교회와 달리 산 정상에 위치한 마르부르크 성은 11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8단계에 걸쳐 건축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현재 성의 일부는 마르부르크대학의 예술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마르부르크 시내 산 정상에 있는 마르부르크 성. 1529년 이곳에서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와 울리히 츠빙글리 사이에 ‘성만찬’ 논쟁이 벌어졌다.
엘리자베트 교회를 구경하고 나서 헉헉거리며 해발 300m에 달하는 성에 올랐다. 그곳에서 내려다보이는 세상은 흰 눈으로 덮여 있었다. 어떤 건물이 얼마나 오래되었고 어떤 양식으로 지어졌느니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다. 그리되면 저 은색의 아름다움을 반감시킬 것만 같았다.
마르부르크 성은 건축사나 예술사뿐만 아니라 지성사적으로도 중대한 의미가 있다. 1529년 10월 이 성에서 필리프 1세(1504~1567)의 주재로 마르틴 루터(1483~1546)와 취리히의 종교개혁가 울리히 츠빙글리(1484~1531) 사이에 ‘성만찬’ 논쟁이 벌어졌다. 필리프 1세는 당시 변경백령 헤센의 군주로서 1527년에 마르부르크대학을 설립한 당사자다. 이 대학은 그의 이름을 따서 ‘필리프 대학’이라고도 불린다.
루터는 성만찬 때 그리스도가 빵과 포도주에 실재로 임재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실재적 임재설이라고 한다. 이에 반해 츠빙글리는 성만찬에서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를 상징설이라고 한다. 루터와 츠빙글리는 성만찬 논쟁 이후 결별했다. 이는 단순한 교회의 분열이 아니었다. 그것은 프로테스탄티즘이 좀더 근대화되는 계기였다. 루터가 여전히 중세의 실체론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던 반면, 츠빙글리는 근대적인 상징론적 사고를 전개했던 것이다. 제네바의 종교개혁가 장 칼뱅(1509~1564)은 성만찬 때 그리스도가 실재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임재한다는 영적 임재설을 주창했는데, 이는 츠빙글리의 견해에 가까운 것이었다. 후일 츠빙글리의 종교개혁과 칼뱅의 종교개혁이 결합하여 개혁교회가 탄생했다. 이 개혁교회의 교리는 합리적인 근대문화가 형성되고 발전하는 데에 상당히 중요한 정신적 역할을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칼뱅주의의 예정론에 의해 결정적으로 각인된 근대 자본주의 정신이었다.
헤르만 코엔의 뒤를 이어서 파울 나토르프(1854~1924)는 자연과학과 심리학 및 교육학의 ‘비판적 정초’를 시도했다. 나토르프는 1881년 코엔한테서 대학교수 자격을 취득했으며 어떤 점에서는 코엔과 더불어 마르부르크학파의 공동 창시자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는 마르부르크학파 안에서 다양한 개별과학들을 비판적 으로 정초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예컨대 루돌프 슈탐러(1856~1938)는 법학과 사회과학, 카를 포어렌더(1860~1928)는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아르투어 리버트(1878~1946)는 비판철학을 비판적으로 정초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렇게 일세를 풍미하던 신칸트학파는 1930년대에 이르러 현상학과 실존철학에 밀려 급속히 쇠퇴했고, 이제는 철학사적 유물이 되고 말았다. 그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칸트를 지향했지만 결국은 헤겔화됨으로써 이도 저도 아닌 상태가 되어버렸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칸트학파가 아무런 역사적 의미도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마르부르크학파는 다양한 개별과학이 분화되는 지적 상황에 대해 포괄적인 철학적 성찰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마르부르크에 오기 전까지 나는 이 도시가 과연 코엔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마르부르크는 코엔을, 그리고 더 나아가 나토르프도 자신의 역사의 일부분으로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나토르프가 살던 집에도 기념편액이 부착되어 있고 그의 이름을 딴 길 ‘파울나토르프 슈트라세’도 있다. 이와 같이 지성계에서도 신칸트학파를 철학사의 중요한 부분으로 간주하고 그에 대한 지성사적 및 사회사적 연구를 강화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마르부르크를 떠났다. 멀리서 성과 엘리자베트 교회가 배웅을 하고 있었다.
김덕영 사회학자·독일 카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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