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영의 사상의 고향을 찾아서]
⑭ ‘비판이론’ 중심지 프랑크푸르트
⑭ ‘비판이론’ 중심지 프랑크푸르트
두 인접한 도시가 동시에 한 사상가를 기리고 있다. 그 이유는 서로 다르다. 한 도시는 이 사상가가 그 도시의 대학과 관련 있기 때문이고 다른 도시는 이 사상가가 살았기 때문이다. 두 도시에는 모두 대학이 있다. 그런데 서로 다른 대학이 아니라 한 대학이 두 군데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다.
이 두 도시는 독일의 에를랑겐과 뉘른베르크이며, 그 사상가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1804~72)이다. 에를랑겐대학은 1742~43년에 설립되었는데, 그 뒤 1918년 들어선 뉘른베르크 경제과학·사회과학 대학을 1961년 통합하면서 ‘프리드리히알렉산더대학 에를랑겐뉘른베르크’가 되었다.
에를랑겐과 뉘른베르크는 직선거리로 18㎞가 채 안 될 정도로 지척에 있다. 인구가 각각 10만과 51만을 조금 넘는다. 뉘른베르크는 바이에른 주에서 뮌헨(138만) 다음으로 큰 도시이며 독일에서 열네 번째로 큰 도시다.
포이어바흐가 인연을 맺은 순서에 따라서 에를랑겐부터 찾기로 했다. 내가 머무는 카셀에서 뉘른베르크까지는 교통편이 좋아서 ‘이체’(ICE·도시간 고속철도)로 두 시간 정도 걸린다. 그리고 뉘른베르크에서 에를랑겐까지는 완행열차로 20분 정도 걸린다.
에를랑겐 중앙역에서 동쪽으로 한참을 걸어가면 주로 공학 관련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대학 캠퍼스가 나온다. 그곳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광장’이라는 꽤 넓은 공터가 있고, 그 한쪽에 포이어바흐 기념석이 있다. 그리 크지 않은 소박한 자연석인데, 그 위에 부착된 동판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양각되어 있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1804~1872). 저명한 철학자이자 종교 비판가. 1827~1828년 에를랑겐에서 공부를 했고 1829년부터 사강사(요즘 대학의 시간 강사와 비슷하지만 대학에서 강사료를 받지 않고 수강생들에게 강의료를 받는 강사)로 가르쳤다. 그러나 강력한 저항에 부닥쳐 1836년 대학을 떠났다.”
포이어바흐는 1823년부터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곧 회의를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1824년부터 베를린대학으로 옮겨서 철학을 공부했고 2년 동안 헤겔이 개설하는 강의를 빠짐없이 들었다. 특히 논리학 강의는 두 번이나 들었다. 1826년부터 1년간 독학을 한 뒤 1827년부터는 에를랑겐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1828년에는 이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와 대학교수 자격을 취득하고 사강사로 일했다. 그러나 1830년에 나온 저서 <죽음과 불멸에 대한 고찰>이 기독교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포이어바흐는 어느 대학에서도 교수 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1832년에 강의를 접었다. 1835~36년 겨울학기 에를랑겐대학에서 다시 강의를 했지만, 1836년에는 영원히 대학을 떠나서 평생 재야학자로 활동했다.
방금 언급한 바와 같이, 포이어바흐는 일찍이 헤겔 철학에 빠져들었다. 1825년에는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아예 신학에서 철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그러나 이미 1827~28년에는 헤겔 철학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된다. 포이어바흐는 정신에서 출발하는 헤겔의 사변적 관념론은 주어와 술어를 전도시킨다고 생각했다. 즉 사유가 주어가 되고 존재가 술어가 된다. 포이어바흐가 보기에 이러한 사변적 관념론은 철학화되고 논리화된 신학에 지나지 않는다. 포이어바흐는 사유가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사유를 결정하기 때문에, 존재가 주어가 되고 사유가 술어가 된다는 견해를 내세운다.
에를랑겐은 내가 최근 방문한 도시들 중에 가장 현대적인 모습이었다. 길도 다른 도시들에 비해 직선의 형태를 띠고 있다. 마치 계획도시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옛 시가지, 특히 ‘궁전 정원’이라는 넓고 오래된 나무들이 우거진 정원과 그곳에 있는 옛 건물들에 자리한 대학 교정은 여느 도시 못지않게 중세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에를랑겐에서 다시 뉘른베르크로 가는 열차를 타니 점심때가 훌쩍 넘어 있었다. 새벽에 집을 나서며 싸 온 식은 커피와 딱딱한 빵으로 점심을 대신했다. 내 생전 그렇게 맛있는 커피와 빵을 맛본 적이 없었던 같다.
시간도 많이 지체되고 도시도 상당히 큰 편이라 뉘른베르크 중앙역 앞에 있는 여행안내소를 찾아갔다. 그랬더니 아주 친절하고도 상세하게 길을 일러줄뿐더러 포이어바흐에 대한 정보도 출력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 여행안내소 직원은 내 여행에 대해 응원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도시가 크면 어쩔 수 없이 여행안내소를 찾아야 하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포이어바흐는 1837년부터 1860년까지 뉘른베르크에서 30㎞가량 떨어진 중부 프랑켄 지방의 작은 시골 마을 브루크베르크에서 살았다. (현재 인구가 1300명이 채 안 된다.) 그러다가 부인이 공동 소유주로 있던 도자기 공장이 파산하자 가족과 함께 1860년 뉘른베르크 근처의 촌락 레헨베르크(오늘날에는 뉘른베르크에 속함)에 있는 한 농가로 이사를 해 187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다. 이 시기에 실러 재단, 뉘른베르크의 친구들과 후원자들, 사회민주노동당 등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뉘른베르크 중앙역에서 트램(도시 안을 천천히 운행하는 지하열차)을 타고 일곱 정거장을 가서 좀 경사진 길을 따라 올라가니 ‘철학자의 길’이라는 간판이 보이고 그 간판이 가리키는 계단을 올라가니 꽤 넓은 공원이 나왔다. 원래 이곳은 그런대로 높은 산이었는데 그 윗부분을 깎아서 공원으로 만든 것 같았다. 포이어바흐가 살던 농가는 그 아래의 평지에 있었다고 한다. 포이어바흐는 자주 전망이 좋은 이곳 산에 올라서 주변의 경관을 감상하면서 사색에 잠겼다고 한다. 현재 이 공원에는 비교적 큰 빈 석관의 형태로 된 포이어바흐 기념물이 있다. 그 옆에는 기념비가 하나 눈에 띈다. 이 기념비는 원래 포이어바흐가 살던 집에 1906년부터 부착되어 있던 기념 편액인데, 이 집이 여러 차례 팔리다가 1916년에는 헐려 버렸기 때문에 부착할 곳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뉘른베르크 시가 1999년에 이곳에 다시 기념비의 형태로 설치했다고 한다.
포이어바흐 기념물의 전면에는 “인간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서 신을 창조했다”라는 저 유명한 명제가 새겨져 있다. 이 명제는 “신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서 인간을 창조했다”는 기독교 신학을 전복시킨 것이다. 포이어바흐는 종교는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추상화해서 절대적인 존재로 신격화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신은 주체가 아니라 대상일 뿐이다. 주체는 어디까지나 인간이다. 이렇게 되면 종교에 대한 논의는 신학이나 철학에서 심리학과 인간학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는 사후 뉘른베르크의 ‘성 요한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가 살던 곳은 시내 중심에서 동쪽 방향에 있고, 그가 묻힌 곳은 서쪽 방향에 있다. 다시 중앙역으로 와서 우반(U-Bahn)으로 두 정거장을 간 다음 트램으로 갈아타고 네 정거장을 더 가니 ‘성 요한 공동묘지’가 나왔다.
그런데 공동묘지가 너무 큰데다 흰 눈이 수북이 쌓여 있어서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은 토요일이라 관리사무소도 문을 닫았다. 아찔했다. 할머니 한 분이 지나가시기에 하소연 겸 푸념을 했다. 그러자 관리사무소 쪽으로 가시더니 나를 부르셨다. 달려가 보니 저명인사들의 묘지 위치가 새겨진 동판이 있었다. ‘K76’. 포이어바흐의 묘지가 있는 곳이다. 잽싸게 달려갔다. 그러나 산 넘어 산이라고, 그 번호가 가리키는 열에는 묘지가 많았으며, 더구나 모든 묘지가 묘비도 없이 석관으로 되어 있었다. 그 위에는 흰 눈이 덮여 있어서 어느 것이 포이어바흐의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일단 첫번째 묘지 위에 쌓인 눈을 치워보았으나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했다가는 안 될 성싶어서 직감적으로 저거다 싶은 것을 골라서 눈을 치워보니 파란색으로 된 양각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1804년 생, 1872년 몰’이란 글자가 선명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1월 마지막 토요일 오후 3시15분에 포이어바흐의 묘지 앞에서 서원했다. 당신에 대한 멋진 책을 써서 오늘 저지른 이 불경죄를 씻겠노라고.
그의 철학을 짚지 않고는 사상사를 제대로 논했다고 말할 수 없다. 포이어바흐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할 수 있는 일종의 정신사적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의 철학은 한마디로 인간학적 유물론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포이어바흐는 신에서 출발하는 기존의 신학은, 그리고 정신, 의식, 주체, 이성 등에서 출발하는 기존의 철학은 인간의 본질을 추상화하여 초월적 신이나 이념의 세계로 투사시킴으로써, 즉 인간의 본질을 인간의 밖에서 찾음으로써 인간을 소외시킨다고 비판한다. 그러므로 사변적 사고체계는 인간의 실존과 경험적 현실에서 출발하는 사고체계, 즉 유물론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물론 유물론은 포이어바흐 철학의 전유물은 아니다. 예컨대 기계론적 유물론이 있는데, 이것은 인간을 물리적 존재로 간주한다. 이에 반해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은 인간학적이다. 즉 총체적 인간을 철학적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바, 이 인간은 신체(육신)와 감각을 지니고 시간과 공간에 의해 조건 지어지는 존재이다. 인간의 신체(육신)는 정신의 부수현상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 그리고 자아와 세계가 주어지고 결합되는 통로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포이어바흐가 정신, 의식, 주체, 이성 등 인간 본질의 또다른 측면을 부정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총체적 인간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다만 사변적 철학에서처럼 추상적 자아가 아니라 살이 있고 피가 흐르는 자아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러한 포이어바흐의 인간학적 유물론은 그 이후의 다양한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 대표적인 것이 카를 마르크스이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의 유물론과 헤겔의 역사적, 변증법적 사고를 결합시켜 사적, 변증법적 유물론을 구축하여 인류 역사, 특히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작동원리를 규명해냈다.
뉘른베르크는 이 위대한 근대 철학자와의 인연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또한 중세적 유산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이 도시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연합군의 공중폭격으로 옛 시가지가 거의 다 파괴되었다. 그러나 전후 폐허를 복구하여 독일의 여느 도시 못지않게 중세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사회학자·독일 카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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