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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헤겔·셸링과 함께 튀빙겐 삼총사 불린 ‘방랑 시인’ 횔덜린

등록 2013-04-17 20:12수정 2013-04-17 21:34

휠덜린 기념상 독일 튀빙겐 ‘구식물원’ 안에 있고 바로 옆에 튀빙겐대학이 있다. 휠덜린은 튀빙겐 대학 신학부를 다니며 헤겔, 셸링 등과 우정을 쌓았다.
휠덜린 기념상 독일 튀빙겐 ‘구식물원’ 안에 있고 바로 옆에 튀빙겐대학이 있다. 휠덜린은 튀빙겐 대학 신학부를 다니며 헤겔, 셸링 등과 우정을 쌓았다.
[김덕영의 사상의 고향을 찾아서]
<16>‘횔덜린 문학산실’ 튀빙겐
특정 문학사조에 속하지 않고도
가장 위대한 독일 ‘비가 시인’ 칭송
그가 산 시대를 ‘정신의 궁핍’ 규정
시인을 신과 인간 매개자로 바라봐
존재의 미적 형상화 다룬 작품 써
정신병 악화돼 방랑생활 접은 뒤
네카어강변 머물며 유명한 시 남겨
이번에 찾은 곳은 지난회 막스 베버를 만났던 하이델베르크와 마찬가지로 네카강에 위치한 아름다운 도시다. 주인공은 지난번에도 인용한 바 있는 ‘하이델베르크’라는 송가를 지은 바로 그 시인이다. 그는 막스 베버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네카 강변에서 살았다. 그리고 ‘네카강’이라는 송가도 지었다. 그 첫 두 연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대(네카 강)의 계곡들에서 내 가슴은 생명으로 일깨워지고/ 물결은 나를 에워싸고 찰랑거렸네./ 그대 방랑자여! 그대를 알아보는 마음씨 고운 언덕들/ 어느 하나도 나에게 낯설지 않네./그들의 정상에 서면 천국의 바람은 내 예속의 아픔을 풀어주기도 했고/ 환희의 술잔에서 생명이 빛나듯/ 계곡에선 파란 은빛 물결 반짝이었네.”

이 시인은 프리드리히 횔덜린(1770~1843)이며, 그가 인연을 맺었던 도시는 튀빙겐이다. 횔덜린은 튀빙겐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생의 마지막 36년을 튀빙겐에서 보냈다. 튀빙겐은 하이델베르크와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대학도시이다. 튀빙겐대학은 1386년에 개교한 하이델베르크대학보다 약 백년 뒤인 1477년에 설립되었다. 14세기 말부터 15세기 말까지 독일은 이른바 대학의 ‘베이비붐’ 시대를 겪었다. 이 시기에 열두개의 대학이 문을 열었다. 그 첫번째 베이비가 하이델베르크 대학이라면, 튀빙겐 대학은 (마인츠 대학과 더불어) 열한번째 베이비였다. 현재 튀빙겐은 인구가 8만9000명 정도인데, 그 가운데 학생과 교직원(대학 병원 포함)이 각각 2만7000명, 1만명 정도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처음 이 ‘사상의 고향을 찾아서’를 기획할 때부터 횔덜린을 넣다 빼기를 수없이 했다. 그때마다 전체적인 목록을 다시 짜야 했다. 그 이유는 횔덜린에 대한 나의 지식이 너무나도 일천했기 때문이다. 독문학이라야 대학에서 부전공한 것과 ‘지성사적 모더니티 담론’이라는 연구 시리즈를 기획하면서 수박 겉핥기식으로 공부한 것이 전부인 나에게는 무척 버거운 주제였다. 그렇지만 횔덜린은 튀빙겐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마치 막스 베버와 괴테 및 실러가 각각 수많은 거장이 명멸한 하이델베르크와 바이마르를 상징하듯이!

휠덜린탑. 휠덜린탑은 원래 휠덜린 숭배자 에른스트 침머의 집으로, 휠덜린은 이곳에서 인생의 마지막 30여년을 침머 가족의 보살핌속에서 시를 쓰면서 지냈다.
휠덜린탑. 휠덜린탑은 원래 휠덜린 숭배자 에른스트 침머의 집으로, 휠덜린은 이곳에서 인생의 마지막 30여년을 침머 가족의 보살핌속에서 시를 쓰면서 지냈다.
일반인들에게 횔덜린은 낯선 이름이다. 이에 대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가 특정한 문학사조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의 독일 문학은 크게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에 의해 양분되어 있었다. 고전주의는 바이마르의 괴테(1799~1832)와 실러(1759~1805)를 중심으로 발전했으며, 낭만주의는 슐레겔 형제(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 1767~1845, 프리드리히 슐레겔 1772~1829)를 중심으로 예나에서 형성되어 독일 각지로 전파되었다. 횔덜린은 괴테와 실러 그리고 낭만주의자들과 교류했지만 고전주의에도 낭만주의에도 속하지 않았다. 아마 그런 까닭에 횔덜린은 당대에는 물론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잊혀진 시인이었다.

그러나 횔덜린은 비가, 송가, 비가, 찬가, 에피그램(경구), 각운시 등 다양한 양식의 작품을 남겼다. 횔덜린은 문학사에서 아주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를 굳이 어떤 사조에 귀속시켜야 한다면, ‘횔덜린주의’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는 횔덜린을 가장 독일적인 시인이라고 격찬했으며, 낭만주의 작가 아힘 폰 아르님(1781-1831)은 횔덜린을 독일의 가장 위대한 비가(悲歌)시인이라고 칭송해마지 않았다. 횔덜린은 하이데거와 니체의 철학에 그리고 심미주의적 서정시인 슈테판 게오르게(1868~1933)를 비롯해 독일 시문학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니체가 고대 그리스 문화를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대별하는 방식은 횔덜린한테로 소급한다.

튀빙겐 대학에서 조금 떨어진 시립 공동묘지에 있는 휠덜린 묘지.
튀빙겐 대학에서 조금 떨어진 시립 공동묘지에 있는 휠덜린 묘지.
카셀에서 아이시이(ICE·도시 간 고속철도)로 세 시간 정도 걸려 슈투트가르트로 가서 완행열차로 갈아타고 한 시간 정도 더 가니 튀빙겐이 나왔다. 슈투트가르트에서 튀빙겐으로 가는 길은 공장 같은 건물이 자주 눈에 띄면서 아주 전원적이거나 목가적인 풍경을 연출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아름다운 도시 튀빙겐을 더욱 드러나게 하기 위한 전주곡이었나 보다. 튀빙겐은 내가 이번 추로지향 순례에서 본 도시들 중에서 가장 중세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도시 튀빙겐은 한 마디로 횔덜린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 튀빙겐 중앙역에서 한 10분 정도 걸어가면 네카강의 다리가 나오는데, 그 위에서 왼쪽으로 보면 강변에 동화에나 나올 법한 중세적인 건물들 옆에 노란색의 탑 같은 건물이 하나 눈에 띈다. ‘횔덜린탑’이다. 하이델베르크의 ‘막스 베버 하우스’가 연상되었다. 이 하우스도 구(舊)시가지에서 네카강의 다리를 건너면 (그 오른쪽) 강변에 자리하고 있다. 횔덜린탑 바로 위에 횔덜린이 치료 받던 병원과 그가 살던 개신교 기숙사가 있다. 그곳에서 언덕배기를 넘어가면 바로 튀빙겐 구시가지가 나오고 그 끝자락에 ‘구식물원’이라는 꽤 넒은 정원이 하나 이어지는데, 거기에 횔덜린 기념상이 서 있다. 바로 그 옆에 튀빙겐대학이 있는데, 횔덜린은 거기에서 조금 떨어진 시립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다. 대학에서 그의 묘지로 가다 보면 횔덜린의 이름을 딴 길 ‘횔덜린슈트라쎄’를 지나게 된다.

휠덜린슈트라세(휠덜린길). 튀빙겐대학에서 휠덜린 묘지로 가다보면 지나가는 길이다.
휠덜린슈트라세(휠덜린길). 튀빙겐대학에서 휠덜린 묘지로 가다보면 지나가는 길이다.
횔덜린은 1770년 네카 강변의 작은 도시 라우펜(현재 인구가 1만1천명 정도)에서 수도원 관리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두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는 재혼을 했다. 그러나 양아버지도 횔덜린이 아홉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해서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자 횔덜린은 1788년 개신교 기숙사 장학생으로 튀빙겐 대학의 신학부에 입학했다.

이 기숙사는 1536년에 설립된 전통 있는 기관으로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요한네스 케플러(1571~1630) 같은 저명한 인사들도 이곳에 기거하면서 공부했다. 횔덜린은 헤겔(1770~1831) 및 셸링(1775~1854)과 같은 방을 썼으며 이들과 깊은 우정을 쌓았다. 이 세 사람을 가리켜 ‘튀빙겐 삼총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들의 우정은 세 사람 모두에게 정신적으로 매우 풍부한 결실을 가져다주었는데, 횔덜린이 심한 정신질환을 앓게 되고 헤겔과 셸링의 관계가 점차 소원해지면서 1807년에 결렬되었다. 튀빙겐 대학의 개신교 기숙사는 오늘날에도 존속하고 있다.

횔덜린의 어머니는 아들이 성직자가 되는 것을 소원했지만 횔덜린은 대학 졸업 뒤 독일 각지를 떠돌면서 시인으로 살아갔다. 횔덜린은 한 마디로 방랑자였다. 이 기간 중 빵을 벌기 위해 주로 가정교사로 일했다. 서두에서 인용한 ‘네카강’이라는 송가에 나오는 “그대 방랑자여!”는 구절은, 어쩌면 쉼 없이 흐르는 네카강에 횔덜린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방랑하는 시인은 자신이 살고 노래한 시대를 궁핍한 시대로 보았다. 물질적으로는, 즉 빵은 풍요로울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궁핍한 시대라는 뜻이다. “빵은 지상의 결실이나, 빛에 의해 축복을 받아야 하고/ 천둥을 내리는 신으로부터 포도주의 기쁨이 비롯하리라.” 횔덜린이 보기에 이 궁핍한 시대는 인간이 신으로부터 소외되었기 때문에, 즉 세계가 탈신화되었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다. 횔덜린에 따르면 이 시대에 시인은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소명을 갖는다.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 “궁핍한 시대에 시인들은 왜 존재하는가를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대는 말한다. 시인은 마치 성스러운 밤에 여러 나라를 배회하는, 포도주 신의 성스러운 사제들과 같다고.”

이런 점에서 횔덜린은 괴테보다는 실러에 가까웠다. 실러도 횔덜린처럼 탈신화된 세계를 한탄한다. 이 세계는 전적으로 합리적이고 인과적인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 그리고 실러는 횔덜린처럼 탈신화된 세계를 재신화시키고자 한다. 즉 그리스의 신들을 소생시키고자 한다. 실러는 시와 예술의 힘을 빌려 이를 달성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그에게 미학적 교육은 시인의 아주 중요한 과제가 된다. 이에 반해 괴테는 직업이 전문화되고 노동이 분업화된 오늘날의 합리적인 세계에서는 고전적 이상으로부터 체념 어린 작별을 고하고 각자에게 주어진 일상의 요구에 헌신하는 것이 역사적·문화사적 숙명이라고 확신했다. 근대로 들어오면서 신은 은퇴했기 때문에 인간이 자신의 존재와 행위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괴테는 보았다.

횔덜린은 대학에서 신학 이외에도 스피노자(1632~1677), 라이프니츠(1646~1716), 칸트(1724~1894) 등과 같이 당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철학자들을 광범위하고 심도 있게 공부했다. 이때 튀빙겐 대학 교수들의 지도와 더불어 헤겔 및 셸링과의 지적 교류가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또한 대학 졸업 후에도 계속해 스스로의 힘으로 칸트와 피히테의 철학을 학습했다. 그리고 1795년에는 직접 예나로 가서 피히테(1762~1814)의 강의를 듣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독일 관념론이 횔덜린의 문학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횔덜린은 주체와 객체의 구분(칸트) 또는 자아와 비자아의 구분(피히테)을 넘어서 이 둘의 변증법적 합일을 이루려고 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존재에서 찾았다. 존재는 주체나 객체 또는 자아나 비자아보다 근원적이며 이 두 차원을 통합하고 근거지우는 것이다. 이 존재에 도달할 수 있는 방식은 이성에 의한 인식이 아니라 지적 관조이다. 그것은 시인에 의한 미적 관조이다. 횔덜린은 존재의 미적 형상화를 추구한 근원의 시인이었다.

횔덜린의 오랜 방랑생활은 마침내 1806년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정신병 증세가 악화되어 그해 9월 튀빙겐 대학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이 병원 건물에는 현재 튀빙겐 대학의 철학부가 자리하고 있다. 1807년 횔덜린은 그를 숭배하는 소목장이 에른스트 침머의 자청으로 네카 강변에 있는 침머의 집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횔덜린탑이다. 횔덜린은 1843년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수십년간 이 집에서 침머 가족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시를 쓰면서 지냈다.

방문한 날이 토요일이라 오후 두시부터 횔덜린탑의 내부를 관람할 수 있었다. 조금 일찍 와서 기다리다가 제일 먼저 입장했다. 입장료가 싼 대신(내가 이번 시리즈를 추진하면서 낸 입장료 가운데 제일 쌌던 것 같다)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다. 솔직히 볼 것이 없었다. 횔덜린이 기거하던 2층의 반원형 방에는 의자가 두 개 놓여 있고 벽에 그의 시‘봄’, ‘여름’, ‘가을’, ‘겨울’이 걸려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횔덜린탑은 박물관보다는 문화행사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도 일층에서 세 명이 기타를 치면서 무언가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띠었다.

횔덜린탑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횔덜린의 시‘겨울’을 떠올려 보았다. “휴식의 날, 한 해의 종말은 그러하다(사방에 폭풍우 불고 소나기도 내린다)./마치 완성을 묻는 소리와 같다./그리고 나면 봄의 새로운 형성이 모습을 나타내고/ 자연은 지상에서 그 당당함으로 반짝인다.”

김덕영 사회학자·독일 카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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