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스트라스부르(슈트라스부르크)에 있는 게오르크 지멜의 집. 이 집 4층에서 지멜이 살았다. 지멜이 정교수로 있었던 슈트라스부르크대학이 가까운 곳에 있다.
[김덕영의 사상의 고향을 찾아서]
<17>지멜이 말년 보낸 슈트라스부르크
‘돈의 철학’으로 유명한 지멜
도그마 버리고 경험세계 천착
유행·모험 등 사유 대상 삼아
철학의 인식세계 풍요롭게 해
신문에 강의일정 예고될 정도
그의 흔적 어렵게 추적한 끝에
마침내 집 앞에 이르렀는데…
<17>지멜이 말년 보낸 슈트라스부르크
‘돈의 철학’으로 유명한 지멜
도그마 버리고 경험세계 천착
유행·모험 등 사유 대상 삼아
철학의 인식세계 풍요롭게 해
신문에 강의일정 예고될 정도
그의 흔적 어렵게 추적한 끝에
마침내 집 앞에 이르렀는데…
지난 2월 2박3일의 일정으로 슈트라스부르크(스트라스부르), 프라이부르크, 바젤로 길을 잡았다. 이 세 도시는 너무 멀어서 왔다갔다하기가 영 마땅찮은데 서로 인접해 있어 ‘패키지’로 여행을 떠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첫날에는 슈트라스부르크에서 게오르크 지멜(1858~1918)의 발자취를 찾기로 했다. 이 도시는 현재 프랑스령이지만 지멜이 활동하던 당시에는 독일령이었다.
슈트라스부르크는 이번 추로지향 순례에서 가장 찾고 싶은 도시였다. 지멜이 나의 작은 지적 세계를 떠받치는 주춧돌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막막한 도시이기도 했다. 이 시리즈의 기획단계에서부터 수많은 자료를 뒤지고 여러 사람한테 물어보았지만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서 수업시간에 학생들한테 ‘썰렁한’ 유머를 던졌다.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지멜의 흔적을 찾는 것이 다음주까지 숙제다. 못 찾으면 단체기합에다 전원 F학점이다.” 학생들이 키득키득거린다. 그런데 한 여학생이 슈트라스부르크 여행 안내소에 문의를 해보라고 말한다. 그래 속는 셈 치고 전화를 했더니 시청을 연결해 주었다. 그리하여 지멜의 묘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지멜은 전형적인 메트로폴리탄이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태어나 성장했으며, 베를린대학에서 공부하고 박사학위와 대학교수 자격을 취득하고 그 대학에서 사강사로 학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지멜은 불운했다. 그가 부교수로 승진한 것은 사강사로 임명된 지 무려 15년이 지난 뒤였다. 그것도 전혀 보수도 없고 아무런 권리도 없는 일종의 명예직이었다. 그리고 다시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1914년에야 슈트라스부르크대학의 정교수가 되었으나 얼마 뒤인 1918년 세상을 떠났다.
지멜의 불운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그가 받은 시기와 질투도 결정적이었다. 지멜의 강의는 베를린의 엄청난 지적 사건이었다. 학생들뿐 아니라 에른스트 블로흐(1885~1977), 죄르지 루카치(1885~1971), 알베르트 슈바이처(1875~1965) 같은 지식인들도 지멜의 강의를 들었다. 그의 강의는 가장 큰 강의실에서 진행됐으며 신문에 예고될 정도였다. 지멜은 그야말로 대학의 큰 매력이었다. 이 대학의 큰 매력이 대학에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면, 별반 지적 매력도 없으면서 기득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의 밥그릇이 깨지거나 작아지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이러한 불운에도 불구하고 지멜이 학계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지멜의 아버지 사후 그의 후견인이 되었다가 나중에 그를 입양한 사업가가 남긴 막대한 유산의 일부를 상속했기 때문이었다. 기왕 돈 이야기가 나왔으니, 아니 꼭 그런 계기가 아니더라도 지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그의 주저 <돈의 철학>을 언급하고 지나가야 할 것이다. 흔히 이 책은 돈에 대한 비판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지멜은 그와 동시에 돈에 기반하는 문화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지멜에 따르면 돈은 모든 인간적 관계와 사회적 관계를 단순한 양적인 크기와 관계로 환원시켜버리며, 개인을 점점 더 단순한 경제적·사회적 기능의 담지자로 전락시킨다. 게다가 원래 수단이던, 그것도 절대적인 수단인 돈이 절대적인 가치로 고양되며 종래는 신격화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 돈은 현대인의 사회적 삶과 문화적 삶의 물적·경제적 토대가 된다. 돈이 가지는 양적 논리는 일정한 정도를 넘어서면서 질적 논리로 비약한다. 돈의 전형적인 논리인 탈개성화와 탈인격화로부터 해방되어 개성과 인격을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역설적이지만 돈의 소유에 의해 주어진다. 다시 말하자면, 돈을 소유한 개인은 생존을 위한 노동과 투쟁의 유물주의적 단계를 벗어나 사회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 그리고 개인적·주관적 삶에 관심을 갖고 이를 발전시킬 수 있게 된다.
지난 2월 둘째 주 화요일 부푼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그런데 오펜부르크를 경유해 스위스로 가는 열차가 취소되었다. 오펜부르크에는 매시간 슈트라스부르크행 완행열차가 있으며 시간은 30분 걸린다. 연착이야 다반사이지만 운행 자체가 취소되는 것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열차가 사람 마음을 잘 안다니까! 할 수 없이 만하임을 거쳐서 오펜부르크로 갔다. 그 바람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오펜부르크에서 슈트라스부르크로 가는 내내 설레고 흥분되는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과 뒤섞이면서 제대로 자리에 앉아 있을 수조차 없었다.
오펜부르크를 불어로 ‘오팡부르’라고 발음하는 것을 들었을 때, 인접한 두 국가의 언어가 아주 다르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러면서 한 가지 일화가 떠올랐다. 지멜은 1890년대 언젠가 미국의 한 대학으로부터 받은 초빙을 거절했다. 이는 그의 섬세한 인식과 사유를 독일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일화는 다시 오늘날 한국 대학의 한 풍경과 ‘오버랩’되었다. 최근 한국의 대학은 입만 열면 영어강의, 영어강의 하는 바람에 한국의 대학인지 미국의 대학인지 도통 분간을 할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지멜처럼 외국어에 능통한, 그리고 거장의 반열에 오른 지식인도 외국어인 영어를 지적 인식과 사유의 수단으로 삼는 것을 꺼렸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오늘날 한국의 대학이 한번쯤은 진지하고도 근본적인 자아성찰을 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슈트라스부르크 중앙역에 도착하니 이미 오후 1시가 훌쩍 넘었다. 일단 역에 있는 여행 안내소를 찾아가서 도시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를 얻었다. 그곳의 여직원은 독일어를 완벽하게 구사했다.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웬만하면 독일어를 할 줄 알았다. 슈트라스부르크는 프랑스이면서 독일이고 독일이면서 프랑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여직원이 일러준 대로 트램을 타고 한 정거장 가니까 지멜이 묻혀 있는 ‘서부 공동묘지’가 나왔다. 묘비 하나 없는 그의 작은 묘지는 일세를 풍미한 거장치고는 너무나 쓸쓸해 보였다. 관리사무소에서 안내를 해주지 않았더라면 찾지 못했을 것이다. 술 한 잔도 올리지 못한 채 큰절만 하고 애잔한 마음을 달래면서 다시 트램을 타고 슈트라스부르크대학으로 향했다. 이 대학은 1621년에 문을 열었으나 1681년 프랑스로 넘어갔다가 1871년 다시 독일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인 1919년 다시 프랑스의 대학이 되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학생 수는 4만2000명 정도이다. 지멜은 생애 마지막 4년을 이 대학의 철학 정교수로 봉직했다.
지멜은 철학에서 탁월한 연구업적을 남겼는데, 그 영역이 인식론, 형이상학, 문화철학, 예술철학, 생철학 등에 걸쳐 있을 만큼 광범위하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도그마의 세계에 안주하지 않고 경험적 현실의 세계로 임하는 철학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지멜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지성사적 위치를 차지한다. 철학이 경험적 현실세계로 임한다 함은, 철학이 경험과학화됨으로써 경험과학의 하부범주나 아류가 된다거나 또는 철학이 통속화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경험과학이 다루는 대상을 철학이 다른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철학의 인식세계가 넓어지고 풍요롭게 된다. 언뜻 단편적이며 무의미하게 보이는 다양한 현상들이 철학적 인식의 지평으로 들어오게 되기 때문이다. 돈, 유행, 모험, 장신구, 삶과 죽음, 남녀관계와 사랑, 교태, (도자기 등의) 손잡이, 액자, 폐허, 풍경, 알프스산맥, 예술가, 배우 등.
슈트라스부르크대학의 신캠퍼스에서는 상당히 큰 아테나상이, 그리고 구캠퍼스에서는 괴테의 두상이 눈길을 끌었다. 구캠퍼스에 위치한 철학과를 찾았다. 여직원 혼자서 일을 보고 있었다. 그에게 온 용건을 말하고 이 도시에 무엇이든지 좋으니 지멜의 흔적을 찾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러자 잠시 인터넷을 검색하더니 “지멜은 사회학자이니까 사회과학대학에 알아보아야겠네”라고 말하면서 그쪽으로 전화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의 말대로 지멜은 흔히 사회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사회학은 지멜의 부전공이었다. 그의 주전공은 철학이었다. 그러나 지멜은 부전공에서도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사회학적 인식에서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왔다. 지멜은 오귀스트 콩트(1798~1857), 허버트 스펜서(1820~1903), 카를 마르크스(1818~1883) 등 그 이전의 사회학자들이 대변하던 사회에 대한 실체론적 관점을 단호히 거부하고 사회를 개인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상호작용의 합으로 보았다. 지멜에 따르면 상호작용이 존재하는 곳에는 어디서나 사회가 존재한다. 예컨대 연인이 다정하게 커피를 마시는 것도 사회이다. 이로써 사회는 개인들과 그들의 상호작용으로 해체되었다. 사회가 액화(液化)되었던 것이다.
아까 그 여직원이 전화를 끊더니 ‘슈트라스부르크시 아카이브’로 가보라고 말했다. 순간 이번에는 나 스스로 모험을 해보고 싶었다. 이 아름다운 도시는 다음에 구경하기로 하고 지멜이 어디에 살았는지 직접 찾아보기로 했다. 안 되면 하루나 이틀 더 투자할 각오를 했다. 트램을 타고 아카이브로 갔다. 완벽하게 독일어를 구사하며 아주 친절한 직원의 도움으로 여러가지 자료를 뒤졌으나 허사였다. 그러자 그 직원이 서류 상자를 하나 주면서 찾아보라고 했다. 그 안에는 개인의 간단한 신상과 전입날짜 및 사망날짜 등을 기록한 서류가 잔뜩 들어 있었다. 지멜의 것도 있었다. 그러나 나도 그 직원도 당시 시청 공무원이 손으로 쓴 것으로 보이는 주소를 정확히 읽을 수가 없었다. 당시의 서체가 낯선 점도 있었지만, 거기에 적혀 있는 독일어 주소가 오늘날에는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도 있었다. 속이 바싹바싹 탔다. 그러자 그 직원이 비고란에 있는 사람 이름을 보더니 책자를 하나 가지고 와서 그 사람의 거주지를 찾아내었다. 그는 지멜과 같은 층에 살던 사람이었다. ‘슈테른바르테슈트라세 17번지’, ‘천문대 거리 17번지’라는 뜻이다. 지멜은 이 집의 4층에 살았던 것이다.
나는 그 직원에게 이름을 물어보고 몇 번이나 고맙다는 말을 한 다음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트램을 타고 두 정거장 가니 그 길이 나왔다. 땅거미가 내리기 직전이었다. 지멜이 살던 집은 그가 가르치던 대학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었다. 집과 대학 사이에 있는 천문대가 그 거리 이름의 연원이 되었던 것이다. 사진을 찍고 난 다음 나는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어로 몇 번이나 소리쳤다. “전세계 지식인 가운데 지멜이 살던 집을 본 사람이 있으면 나와 봐.”
김덕영 사회학자·독일 카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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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트라스부르크 ‘서부 공동묘지’ 안에 있는 지멜의 묘지. 묘비 하나 없이 쓸쓸한 모습이다.
지멜이 생애 마지막 4년(1914~1918년) 동안 정교수로 일했던 슈트라스부르크대학의 신캠퍼스. 상당히 큰 아테나상이 눈에 띈다.
슈트라스부르크대학의 구캠퍼스. 앞에 보이는 것은 괴테의 두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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