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같지만 추억은 다르다. 구남친 구여친의 재회가 아름답기 어려운 이유에 대한 <찌질의 역사>의 대답.
[토요판] 위근우의 웹툰 내비게이터
<찌질의 역사>의 김풍, 심윤수 작가
<찌질의 역사>의 김풍, 심윤수 작가
최근 한국방송 <연애의 발견>을 재밌게 보고 있다. 서로 치를 떨며 헤어졌던 ‘구남친’, ‘구여친’이 우연히 재회하며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좋았던 점만큼이나 치부도 기억하는 주인공들의 만남과 대화를 보고 있노라면 잠자던 연애세포가 아닌, 잠재웠던 ‘흑역사’가 기어 나오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두 사람이 다시 잘될 가능성을 열어두고 진행되는 이 작품은 연애 경험의 가장 극악한 순간까지 들춰내진 않는데, 만약 진정한 연애의 ‘흑역사’란 무엇인지 보고 싶은 이들이 있다면 김풍(글), 심윤수(그림) 작가의 <찌질의 역사>를 추천하고 싶다. 다만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분노를 이겨낼 자신이 있을 때만.
평범한 남자 민기의 대학생 시절을 반추하는 이 작품의 설정은 드라마틱하진 않다. 1999년이라는 시간이 있고, 대학 시절이라는 분위기가 있고, 민기를 비롯해 시시하고 찌질한 인간 군상들이 있을 뿐이다. 같은 과 여자 동기인 설하에게 반한 그의 첫사랑은 어쩌면 <건축학개론>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찌질의 역사>가 중요하게 다루는 건 첫사랑의 감정이 아닌, 타인과 만나고 소통하는 과정으로서의 첫 연애다. 설하를 유학으로 보내고 동명이인이자 연상인 설하를 사귀며 시작된 민기의 첫 연애는 그야말로 미숙하기에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참사의 연속이다. 첫 섹스를 앞두고 처음인지 묻는가 하면, 같이 간 록 페스티벌에서 힘에 부쳐 같이 놀지 못하는 것에 대해 짜증을 낸다. 그리고 화가 난 애인에게 사과하러 가 용서를 받아낸 뒤 다음의 대사로 독자들의 정신까지 혼미하게 만들었다. “내가 정말 많이 잘못했는데… 너도 잘못한 거 있는 거 알지?” 고백하건대, 정말 이 지점에선 나 역시 모니터를 부수거나 작가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찌질의 역사>가 환기하는 기억과 정서는 분노에 머물지 않고 궁극적으로 부끄러움으로 이어진다. 모든 남자들이 민기만큼 찌질하게 굴진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해심 많은 애인이기에 더더욱 이기적으로 굴고, 사과할 때마다 책임을 회피하고 전가하는 쩨쩨함은 연애 과정에서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찌질의 역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대충 퉁치고 넘어갔던 과오들을 알리바이 없이 재현하며 독자가 자신의 ‘흑역사’를 응시할 기회를 준다. 차인 기억을 바탕으로 스스로 비련의 주인공이 되는 기억의 왜곡이 끼어들 틈은 없다. 이 응시를 통해 비로소 우리는 연애란 순수한 사랑의 구현이 아닌 사람과 사람끼리 실수를 줄여가며 행복을 찾는 과정이라는 것을, 그리고 여기엔 사랑만큼 성숙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물론 이 깨달음을 위해선 죽도록 쪽팔린 내 안의 ‘찌질의 역사’를 꺼내 보아야겠지만, 뭐 어떤가. 이불 몇 번 차고 아주 조금이라도 성숙해질 수 있다면.
위근우 매거진 <아이즈> 취재팀장
위근우 매거진 <아이즈> 취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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