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곳’의 무대인 대형마트에서 주인공 이수인과 직원들이 벌이는 조용한 시위.
[토요판] 위근우의 웹툰 내비게이터
<송곳>의 최규석 작가
<송곳>의 최규석 작가
그럼 이제 주인공이 부러질 일이 남은 걸까. 최규석 작가의 <송곳> 2부 마지막 편에서 ‘분명 하나쯤 뚫고 나온다. 가장 앞에서 가장 날카롭다가, 가장 먼저 부서져버리고 마는 그런 송곳 같은 인간이’라는 내레이션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 이수인과 그의 동료들이 직장인 푸르미의 부당해고 음모를 밝혀내고 승리감에 환호하는 순간, 최규석 작가는 희망찬 미래에의 전망 대신 이수인이 그러했듯 과거 투쟁의 선봉에 섰다가 부러지고 만 노동자 철승의 모습을 비춰줬다.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싸웠지만 피 흘리며 쓰러지고 만 이의 모습을. 자본의 논리 앞에서 생존권을 지키려는 이들의 힘겨운 모습을 그려온 이 작품은 그래서 평소보다 더 먹먹하게 느껴졌다.
한국 노동 문제를 다루는 <송곳>의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최규석이라는 작가가 얼마나 다양한 작품을 통해 한국 사회의 낮은 곳을 그려왔는지 말하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다. 다만 당장의 형편 때문에 꿈꾸는 것도 쉽게 허락되지 않는 아이들(<울기엔 좀 애매한>), 민주주의를 위해 군사정권과 싸우며 피 흘리는 시위대(<100℃>)의 모습을 그리되 그들의 고통을 전시하지 않는 미덕이 <송곳>에서 더 뚜렷해졌노라 말할 수 있겠다. 해당 작품들은 선한 피해자와 악한 가해자의 구도로 독자의 정의감에 호소하기보다는 약자가 결국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폭력적인 시스템의 단면을 들춰낸다. <송곳> 역시 상사에게 인격 모독적인 말을 듣는 푸르미 직원들, 복직 투쟁을 하다가 용역 깡패들에게 폭행과 추행을 당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들의 고통에 밀착해 독자에게 어떤 감정을 강요하기보다는 왜 이 투쟁이 벌어지고 왜 피를 흘리게 되는지 그 맥락을 보여준다. 그들이 피를 흘리니 불쌍히 여기자는 게 아니라, 그들이 왜 피를 흘리는데도 불구하고 이 싸움터에 나가는지 정도는 알자는 거다.
노동법의 범주 안에서 이끌어낸 이수인과 동료들의 승리와 압도적인 물리력 앞에서 부서진 철승의 모습을 교차한 앞서의 장면이 중요한 건 이 지점이다. 1부가 이수인의 송곳 같은 올곧음에 집중하고 2부에선 그가 개인의 고고함을 넘어 사람들과 힘을 모아 작은 승리를 거두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작가는 여기서 그러니 우리 모두 송곳 같은 사람이 되자고 하기보다는 저 송곳 같은 이들이 부러질 수밖에 없는 세상의 막막함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고통을 보며 쉽게 동정하거나 승리를 보며 쉽게 희망에 빠지려 할 때마다 독자와 대상과의 거리를 벌리는 <송곳>의 방식은 그래서 격렬한 감정을 표현하는 순간에조차 선동적이기보다는 계몽적이다. 소위 진보적인 방향을 제시해서가 아니라 시야를 넓혀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래서 결국 공은 독자에게 돌아간다. 이 모든 걸 보고 내린 당신의 판단은 무엇인가.
위근우 매거진 <아이즈> 취재팀장
위근우 매거진 <아이즈> 취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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