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발하고 유머러스할 필요는 없다. 독자의 허를 찌르고 헛웃음을 유발하면서 컷부는 ‘병맛’의 영토를 넓혀왔다.
[토요판] 위근우의 웹툰 내비게이터
<소년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의 컷부 작가
<소년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의 컷부 작가
지금이야 ‘원 소스 멀티유스’의 원천, 새 시대의 서사 장르 정도의 평가를 받고 있지만, 초기 웹툰을 다루는 언론의 담론은 거의 대부분 ‘병맛’이라는 키워드에 맞춰져 있었다. 이 지면을 통해 ‘병맛’ 트로이카라고 소개했던 조석, 이말년, 귀귀 작가의 막나가는 개그 센스와 살짝 무너진 작화가 기존 출판만화와 웹툰을 가르는 가장 뚜렷한 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웹에서 탄생한 이야기꾼들이 서사 장르로서의 웹툰을 발전시키면서 웹툰=‘병맛’이라는 공식은 안일한 기준이 되었고, 각 개그의 디테일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병맛’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부터 잘못된 것이라는 아주 온당한 비판도 나왔다. 그럼에도 말할 수 있다. 오늘 소개하는 <소년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이하 <소무하>)의 컷부 작가는 소위 약 빤 ‘병맛’ 만화작가의 계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수 있다고.
언젠가 이말년 작가의 ‘병맛’ 코드에 대해 기-승-전-와장창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는데, 그런 면에서 컷부는 적어도 ‘병맛’에 있어서만큼은 선배들보다 더 나아간다. 그의 플롯은 기-승까지도 가지 못하고 기-‘병맛’으로 끝난다. 짜장면을 던져서 배달하는 배달원 때문에 짜장면을 뒤집어쓴 고객이 “단무지가 없어요”라 말하고, 변비인 주인공을 도와준다고 하고선 자기가 똥을 싼다. 방귀와 똥, 혹은 동성애 코드 등 소재들은 자극적으로 고르되, 풀어내는 건 극단적인 방식의 허무 개그다. 이말년의 개그가 막판의 ‘병맛’을 위해 이야기를 구성지게 풀어간다면, 컷부는 독자가 뭔가 예측을 하려 할 때 그로부터 가장 벗어난 결말을 보여준다. 그것이 기발하고 유머러스할 필요는 없다. 그냥 독자가 허를 찔린 기분이 들면 그래서 헛웃음이 나오면 된다. 이것이 컷부 식의 ‘병맛’이다.
하지만 컷부의 세계가 선배 세대의 그것보다 수준 낮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소무하> 본편은 아니지만 그가 작업한 모 한의원 극장 광고를 보고 50~60대 관객들이 웃는 것을 보며 ‘병맛’의 직관적 힘을 느꼈던 바 있다. 여타 컬트적인 개그가 코드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과정을 동반해야 했다면, 컷부의 개그는 웃기지 않을 수는 있어도 이해가 안 된 적은 없다. 결국 문제는 웃음의 확률이다. 많은 이들에게 회자됐던 3000년 전의 요원, 4000년 전의 요원이 서로를 구하러 오다가 차가 전복되는 에피소드처럼 성공적인 것도 있지만, 운동회에서 달리기를 하다가 결승선에서 모두가 튕겨져 나온 에피소드처럼 그냥 허무함만 남는 경우도 있다. 단순히 확률을 높이라고 하기에는 그의 극단적인 작법 자체가 도 아니면 모로 흐를 수밖에 없다. 하여 그의 작품이 ‘병맛’의 새 물결을 이끌어내길 기대하진 않는다. 다만 한 극단으로 파고드는 작가들을 통해 ‘병맛’의 영역이 넓어진 건 분명한 것 같다.
위근우 매거진 <아이즈> 취재팀장
위근우 매거진 <아이즈> 취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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